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하늘은 뿌옇다. 이것이 안개라면 운치일 텐데 안타깝게도 미세먼지라 목만 칼칼치다.(이래 봬도 라임 장인) 이곳에 오래 산 사람들은 회색 하늘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드디어 겨울이 왔구나 한다. 하노이의 겨울은 이렇다. AQI 어플에는 연일 방독면을 쓴 남자가 나타나고, 학교에서는 Purple Day라며 모든 야외 활동을 금지한다.
날씨까지 추워지기 시작하는 12월, 여기저기서 콜록대는 소리가 번져온다. 철마다 도는 유행병을 놓치지도 않고 한 번씩 맛보는 우리 아이들은 이 시기에 꼭 기관지염에 걸린다. 지독하게 트렌디한 아이들이다. (뎅기, 뇌수막염, 마이코 플라스마, 크룹 기타 등등.. 31가지 맛 골라 먹는 재미냐고요.)
그래서 나의 타지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 중 하나가 바로 한인 병원에 있는 한 소아과 원장님이다. 원장님은 돌 전의 유주부터 지금까지 쭉 아이들의 크고 작은 병치레를 함께 해주셨다. 이렇게 말하니 우리 가족만의 주치의 같은 느낌인데 그러기엔 이곳에서 너무 만인의 연예인 같으신 분이시라.
이 분을 추종(?)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약을 꼭 필요한 만큼만 최소한으로 처방해 주시기 때문이다. 아주 가끔 어쩔 수 없이 현지 병원에서 진료를 볼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약을 무슨 소포처럼 여러 상자 받아 귀가한다. 그러니 원장님께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건 뭐, 약 먹이다가 내 멘탈부터 털릴 지경이다.
이런 내가 이따금씩 딴마음을 피울 때가 있다. (혼자 하는 사랑입니다. 앞서 말했듯 만인의 연예인 같은 분이시라) 바로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아플 때. 타지 생활 그리고 주말부부라는 이 환장스런 콤보는 나의 아픔을 그 누구에게도 간호받을 수 없게 한다. 아파도 오롯이 혼자서 아이들을 돌봐야 했고 그 서러움과 짜증은 다시 오롯이 아이들에게 전염됐다. 미니멀한 약처방 같은 여유를 부릴 새는 없었다. 그 대신 가능한 한 빨리 나을 수 있게 해주는 오버스러운 약처방을 찾아다녔다.
조금 전 약 한 뭉태기를 입에 탈탈 털어 넣었다. 이틀 전에 “최대한 빨리 낫게 해 주세요” 하며 역시나 딴맘먹고 처방받아온 나의 부비동염 약이다. 노란 항생제 한 알이 유독 쓰다. 물을 몇 컵 더 마시면서 아이들 진료를 볼 때의 내 모습을 생각했다. “이 약을 꼭 먹여야 할까요?”라고 묻는 정반대의 내 모습. 꼭 필요한 약이 아니라면 굳이 먹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그 약이 해야 할 역할은 엄마의 시간과 몸으로 때워볼 수 있으니까.
’ 엄마는 아프면 안 된다’는 말은 ‘제 약은 세게 지어주세요’라는 말과 정확히 포개진다. 아이들이 조금 더 크면 나도 빨리 낫기말고 건강하게 낫기에 동참해볼 수 있을까. 목구멍에서 노란 약의 쓴 냄새가 아직도 가시질 않는다.
머릿 속에 문구 하나가 번뜩했다.
‘엄마가 먹는 약, 약해도 괜찮아^-^’
물티슈 뚜껑 문구용으로 아주 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