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컵이 흐물거리는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손끝에 닿는 축축하고 물기를 머금은 질감. 아무리 단단해 보이는 것도 결국 흔들리며 형태를 잃을 수밖에 없다는 걸 문득 깨닫게 된다. 그리고 워터파크에서 본 새파란 입술들. 물에 떠밀려 다니는 얼굴들이 떠오른다. 물 위로 고개를 들면 안도의 숨을 쉬고, 다시 물에 잠기면 허우적거리는 순간들이 이어진다. 거대한 풀장에 쏟아지는 물줄기가 눈을 가리고, 비명 섞인 웃음소리가 여기저기 울려 퍼진다. 사람들은 그렇게 물결에 잠겼다가 떠올랐다가 하며 희미해지고 있다. 흐려진다.
생각해 보면 물은 사람들의 목을 조르듯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벽에 부딪히는 파도, 잠깐의 휴식 후 몰려오는 인위적인 물살. 주저 없이 휘말리는 사람들은 거대한 물의 장벽 속에서 하나둘 창백해졌다. 소리 없는, 혹은 감각 없는 파도들. 고요함에 눌린 그 속에서 손을 휘젓고 있었지만, 결국, 수면 아래에서만 모든 것이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입술이 파랗게 질려가는 사람들을 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물속에서 잃어가는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고. 차오르는 물이 언젠가는 모든 형체를 흐리게 하고 지워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은 끝내 사람들의 얼굴에 가득 차올라 모두를 같은 색으로 물들일 것만 같다. 우리는 같은 날 파도의 흔적을 남기며 녹아들고 있었다.
물속에서는 모두가 연결된 듯했다. 창백한 입술들이 서로를 비추며, 차가운 물을 잔뜩 머금은 눈동자들. 마치 물이 사람들을 감싸며 하나의 얼굴을 만들어내는 듯한, 그러면서도 개개인의 윤곽을 흩뜨리는 느낌. 공간의 특수성을 빌려와선 잠시나마 머물며 그저 부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아무도, 어떤 것도 확실히 자리 잡을 수 없는 이곳에서는 존재마저도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
손끝에 닿는 물방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 그리고 물에 젖어 흐물거리는 종이컵처럼, 언젠가 내 안에 넘치도록 가득 찬 무언가도 형태조차 불분명해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