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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티나 Feb 04. 2024

02 풀눈 박보운, 나의 아버지

루이 루이 센루이

풀눈, 


  풀눈은 나의 아버지의 시명(본명이 아닌 시를 쓰기 위해 만든 이름)이다. 풀에도 눈이 있다는 이 참신한 발상처럼 아버지는 본성이 순수하고, 사람에 대해선 한없이 정이 많으셨고, 사람을 돕는 일을 좋아하셨다. 이런 정적인 심성을 가지셨지만, 정의로움 앞에는 무척 강하신 분이셨다고 기억한다. 


아버지 시속에는 항상 자연과, 인간의 심성과 삶에 대한 진솔한 눈이 담겨있었다. 가끔씩 이런 생각을 했었다. 아버지 시들이 이처럼 아름답고, 시 본연의 목적인 감동과 정화를 주는데 왜 사람들에게 많이 읽히지 않는걸까? 하지만 다행스럽게 아버지의 흔적은 요란스럽지 않으나, 영원하게 내 고향 곳곳은 물론, 언제나 가고 싶은 전라도 지리산 자락에도 시비로 남아있다. 

여수 오동도 안에 있는 아버지 시  [오동도와 전설]


  아버지는 내 고향 여수의 문학 발전을 위해 평생을 애쓰셨다. 문학이 부재했던 고향에 문인협회를 창립하여 초대 지부장을 시작으로 지부장을 수년을 연임하셨다. 아버지 뒤를 이어 문인협회를 이끌어갈 문학 인재의 부재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기억하는 고향 여수는 그 당시 문학은 물론이고 문화, 지식, 에술적인 면에서는 빈약했었다. 지부장을 그렇게 오래 연임하셨기 때문에 매년 열리는 어린이날 글짓기 대회에 나갔다 온 학생들은 문인협회 지부장님, 박보운씨를 오늘 뵙고 왔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그 당시 어린 청소년들이 누군가를 “씨”라고 호칭했다면 거기에는 무한한 존경심이 담겨있었다. 내 고향에서 우리 아버지는 그만큼 존재감이 크신 분이셨다. 



여수에 소재한 몇몇 학교의 교가 가사도 만들어주셨는데, 내가 살던 동네 문수동 "문수 중학교" 교가이다. 한국을 떠난 지 15년이 넘어 문수중학교에서 아직도 이교가를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 이상을 심는다, 무지개를 캐낸다" 언제 들어도 활기차고 씩씩한 느낌이다.  












  이처럼 내 고향 여수의 문학 발전을 위해 모든 걸 쏟아 부어, 문학과 인간과의 간격을 더 가깝게 해 주셨던 아버지께서 생을 마치고 마지막 가시는 길은 너무도 외로웠다 들었다. 난 그때 미국에 있었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내 기대에 의하면 아버지의 장례 의식은 마땅히 시민장(시에서 주관하는 장례)으로 치뤄져야했고 고향에 거주하는 모든 문학인들은 머리 숙여 아버지께서 마지막 가시는 길을 따스함과 존경으로 보내드려야 했다. 얼마나 많은 고향의 시인들이 등단 전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는 지 , 난 그때 그 시인들의 이름을  대부분 기억한다. 그나마 공무원으로 일했었던 나라도 그 때 거기에 있었다면, 시청을  찾아가 건의라도 해볼걸 그랬나 후회도 되고 여지껏 맘이 아프다. 여수시에서 아버지께서 지닌 재능을 얼마나 많이 다방면으로 이용했는지 난 잘 알고있다. 한국은 그랬다. 뒷배경이 없으면 자유 의지만으로는 백프로 능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내 아버지는 혼자 그렇게 고향의 문학 발전을 위해 살다가, 오롯이 가족안에서 외롭게 가셨다. 


