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두 번째 아들은 참 귀엽습니다. 어느 부모가 제 자식 안 귀엽겠냐만은 제 둘째 아들은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평가를 해도 또래 아이들보다 조금 더 귀엽다고 자부합니다. 제가 둘째 아이를 유별나게 귀여워하는 데는 아이의 얼굴보다 말투가 더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 눈에는 얼굴도 참 귀염상입니다. 팔불출이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제 눈엔 그렇게 보이니까요.)
얼마 전 주말 저녁, 둘째 아이가 복통을 호소해 아이를 둘러업고 응급실에 간 적이 있습니다. 응급실에서 환자 분류하시는 여간호사 선생님이 아이를 앉히고 물었습니다.
"어린이~ 배가 언제부터 어떻게 아팠어요?"
"아 웅.. 전~역~ 7시~ 정도연나~? 으음.. 정확~하게능 모르겠는데~" 아이가 대답을 시작하자 말자 간호사 선생님의 마스크 너머로 "아~ 귀여워~ㅎㅎ" 하는 혼잣말이 터져 나왔습니다. 격무에 시달리는 응급실 간호사 선생님이 아픈 아이를 앞에 두고 본인도 모르게 귀엽다며 웃음을 터트릴 정도면 남들 눈에도 귀엽게 보인다는 증명 아닐까요? (제발 그렇다고 해주세요. 그래야 계속 이야기를 해 나갈 수 있으니까요. )
이 아이는 자기만의 고유한 말투를 가지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또래에 비해 목소리와 발음이 아직 덜 여물었습니다. 키도 작은 편이라 원래 나이보다 더 어리게 보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어울리는 말은 아니지만 나이에 비해 동안(?)의 얼굴과 목소리를 가진 것이죠.
귀염귀염한 얼굴, 덜 여문 목소리와 발음, 그리고 자신만의 고유한 말투가 삼박자를 이룰 때면 제 눈에는 세상세상 귀엽습니다. (물론 골 부릴 때나 형이랑 전쟁 모드의 아이는 세상세상 밉상이지만요.)
이렇게 제가 유난히 편애(?)하는 둘째 아들에겐 한 가지 안 좋은 습관이 있습니다. 바로 식습관입니다.
"아빠, 얼큰한 국물에 밥 말아먹으면 역시 든든해~" "아빠, 저는 마카롱 같은 건 너무 달아서 입에도 못 대겠어요~"라고 말하는 어른 입맛의 첫째 놈과 반대로 우리 둘째 아이는 마카롱, 초콜릿, 과자, 튀김, 짜장면... 달고, 짜고, 기름진 음식들을 매우 매우 좋아합니다. 용돈이 생길 때마다 애정하는 프링글스를 잔뜩 사서 책상 서랍에 쟁여두고, 엄마 아빠 눈을 피해 야금야금 꺼내 먹는 다람쥐 같은 식습관의 소유자입니다. 이런 입맛이니 채소와 과일을 입에 대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죠?
게다가 이 녀석은 사내아이치곤 운동신경이 둔하고 활동량도 매우 적습니다. 형이랑 같이 시작한 태권도에서 형이 2품(2단)을 딸 때까지 빨간 띠를 매 본 것에 만족해야 했고, 수영도 형이 접영까지 마스터할 동안 자유형 25미터 완주의 벽도 넘어 보지 못한 채 관두고 말았습니다.
이런 운동신경을 가졌다 보니, 친구들과 함께 하는 몸을 쓰는 놀이에서 늘 술래나 꼴찌를 도맡고 있습니다. 지기만 하는 단체 놀이가 재밌을 리 없으니 어느 순간 아이는 자연스레 나 홀로 노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자유시간이 주어지면 혼자 책을 읽거나, 체스를 둡니다. 체스 상대가 없다면 혼자서 1인 2역으로도 둡니다. (체스는 제가 진심으로 덤벼도 못 이길 만큼 아주 수준급입니다.)
원인에는 결과가 따르듯, 아이의 안 좋은 식습관과 부족한 운동량은 차곡차곡 쌓여 드디어 결실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들어, 아이의 배가 눈에 띄게 부풀어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으로 살이 찌는 것이 아니라 유난히 배만 나오고 있기에 아이 건강에 대한 걱정이 깊어졌습니다. 아이를 앉혀놓고 올바른 식습관의 중요성에 대해 조곤조곤 설파했습니다. 말로는 잘 이해했다 합니다. 하지만 행동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식습관과 건강에 관련된 책을 쥐여줬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는 후딱 읽더니, 잘 읽었다 합니다. 내용도 뚝딱 요약해서 어떤 음식들이 몸에 좋고 안 좋은지 되려 저에게 설명까지 해줍니다. (술이 몸에 제일 안 좋다고 역공까지 곁들이더군요ㅡㅡ;)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 책상 서랍 속 프링글스 재고는 매일매일 빠르게 소진되어 가고 있네요.
정공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나 봅니다. 방법을 바꾸어 봅니다.
