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이상한 세계, 이상한 언어

편집위원 다정

by 문우편집위원회
Speak Weird,
Speak Queer.

얼마 전 자기네 동아리에서 만들었다고 애인이 선물해 준 키링(key-ring)에 적힌 문구다. 홀로그램으로 박힌 문구가 무지갯빛을 반사하며 건네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이상하게 말하자, 퀴어를 말하자. 아니, 동어반복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퀴어Queer의 사전적 의미는 ‘이상한’이니까.

퀴어는 이상한 존재들이다. 1991년 테레사 드 로테리스가 「퀴어 이론Ⅱ」을 발표한 이후, ‘퀴어’는 성소수자를 일컫는 대안적 명칭으로 그들 스스로가 재전유하여 사용했다. 자신들의 존재를 이상하다고 명명함으로써 “우리는 이상한 존재들이다! 이상한 우리를 사회는 받아들여라!”라고 외치게 된 것이다. 이들 이상한 존재들의 말하기는, 그리고 이 이상한 존재들에 대해 말하는 일은 정말 말 그대로 ‘이상하다.’

나는 어떻게 내가 퀴어라는 걸 알았을까? 평범하게 살기도 힘든 세상에서 퀴어들은 어떻게 ‘이상한’ 사람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된 것일까? 이것은 꽤나 기이한 일이다. 정희진은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정체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맥락 속에서 구성된다. 모든 정체성은 차이를 가로질러 형성된다”[1]고 설명했다. 정체성은 결코 스스로 구성할 수 없으며, 타자의 승인이 필요한 일이다.

윤이형의 단편소설 <루카>는 루카가 어떻게 루카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루카가 루카로 살기 위해 부딪혀야 했던 타자들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나의 존재를 이상하다 말하는 거대한 타자


당연한 말일 수도 있지만 소설 <루카>의 주인공은 루카다. 그런데 루카의 이야기지만 소설에서 루카는 ‘너’, 2인칭으로 존재한다. 소설을 이끄는 1인칭 화자 ‘나’는 루카의 옛 연인이었던 딸기다[2]. 루카와 헤어진 후 어느 날 딸기에게 루카의 아버지가 찾아오고, 루카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면서 과거 루카와의 만남을 회고하는 것이 이 짧은 소설의 내용이다.

2인칭의 주인공 루카는 신앙심이 깊은 가족 내에서 함께 교회를 다니며 성장했다. 루카의 아버지는 거대 교회의 목사고, 흔히 말하는 ‘혐오세력’이다. “차별금지조항 삭제 같은 구체적인 일을 벌”이고, “우리 같은 사람들을 힘으로 들어 올려, 보세요, 똥구멍에서부터 악마 들린 자들입니다, 하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다. 이런 분위기의 가족 내에서 루카는 급작스런 아웃팅[3]을 당한다.


너에게 첫 번째 커밍아웃이 없었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청년부에 떠돌던 소문을 듣고 온 너의 누나가 저녁 가족 예배 자리에서 그 사실을 밝혔다. 마음의 준비를 할 여유도 없이 찾아온 아웃팅이었으므로 모두가 나름의 크기와 방식으로 상처를 받았다고 너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서? 내가 묻자 너는 슬프고 재미없는 이야기야, 하고 말하며 웃었다. 너도 알잖아 어떤 건지.
(125쪽)

그러자 너에게 소리친 기억이 떠올랐다. 계속 소리를 쳤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지 않으면 입이 없어지고 목소리가 없어지고 몸 전체가 녹아 없어질 것 같았으니까요. 아마도 어떻게 그렇게 모두를 속일 수 있느냐는 말을 했을 겁니다. 가족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고 너 자신을 속이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요.
(142쪽, 루카 아버지의 회고)


그의 목사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도 보수적인 젠더 규약을 철저히 내면화한 타자로, 거대한 사회적 목소리를 대변한다. 그에게 아들의 성정체성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웃팅을 당한 즉시 루카는 가족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당하고 그동안 자신이 속해있던 가족과 교회를 비롯한 거의 모든 공동체에서 쫓겨난다.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정체성 이론은 이러한 배제의 경험과 구조를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은 젠더 규약이라는 모태 안에서야 비로소 분명한 ‘나’가 되는데, 주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젠더화된 주체로 존재하는 것이고, 성적 욕망을 젠더 규약 속에 있게 하는 아버지의 법에 ‘복종’하게 됨을 의미한다. - 소설에서는 말 그대로 ‘(루카의) 아버지’가 복종해야 할 젠더 규약을 상징한다.- 사실상 주체의 성적 욕망은 젠더 규약에 의해 규정되고, 인정받고, 또 처벌받는다. 섹스와 젠더, 그리고 성적 경향은 당대 사회의 규범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4] 사회는 오랜 역사의 시간 속에서 남성과 여성으로 이분화된 젠더 규약의 전통을 지켜왔고, 이에 어긋나는 차이는 배제하고 그 존재를 지워왔다.

