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전쟁을 겪은 적도 학살을 목격한 적도 없다. 당연한 것인가. 아니다. 많은 사람의 노력과 행운이 따른 (혹은 불운을 피한) 결과다. 올해에도 우크라이나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 그리고 남수단에 전쟁이 있었다. 나처럼 평범한 누군가가 총에 맞았을 것이고 다른 누구는 가족을 잃었을 것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경악과 성찰, 반성의 이야기를 글로 접한 적이 있다. 굳이 자세히 알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다른 세상에서 벌어진 특수한 이야기로 여겼다. 그러나 내가 나고 자란 땅이라고 자유롭지 않음을, 한강 작가 때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싫어도 손가락 봉합 수술 사진을 똑바로 쳐다본 경하처럼. 충분한 거리를 두고 보아도 편하지 않았다.
제주에서 삼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열 살 미만의 아이들 천 오백 명이 죽었다고 한다. 절멸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목격자는 누가 이걸 물어봐 주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았다 한다.
그 말을 막 들어신디 명치 이신데 이디, 오목가심 이디, 무쇠 다리미가 올라앉은 것추룩 숨이 막혀서. 내가 죄 지은 것도 어신디 무사 눈이 흐리곡 침이 말라신디 모르주. 몰른다곡 내보내야 하는 것을 알멍도 이상하게 대답을 하고 싶었져. 꼭 내가 그 사름을 기다렸던 것추룩, 누게가 이걸 물어봐주기만 기다리멍 십오 년을 살았던 것추룩. (작별하지 않는다, 230쪽)
곁에 있던 사람이 거대하고 잔혹한 폭력 앞에 쓰러졌을 때, 행여 살아있을까 맘 졸이다가 결국 희망을 놓게 되었을 때, 떠난 시점도 불확실하고 시신조차 찾을 수 없을 때, 남은 사람은 긴 시간 어떤 마음으로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잠을 잘까. 작가는 이 무서운 고통에서 지극한 사랑을 발견했다.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같은 책, 311쪽)
죽음을 두려워하기 전에, 적어도 이런 죽음이 다시없는 세상이 되도록, 사랑이 고통이 되지 않도록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사는 것이 운 좋은 자의 책무다. 작가는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았는데, 마음을 뒤흔드는 소설 앞에서 신념이라 부를만한 것이 하나 자리 잡는 것을 느낀다. 좋은 글의 힘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