설날 연휴의 마지막 날이다. 아. 쉽. 다… 그럼에도 모두들 잘 보내셨길!
우리 가족은 내가 20대 초반까지는 모두 모여 제사를 지내고 한나절을 보내곤 했다. 흔히 보이는 명절의 모습이었다.
아빠 쪽으로는 우리가 큰 집이어서 엄마와 나는 며칠 전부터 장을 봐서 명절 전날 하루 종일 음식 준비를 하며 보냈다. 종종 숙모가 오시기도 했지만 아주 드물었고 보통 우리 둘이서 준비를 다 했었다. 요알못인 아빠는 주로 청소를 하고 제기들을 꺼내서 차례상 세팅을 하고 그 외 기타 등등을 맡았다. 전을 부치기 시작하면 뿜어져 나오는 그 매혹적인 냄새를 아시리라. 평소에는 합리적이고 깨인 사고의 소유자라고 생각했던 엄마였음에도 차례, 제사 음식에 한해선 엄격하셨다. 차례상에 올리기 전엔 만들어 놓은 음식들을 먼저 집어 먹지 못하게 하셨다. 하지 말라는 금기가 얹어지면 우리는 더욱더 매료당하게 된다. 그 어떤 때보다 더 먹고 싶게 만드는 마법의 금지. 나를 통닭집 앞에서 침을 줄줄 흘리는 강아지에 빙의하게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 아직도 캘빈 클라인 청바지에 티셔츠를 멋들어지게 소화하는 젊은 감성을 가진 엄마, 그러나 유교사상은 아주 알차게 머리에 꽉 들어가 있던 그녀..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언제나 엄마가 전을 부치면서 실수를 하길 바라고 바랐다. 상에 못 올릴 그런 실패작들은 내 입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 핫하! 엄마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몰래 먹기도 하던 그 스릴. 짜릿했다. 갓 만든 전들은 그 자체로도 맛있는데 몰래 먹는다? 게임 오버. 입천장이 다 까져도 좋아..
보조셰프라고는 해도 그저 자잘한 심부름들을 하며 뜨거운 불 앞에서 요리를 하는 엄마 옆에서 그저 조잘조잘 수다를 떨며 응원을 하는 정도의 도움이었기에 명절 준비는 그냥 공부를 하지 않아도 혼나지 않는 특별 휴가 같은 느낌이었달까. 그저 좋았던 그 시절. 손님들을 맞이하고 북적이던 명절 아침도 설렜다. 사람을 좋아하는 나는 내적 흥분 max를 찍은 채-이때만 해도 집에서는 내향적인 척하고 살던 시절이다.- 묵묵히 엄마를 도우며 상을 치우고 설거지도 하는 모습을 보이며 ‘명절날 엄마를 돕는 착할 딸 코스프레’를 꽤나 즐겁게 해냈다. 왕래가 그다지 활발하지 못했던 친가 식구들이 일 년에 2번 정도 보는 날이 참 좋았다. 비록 무뚝뚝하고 어색한 기류가 흐르긴 했지만 사이 나쁜 거 아님..
