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글을 쓰는 이유
# 네 번째 글
수술 후 동글이의 첫 웃음을 기억한다. 환우 모임 카페에서 다른 아이들은 수술 후 3일 차에 웃음을 보이곤 했다는데 우리 동글이는 수술 후 6일째 되던 날 처음으로 방긋 웃어주었다. 그만큼 많이 아프고 고됐나 보다.
동글이는 일반 병실로 옮겨진 후, 등에는 커다랗고 무게감 있는 솜덩이 4개가 올려졌고 며칠 동안 엎드려서 지내야만 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수술 후 한 번 안아주지도 못했으니 동글이에게도 힘겨운 시간이었을 듯하다. 분유도 엎드려서 먹어야 했고 불편한 자세로 먹으니 동글이는 먹고 토하고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런 동글이를 잠시 옆으로 눕혀 소화하도록 도와주면서 낮과 밤 할 것 없이 아이를 돌보았다.
열심히 엎드려 지낸 덕분에 뇌척수액이 흐르지 않아 다행히 더 악화되지 않고 제일 큰 고비를 넘어갔고, 동글이는 신경외과에서 재활의학과로 주치의 교수님이 바뀌었다. 생후 100일. 남들 다하는 100일 잔치도 못해주고 동글이는 재활치료를 받기 시작했고 동글이는 계속 울었다. 30분 동안의 치료 시간 내내 울기만 했다. 아직 너무 어려서 엄마인 내가 함께 있지만 나는 옆에 존재하기만 할 뿐, 아이가 울어도 치료는 해야 했기에 우는 동글이를 옆에서 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낯선 사람과 낯선 환경을 계속 마주해야 하는 동글이는 얼마나 많이 불안했을까. 저렇게 하기 싫어 온몸으로 강한 울음으로 표현하는데 계속해야만 할까.. 치료실을 다녀오면 나도 마음이 힘들어 유모차를 끌고 병원 이곳저곳을 걸어 다녔다. 처음 접하는 재활치료와 치료실의 분위기. 그리고 치료사 선생님으로부터 아이의 현재 상태를 계속 마주해야 하는 나. 버거움의 연속이었다.
여섯 명이서 함께 지내는 다인실 병동 생활도 만만찮았다. 동글이처럼 아주 어린아이도 있었고 조금 더 큰 아이도 있었지만 병실 안은 밤낮없이 울음소리가 들렸고, 스스로 호흡이 어려운 환아는 구토, 타액 등의 분비물을 흡입해야 하는 석션으로 기계 소리와 아이가 괴로워하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그렇게 입원 후 2주가 지났을 무렵 나는 몇 십 번씩 구토를 하고 물만 먹어도 구토가 올라오는 상태가 됐다. 동글이를 안고 있으면서도 틈만 나면 웩웩하던 그때 옆옆자리 엄마가 내게로 와 말씀하셨다.
“내가 애기 조금이라도 안아줄 테니까 가서 편하게 화장실이라도 다녀와요. 애기 아까 보니까 너무 귀엽더라고요. 내가 안아줘도 될까요?”
초등학교 5학년 현이의 엄마였다. 아기 옆을 지키며 보호자의 무게를 견디다 몸이 아픈 나를 살펴주시는 그 마음에 너무 감사했다. 동글이도 그분의 따듯함을 느꼈는지 낯설을 법 한데 현이 엄마의 품에 안겨 울지 않았다. 그렇게 현이 엄마의 관심 덕분에 잠시 아기를 맡기고 응급실에 가서 진료를 받고 위경련 약을 받아올 수 있었다. 약을 먹어도 구토 증상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고, 밤에도 새벽에도 현이 엄마가 와서 동글이를 잠깐식 봐주고 가셨다. 그 덕에 나는 잠깐이라도 숨을 돌렸다.
다음 날 아침 신경외과 교수님이 회진을 오셨고, 내 얼굴을 보더니 아프다는 걸 바로 눈치채셨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고,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겠냐고 엄마가 너무 힘들다고 그만 퇴원하라고 하셨다. 그땐 쉽게 그럴 수가 없었다. 수술 후 6개월까지가 재활치료 골든타임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내가 아픈 건 꾹 참아야 된다 생각했다. 아픈 몸으로 고집을 부리자 재활과 교수님도 오셔서 그럼 집에서 조금 쉬다가 다시 입원 재활 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퇴원을 권유하셨다. 그렇게 아파도 미련하게 고집부리던 나를 따듯하게 위로도 해주시고, 도움 주신 교수님들 덕분에 홀가분하진 않았지만 퇴원을 결정하고 편안한 집으로 돌아오게 됐다.
편안함도 잠시, 집에 온 뒤로 몸은 회복되었지만 동글이가 나 때문에 재활 치료를 못 받게 된 것에 대해 마음은 편치 못했다. 몸은 조금 편해졌으나 불안하고 미안한 마음은 다시 치료받으러 가지 않으면 해소될 것 같지 않았다. 그런 내게 퇴원 후 잘 지내고 있냐는 현이 엄마의 연락에 이런 내 마음들을 살며시 이야기하니 한 장의 사진을 보내주셨다.
잘했어
잘했었고
잘할 거야
그 어느 말보다 진심으로 와닿는 위로였다. 그때 보내주신 이 사진을 저장하고 힘들 때 종종 찾아보았다. 엄마가 아프면 아이를 돌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이 시기 아이를 키워본 부모라면 모두가 잘 안다. 그날 그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나대로 동글이는 동글이대로 병실에서 무척 힘겨운 시간을 보냈을 것 같다. 나 홀로 어린아이를 간호하며 끙끙이던 그날, 도움 주신 현이 엄마의 따듯함을 온전히 기억한다.
아이가 아프게 태어난 이후 지금까지 수없이 마음이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일을 반복했다. 그 시기의 마음 상태와 과정들을 떠올려보면, 내가 마음이 힘들고 무너지는 순간들에 모두 곁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다시 일어설 수 있음을 발견했다. 힘겨운 마음들 끝에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말이다. 앞으로도 나는 그런 글들을 쓰게 될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내가 그랬듯 삶을 지탱해 준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릴 수 있게 되기를.
by 마음 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