이러한 정상성의 규범과 관습은 쉽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교적 성공적으로 가족에게 커밍아웃한 딸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타인으로부터 정체성의 부정과 배제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로부터 “언제 변하는 거냐” 하는 등의 반응을 듣는 것이 그러했다.


시간이 흘러 간신히 상처는 봉합되었지만 나는 그때 사귀던 사람과 결국 헤어졌고 성소수자 부모모임이라는 어려운 자리까지 나와준 엄마에게 마음 깊이 고마웠지만 고백을 하던 날 들은 수많은 말들과 그 뒤로도 오랫동안 들어온 말들은 어디로도 가지 않고 내 몸속에 아직 따끔거리며 남아 있다. 추석이면 아버지는 집에 온 나를 데리고 뒷산으로 나갔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 아래를 걸으며 그래서 너는 변하지 않는 거니? 언제 변할 건데? 하고 한 점도 변함없이 기다리는 어조로 묻는 아버지의 지친 목소리를 들으면 당장 늑대로 변해 아버지 앞에서 닭의 목을 물어뜯으며 피를 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126쪽)


이렇게 사회라는 거대한 타자가 부정하고 배제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아는’ 것은, 절대화된 어떤 다른 타자의 존재 때문이 아닐까. 사랑이라는 감정은 어떤 특정한 타자에게 권력을 부여하여 자신에게 절대적인 타자로 만들지 않는가. 정체성을 직면하는 일은, 다른 타자들을 다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절대화된 다른 타자의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발견된다.


나는 그런 것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신을 만나본 적이 있었다. 루카, 내가 너를 만난 것이 그가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내가 그 신에게 경배를 드리고 기도를 바칠 필요는 없었다. 그는 가만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증명하는 신이었고 나에게도 너를 사랑하는 것 외에는 다른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았으므로.
(144쪽)

이상한 언어를 건네는 타자로서의 성소수자


성소수자들 역시 사회가 자신을 ‘하나님을 속이고 나 자신을 속인’ 자로 규정당하고 배제당하는 채로 가만히 있지는 않는다. 이들이 존중받아야 할 인권에 대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왔다. 성소수자 역시 사회에 말을 건넬 수 있는, 그리고 사회를 구성하는 동시에 사회를 만들어가는 타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노력이 헛된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딸기 앞에 마주 앉은 루카의 아버지, 딸기가 맞서왔던 권력의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이 결국 자기 세계의 균열을 겪고 있었으니까. 그가 굳게 믿어왔던 정상성의 규범이 깨지는 경험을 하고 있었으니까.

루카의 아버지는 자신의 게이 아들의 존재, 그 자체로 (말없는) 기이한 메시지에 부딪힌 후에 자신이 겪은 고통을 딸기에게 풀어놓는다. 교회 목사로서 오랜 시간 가져왔던 믿음과 아들의 성정체성을 동시에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는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에 오히려 안정을 찾는다. 그러나 몇 년 뒤에야 아들의 죽음은 자신의 이성으로 하여금 받아들이기 더 쉽기 때문에 스스로 만든 허구라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의 믿음이 살아있는 아들을 죽인 것이다.


우리 안에 들어가 살아 있는 사자와 호랑이를 손으로 만지면, 그 정도로 무서운 경험을 하면 다른 무서움이 사라질 거라고 그는 생각한 것이었다. 그 다른 무서움은 그때까지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잡을 수 없던 그의 어떤 기억과 연결되어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이 게이라는 사실과 자신이 한평생 속해 살아온 교회라는 두 세계를 그는 동시에 감당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어느 하나는 사라져야 했다. 네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믿는 것으로 그의 혼란은 수습되었고 그의 건강을 염려한 주위 사람들은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진심으로 애도했고 신으로부터 용서받았다.
(148-149쪽)


루카의 아버지는 목사 일을 계속하고 있지만 더 이상 신은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어쩌면 성소수자인 루카가 조금이나마 균열 낸 작은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굳게 믿던 세계에 균열이 났으니 그것이 고통스럽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그 고통을 루카가 겪은 고통에 비할 수 있을까. 딸기가 끝내 그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이유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타자다


윤이형 작가는 작가의 말에 이렇게 고백한다. “평범한 사랑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고.


이 이야기는 서로를 사랑해서 함께 살기 시작한 두 사람이 늦은 밤 등을 돌리고 각자의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장면을 떠올리다 시작되었다.
(중략)
혼자서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아닌 상태로 있다가 괜스레 서글픈 기분이 되어버리는 한 사람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살기 위해 자신에게 중요한 무언가를 매일 말없이 조금씩 놓아버리는 사람을 생각했다.


소설 속에서 딸기가 괜스레 느꼈던 서글픈 감정은 어디서 온 것일까. 루카가 딸기와 지내기 위해 조금씩 놓아버렸던 건 무엇이었을까.