친가 손님들을 보낸 후 우리도 곧 외출 준비를 했다. 나의 명절 ‘2부’가 시작되는 것이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손님들을 치러내고 나면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큰 외삼촌네 가서 또 한나절을 보내고 오곤 했었다. 엄마는 가족 중 막내였다. 며칠 명절 준비로 힘들어서 입맛도 없어진 엄마는 외갓집에 가서는 막내라는 위치를 충분히 누리곤 했는데 고생한 엄마를 위해 외숙모는 사골 육수를 안 먹는 엄마를 위해 멸치 육수를 내서 따로 떡국을 끓여 주시는 정성을 매년 보이셨다. 사이가 좋아서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참 번거로웠을 텐데 늘 기쁘게 해 주셨던 숙모님께 감사하다. 잠시 외할머니의 소개 시간을 가져 보자. 외할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항상 대문 밖에 나와서 우리가 오는 걸 기다리곤 하셨는데 그걸 잘 알고 있는 나는 차가 서자마자 외갓집 대문으로 냅다 뛰어가 할머니를 만나곤 했다. 그렇다고 인자한 미소로 우아하게 서서 맞아 주시는 거라고 상상하진 말아 주시라. 돌아가시기까지 할머님은 끽연가셨는데, 내가 기억하는 대문 앞 할머님은 약간 포스 있게 담배를 피우시면서 그윽하게 우리가 오는 걸 바라보시곤 하셨다. 멋진 백발의 작은 보스 같은 느낌이었달까. 흥미로운 점은 할머님이 건강검진 때마다 폐 엑스레이가 너무 깨끗해서 의사 선생님도 놀라워하셨다는 레전드 같은 후문. 클린한 폐를 가진 롱텀 스모커 할머니. 다시 한번 느끼지만 역시 유전자가 최고의 인생 치트키. 그렇게 외할머니와 외갓집으로 입성하고 나면 엄마는 소파와 한 몸이 되고 나는 어른들에게 눈도장을 찍고 엄마 대신 음식을 나르거나 치우며 그 단란하고 따뜻했던 북적임을 즐기곤 했다. 이건 비밀이지만 사실 나는 엄마 음식보다 외갓집 음식을 더 좋아했는데 외숙모표 김치는 언제나 변함없이 갓 냉장고에서 꺼내 딴 사이다와 같은 톡 쏘는 청량감과 신선한 맛을 가지고 있었다. 최적의 발효. 정말 끝내주게 맛있었던 그 김치와 함께라면 상 위에 있는 모든 음식을 느끼함 없이 무한흡입할 수 있었다. 그 김치를 전수받지 못한 것이 아쉬울 정도다. 이제 김치를 담그시지 않기에 너무나 그리운 추억 속 인생 김치가 되었다는 슬픈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그 당시 친가와 외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어서 친가 쪽에선 조용한 진지몬으로 변신했고 외갓집에선 어리광을 발사하며 방실방실 웃으면서 어른들의 수다를 들으며 깔깔깔몬으로 진화했다. 이런 행복한 가운데 가장 하이라이트였던 부분은 바로 넉넉하게 주셨던 외가 쪽 어른들의 세뱃돈의 축복. 깔깔깔몬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과장이 아니라 명절마다 주셨던 돈들을 모아서 대학 학비를 거의 대부분 충당할 수 있었다. 넘치는 사랑 감사할 따름이다. 양쪽 조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후 친가와 외가 모두 만남이 많이 줄게 되고 명절 음식 준비의 고단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가족들은 명절이나 제사로 누군가의 집으로 방문하는 일을 대폭 줄이기로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당연시 되었던 엄마와 외숙모님의 명절노동이 사라졌다.
이제 우리는 명절 연휴가 오면 미리 모두가 만남이 가능한 하루를 잡아 점심을 예약해 만나서 먹고 근처 카페에 가서 디저트를 곁들인 티타임을 몇 시간 가지고 저녁을 먹기 전 쿨하게 헤어지고 있다. 12시쯤 만나 4시, 5시면 헤어지는 그런 패턴으로 만남은 짧지만 강렬하게 지속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결혼으로 엮인 in law(며느리, 사위)들도 큰 부담 없이 즐겁게 오는 것처럼(?) 보인다. 조카들도 짧게 만나고 세뱃돈을 받아가니 오히려 좋아한다. 어른들 모임에 있는 게 늘 어릴 적 나처럼 좋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니까. 식당 선정 및 예약이라든지 비용 부분은 3세대인 우리 라인이 맡아서 돌아가며 하고 있다. 3세대들이 어른이 되면서 현재는 친가 쪽 친척들과도 흥이 넘치는 즐거운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는 좋은 소식도 함께 전한다. 삼촌과 티키타카가 넘치는 농담을 하고 사촌들과 여행을 갈 만큼 친해져서 친가에서도 깔깔깔몬으로 완벽 진화를 마쳤다.
어릴 적 북적거리던 그 명절도 그립다. 하지만 그건 그저 종영된 옛날 드라마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같다.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평생 남아 좋은 기억을 주는 인생드라마 한 작품처럼 끝난 것이다. 지금의 형태로 누구 하나 고생하는 사람 없이 모두가 편하게 보는 것도 행복하다. 전보다 사진도 더 많이 찍고 추억의 장소도 다양하게 만들 수 있고 에피소드들도 새롭게 만들어진다. 올해도 모두 건강히 참석해 주셔서 다행이었고 감사하다.
추석에 또 반갑게 만나자. 나의 혈육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