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어떤 이의 결혼이, 오늘은 어떤 이의 죽음이 휴대폰 액정을 통해 배달되어 왔다. 어제는 사랑하는 두 사람을 위해 축하를 바란다 했고, 오늘은 사랑했던 한 사람을 위해 애도를 바란다 한다.
청첩장과 부고장 하단에 찍혀 있는 계좌번호를 통해 건조한 마음을 숫자로 환산해 발송했다. 우리는 어찌 보면 각박하지만 참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다.
나는 몇 해 전부터 어지간히 특별한 관계가 아니고선 경조사에 잘 참석하지 않는다. 한때 내 경조사에도 사람들이 북적거리길 기대하며 숱하게 돌아다닌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어느 날 문득,
내가 그네들 경조사에 눈도장을 자주 찍는다고 내 경조사 손님 수가 비례해서 증가하지도 않을 거니와, 비례한다 한들? 뭐 그리 좋을 게 있나 싶었다.
기대만큼 찾아주지 않으면 그것대로 섭섭한 마음이 남을 테고, 기대 이상 찾아준다 해도 사회생활로 얽힌 셈을 치르러 온 그네들의 북적임이 크게 감동적일 것 같지도 않았다.
언젠가 맞이할 경조사 때 부품한 인맥을 자랑하고 싶은 허영으로 그간 쓸데없이 진을 빼고 있었던 건 아닐까? 친한 몇몇 사람들과 뜨겁게 기뻐하고, 속 깊게 슬퍼하는 외국 사람들의 결혼식과 장례식이 멋지다 생각했다.
그 생각 이후 나는 경조사 발걸음을 눈에 띄게 줄여버렸다.
정(情) 많고 오지랖 넓은 누군가는 나더러 '경조사 참석 의미를 너무 좁게 보고 있네. 사회생활 그렇게 하면 안 되네. 야박하네.' 하며 면박을 줄 때도 있었지만 그냥 듣고 흘려버렸다.
아무튼, 그날 나는 경조사의 기준을 정한 정(定)하다 였다.
사회에서 만난 형식적인 관계의 그들에겐 각박하지만 편리한 휴대폰으로 나름의 예의만 표하기로.
진심으로 축하와 위로를 전하고 싶은 나만의 그들에겐 제일 먼저 찾아가고, 제일 오래 머물기로.
나는 그렇게 기준을 정했다.
물론, 나만의 그들의 기준을 정하는 것은 살아가면서 계속 정리, 정돈해야 할 숙제로 남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