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모든 일이 있다.
골목길은 유난히 조용하다. 빗방울은 불 꺼진 집의 창문을 두드린다. 창문 너머엔 아무도 없었다. 비가 오고 물기에 젖은 창은 풍경을 지우고 새로 쓰고를 반복했다. 물기를 머금은 빛이 번지며 생기는 작은 파문. 도시의 소음은 적막 속으로 묻혀 가고 있다. 창문을 따라 흐르는 빗물을 멍하니 바라봤다. 빗물이 틈새를 뚫고 얼굴을 스치며 흘러내린다. 벽을 타고 내려가는 물방울처럼 나도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다.
사람들은 우산을 부여잡고 서둘러 지나갔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바닥에 고인 빗물이 튀어 오른다. 그러는 사이에 신발은 젖어들고 바지 밑단도 축축 처지며 비의 무게를 견디고 있다. 빗물에 젖어 형체를 잃어가는 여느 헬스장의 전단지 같은 종이 쪼가리들이 서서히, 무너진다.
차가운 물줄기가 피부에 닿을 때마다 깨어나는 감각이 있다. 어디선가 툭. 접힌 자국이 아직 선명한 종이가 멈춘다. 제법 험난한 비행이었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어떤 잔해가 남을지 알 수 없다.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지만, 분명 나를 향하고 있는 시선을 느낀다. 이 순간만큼은 내내 젖어 있다. 구름이 걷힌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모든 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