  어려서부터 나와 아버지 사이는 항상 뭔지 모를 불편함이 있었다. 청소년기부터 성인이 되어서도 아버지와 나는 수없이 언쟁을 벌였다.  높은 지식과 문학 발전에 대한 기여도로 지역민으로부터는 깊은 존경을 받는 아버지였지만, 그의 열정을 뒷받침하기에 우리집은 참 가난했다.  그러다보니 가정의 경제적 책임은 전적으로 엄마의 몫이었고 그걸 감당하기엔 엄마가 가진 조건은 너무 빈약했다. 나는 막내였음에도 항상  엄마편에서 아버지를 공격하는 상황에 서곤했다. 밖에서는 아버지를 한없이 존경했지만, 집에서는 잦은 논쟁으로 아버지께 대들던 예의없는 딸이었다. 다른집 막내는 한없이 사랑스럽기만 했을텐데… 그때 우리집 막내,  나는 참 못됐었다.


  맘속으론  아버지를 너무 존경하고 이해했지만, 밖으로 튀어나오는 내 행동과 언어는 항상 날이 서 있었다. 엄마, 아버지 두분의 대화가 항상 겉돌아 아버지 맘은 공허했고 엄마는 무시당함이 억울하고 분했다는 걸 너무도 잘 알았다. 하지만 어린 내가 보호해야 할 사람은 덜 배우고 삶에 지친 우리 엄마였다. 아버지는 가끔씩 어린 나를 아주 독하게 나무라셨다. 아버지의 그 독설에 울기도 많이 울었다. 지금 생각하니 내 강한 성격을 원만하게 다듬어주기 위해 아버지는 일부러 독하게 날 대하신거 같다. 


  내 성격을 보면 아버지와 참 비슷하다. 격이 떨어지는 게  참을 수 없고,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무언가를 항상 하셨던 아버지처럼 나도 그런다. 아버지는 고전읽기, 클래식 듣기, 명화보기, 심지어 표준어만 사용하도록 지도하셨다. 남을 대할때 어떻게하면 더 공손하고 우아하게 보일 수 있는지 방법을 알려주시기도 했다. 누군가를 안내할 때 두손을 모아 알려드릴 방향을 가르킨다거나 긍정적인 맞장구를 칠때 녜, 녜라고 두번하면 긍정적인 효과가 두배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하! 어쩜 이런 것들까지 섬세하게 가르치신건지 감탄스럽다.  


  초등학교(그땐 국민학교) 저학년 학생중 “킬리만자로의 눈" 여주인공이 데보라 카라는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작가가 마가렛 미첼이라고 말했던, 여러 사람들과 음식을 먹을때는 짭쩝 거리는 소리가 나지않게 입을 꼭 다물고 씹고, 헤게모니, 카타르시스, 딜렘마 , 그로테스크 이런 단어를  대화속에 사용했던 난, 참 별난 여자애였다. 고등학교땐 학비를 늦게 내면서도 댱당했던 , 그 당돌하지만 예의에 어긋나지 않았던 행동과 언어,  지식, 내 신념속에 항상 아버지가 계셨다. 


   아버지는 내가 알고있는 모든 아버지들 사이에서 가장 방대한 지식을 가진 분이셨다. 그래서 난 궁금한 건 뭐든지 아버지께 물어 보았고 아버진 언제나 답을 주셨다. 

"걸어다니는 사전"은 내가 아버지를 부르던 닉네임이다.  영화, 책, 뉴스, 문학, 사람, 어떤 것이든 모두 다 답을 주셨다. 난 어려서 모든 아버지는 내 아버지처럼 지식이 풍부하고 궁금한 건 무엇이든 답을 주시는 줄 알았다. 아버지 덕에 친구들은 항상 나에게 그랬다. 넌 어떻게 그런걸 다 알아? 넌 왜 그렇게 지식이 많아? 그런 영화도 있어? 난 친구들에게 그랬다. 너희 아버지께 물어봐 다 알려주실거야. 내 아버진 그러셨다. 다 알려주셨다. 