"와. 배가 어제보다 더 커졌네? 그 배안에 아기가 들어 있다고 해도 믿어지겠다. 와. 오늘은 또 뭘 몰래 먹었을 길래 배가 더 나왔지?" 자극 좀 받으라고 아이를 볼 때마다 계속 놀려댔습니다.
"아~빠, 놀리지 마세요. 스트레스받을 것 같아요. 스트레스를 받으면 스트레스 풀려고 저는 더 먹겠죠? 그럼 제 배가 더 나오지 않을까요?"라고 응수합니다.
"스트레스를 왜 먹는 걸로 풀려고 해? 운동으로 풀어 봐" 운동을 유도해 봤습니다.
"아~빠~ 사람마다 스트레스를 푸는 방식이 달라요. 저는 운동을 잘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운동으로 스트레스가 풀려요? 저는 제가 좋아하는 거 먹어야 스트레스가 풀리니까 제 배가 더 나오지 않길 원하면 더 이상 놀리지 마세요" 나지막하지만 제법 단호하게 제 유도를 차단해 버립니다.
제 머릿속에는 반격할 말이 없습니다. 차분차분한 말싸움으로는 이 아이를 당할 사람이 우리 집에 없습니다. 이러니 전형적인 사내 성격을 가진 첫째 놈이 이 녀석과 티격태격할 때마다 부들부들 떨었나 봅니다. 저도 약간 부들 댈 뻔했지만 티 내지 않고, 한 발 물러섰습니다.
"알았어. 스트레스 안 줄게. 대신 너 스스로 식습관 바꾸도록 신경 좀 써 봐"
"네~ 저를 한번 믿어보세요~헤헤"
아이는 찡긋 웃으며 저를 살포시 껴안습니다. 참 애교가 많은 녀석입니다. 말투도 나지막하고 사근사근합니다. 이 상황에서도 참 귀엽다는 생각이 듭니다. 딸이 없는 저에게 이 녀석의 애교는 무척 달콤합니다. 사내아이의 애교에도 이렇게 허물어지는데, 딸 가진 아빠들은 오죽할까 싶습니다. 딸내미 애교에 애간장이 다 녹아내린다는 친구의 말이 어떤 건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습니다.
오늘은 둘째 아이와 끝말잇기를 했습니다. 저는 아이와 놀 때 진심을 다 해 승부합니다. 아이라고 잘 봐주지 않습니다. 세상에 나오면 물어뜯길 일이 숱하게 많을 텐데, 미리미리 집에서 패배도 좀 경험해 보고, 상처도 좀 받아보라고 정면으로 승부합니다. (라고 말하지만 제 마음이 넉넉지 못해 최선을 다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얼마 전까진 제가 늘 이겼었는데, 오늘 대결에서는 완벽히 패배해 버렸습니다. (터븀이라는 원소기호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막 던지는 게 아닐까 싶어 네이버에 검색을 해보고서야 패배를 인정했습니다.)
둘째 아이는 평소 게임에서 지더라도 별달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그에 반해, 첫째는 이길 때까지 덤벼드는 성향입니다.) 때문에 이 녀석은 승부나, 경쟁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느껴왔는데 오늘은 웬걸? 이겼다고 노래까지 부르며 아주아주 신나 합니다. 반응을 보니 그간 저를 이기고 싶어 절치부심해 온 것 같습니다.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속으로는 나름대로 경쟁하고, 승부에 집중하고, 패배의 상심도 안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갑자기 아이가 혼자 노는 것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내 생각 이상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끔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혼자 책 읽는 게 더 재밌어?"라고 질문을 던질 때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는 형처럼 운동을 잘하지 않으니까. 대신 책은 더 오래 읽을 수 있으니까."라고 대답했었습니다. 저는 그저 단순하게 책 읽는 걸 더 좋아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건성으로 들었던 것이죠. '나는 형처럼 운동을 잘하지 않으니까'를 흘려버린 채로요.
오늘 아이가 승리의 기쁨을 표현하는 것을 보고 나서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아이도 이기고 싶었다는 것을요. 친구들과 놀이에서 늘 꼴찌만 하던 결과에 대해 내내 속상해왔을 거란 것을요.
안쓰러운 마음이 일었습니다. 뜬금없이 아이에게 제 마음을 표현해 보았습니다.
"00야~ 아빠가 너 얼마나 사랑하는 것 같아?"
"음.. 하늘만큼 땅만큼이라고 하면 식상할 거 같고, 음...... 남산만 해진 내 배만큼이요? 헤헤~"
아 귀엽습니다. 또 귀엽습니다. 자신의 스트레스를 유머로 승화시키는 제 두 번째 아들 정말 귀엽지 않은가요?
참, 아이는 오늘부터 남산만 해 진(?) 뱃살을 제거하고, 운동 능력도 끌어올리기 위해 버핏테스트 100개 훈련을 시작했습니다.(10개 X 10세트) 1일 차 훈련은 매우 성공적입니다. 100일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옆에서 열심히 응원해 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