   따스한 기억은 언제나 슬픈 기억과 함께 한다. 대학을 졸업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그 때 난 시청 공무원,  아버지는 고향에서 좀 떨어진 다른 지방 신문사 편집국장으로 오래 일하셨다. 그 후 지방 신문사 편집국장을 그만두시고 집에만 계셨다. 자신을 붙잡고 있던 열정이 사라지니, 글쓰기도 책 읽기도 사라졌고 아버지의 세상은 외롭고도 외로워 보였다.  


  어느 날 아버지가 그러셨다. " 용이가 자살했단다. 외로워서 그랬을거다"...용이 아저씨는 수필가였고, 아버지께서 집에만 계신 이후 유일하게 찾아오시던 아버지보다는 젊으셨지만, 대화를 가장 많이 했던 아버지의 친구다. 용이 아저씨 자살이후 신문지 한면을 펼치신 채, 읽지도 않으시면서 그냥 펼치고만 계셨던,  멍한 시선으로 하루종일 같은 의자에 앉아 계시던 아버지의 모습, 슬픈 시인의 눈, 높은 지성인의 눈... 아버지와의 논쟁이 너무 그리웠지만, 우린 다시는 논쟁을 벌일 수 없게되었다. 정말 아버지에 대한 연민에 너무나도 슬펐던, 그런 하루 하루가 그 후 몇년으로 바뀌었고 내가 한국을 떠나오기 전까지 아버진 그러고 계셨다.


   내가 시민장을 치루지 않았음을 불평하면,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사람들 원망하는 맘 거두라고 말씀하셨을것이다. 그래! 우리 아버지는 가시는 길 외로웠다거나, 거창한 장례식을 바랄 분이 아니셨다. 내 기억 속 아버지는 항상 저만치 세상과는 동떨어진  혼자만의 청정지역에 사는 사람같았다. 그냥 푸르른 청산속에 우뚝 서 계시면 어울릴 것 같은 분이셨다. 우리 아버지는 시민장이 아니어도, 그렇게 훌훌 털고 푸르른 청산에서 잘 계시리라 믿는다. 


  아버진 나에게 항상 그러셨다.  “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삶이 어렵고 외로워지기 마련, 넌 성격상 나와 가장 많이 닮았고 너무 똑똑해서 미래가 염려되고 안쓰럽다. 그런 너의 진가를 지키고 빛내기 위해서는 훗날 네 힘이 닿는날까지 직업을 가져라. 결혼해도 남편과는 별개로 홀로 우뚝 서라. 그래야 너의 가치를 잃지 않고 그나마 외롭지 않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땐 그 말이 죽을때까지 일을 하라는 말처럼 들려 정말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매일 매일 깨닫는다. 


  한국에서 공무원만 20년 일했던 난, 지금 미국인 회사에서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다. 한번도 접해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는 생소한 일이지만 현재까지는 잘해내고 있다고 생각된다. 여기서도 홀로서기를 이리 잘 하는거,  다 아버지 덕이다.  아버지의 독설 때문이다.


  다행히도 나쁜 기억은 아버지께서 주신 좋은 것들에 의해 금방 묻혔다. 곧은 성품, 강인함, 인내심, 절제, 내가 배운 모든 것들은 아버지께서 주신 고귀한 것들이다. 아버지의 그 가르침이  현재 내가 일을 즐길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고, 날 강한 여자로 만들어 준 힘이 되었다. 


   지금 보니 아버지는 미래를 내다보는 눈으로 날 그렇게 길들이셨다. 어디서든 잘 살수 있도록 독립심과 강함을 가진 여성이 되도록 날 훈련시키셨다. 


내 아버지만의 독특하고 격이 있는, 멋진 단어들 다시 듣고싶다.  아버지의 언어는 깊이 묻혀있다 막 발견된 황금과도 같았다. 

 


내 아버지, 시인 풀눈 박보운, 

시인 남편을 위해 열심히 살다 가신 엄마, 

두 분  너무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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