다시 두 사람의 커밍아웃에 대해 되짚어보자. 딸기가 철저한 준비 끝에 비교적 성공적으로 커밍아웃을 수행하고 부모님과도 지속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반면, 루카는 갑작스러운 아웃팅 뒤에 가족으로부터 단절을 겪는다. 루카가 딸기와 지내기 위해 조금씩 놓은 것 중에는 이러한 ‘친밀감 있는 공동체와의 관계 유지’ 같은 것이 포함될 것이다. 한편 루카와 함께 하면서도 딸기가 느낀 서글픈 감정은, ‘우리가 같지 않다’는 데에서 왔을 것이라고 나는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커밍아웃은 퀴어로서의 자기 인식을 수행하는 퀴어담론의 핵심적인 장치 중 하나다. 같은 퀴어이지만 루카와 딸기의 커밍아웃 과정은 달랐고, 이것은 퀴어로서의 자기 인식을 다르게 형성했을 것이다. 퀴어로서의 자기 인식을 수행하는 과정도 당연히 달라진다. 딸기는 퀴어인권운동 관련 단체에 몸담으며 퀴어인권에 대한 목소리를 내온 사람이지만, 그에 비해 루카의 퀴어로서의 자기 수행은 (영화 동호회 활동을 제외하면) 비교적 소극적이다. 이 차이가 어느 날 저녁 등을 대고 앉은 책상에서의 서글픔을 만들었고, 결국 이별이 되었다. 서로가 닮은 존재라 여겨 사랑에 빠졌지만 서로가 얼마나 다른지를 깨달으며 이별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작가의 말마따나 “평범한 사랑 이야기”다. 사회가 성소수자에게 그랬듯, 성소수자가 사회에게 그랬듯 성소수자 개인들 역시도 서로 다른 타자였다.

그러나 서로 다른 자기 수행 과정이지만 이 과정은 모두 퀴어하다. 루카와 딸기는 서로의 타자였기 때문에 서로 같은 퀴어이면서도 다른 모습으로 퀴어한 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 사회에도 자신을 비추어줄 타자가 필요하고, 그것이 퀴어적 삶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서로를 안아줄 수 있다


나는 루카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루카의 가족이, 루카의 교회가, 우리 사회가 루카를 포용해 줄 수 있었다면 루카는 행복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루카를 포용할 수 있는 곳이 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루카의 존재가 루카의 아버지에게 그랬듯이, 성소수자의 존재는 어쩌면 부정하고 싶을 만큼 머리 아픈 것이 당연할 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서 언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이 언어는 이미 누군가에 의해 구성된 범주일 뿐이다. 퀴어는 생소하고 이상한 범주로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직 이상한 범주의 정체성에 대해 일부의 일부조차 이야기하지 못했다. 트랜스젠더라거나 바이로맨틱[5], 에이섹슈얼[6] 정도는 어느 정도 관심이 있었다면 한 번쯤 들어봤을 정체성부터 젠더플루이드[7], 인터섹스[8], 뉴트로이스[9], 오토코리스섹슈얼[10] 등 생소하기만 한 정체성들까지 모두 성소수자의 범주에 있다. 흔한 오해들과는 달리 성소수자에는 동성애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에 따라 다양한 성 정체성이 존재한다. 자신의 존재를 생소한 언어로 규정하고 증명하고자 하는 이들은, 시스젠더[11]중심적이고 이성애중심적, 유성애중심적인 언어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과 싸워야 한다. 언어를 둘러싼 이데올로기 투쟁이 일어난다.

성소수자들의 말하기는 제도 언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사유 방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기존의 규범적 언어 양상과는 다르다. 오히려 규범을 깨는 언어다. 이들은 처음부터 잘못 설정된 규칙, 즉 젠더이분법과 이성애, 가부장 중심의 자본주의의 판을 뒤흔든다. 고정갑희는 『성이론』에서 이 판을 “성장치” 개념으로 표현했다. 신체, 서사, 국가, 가족, 교육, 종교, 미디어 등의 성장치들이 성을 성별화/성애화 하거나 신비화, 공간화 함으로써 이데올로기를 유지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다양한 성장치들은 젠더 이분법과 이성애 중심의 이데올로기를 유지, 재생산하고, 성을 신비화하거나 가족, 학교, 국가 등의 특정한 공간으로 배치, 구획화 함으로써 성을 둘러싼 구체적 체제 및 그 속에서 내면화하게 된 것들을 제대로 성찰하고 들여다보지 못하게 한다.

성소수자가 세상에 외치는 것은 사회에 살고 있는 모두가 각자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차이를 생각하고,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구조와 이데올로기의 재구조화다. 이를테면 ‘혈연 또는 남녀의 혼인 관계로 구성된 가족’의 개념을 해체하고 보다 다양한 형태의 가족과 공동체, 개인 간의 호혜적인 관계를 통해 동등하게 사회적 권리들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식이다.[12] 이렇게 생각하면 이들의 이상한 말하기가 꼭 이들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아 사실 나는 퀴어문학에 대해 쓰고 싶었다. 그런데 결국 “평범한 사랑 이야기”를 두고 이토록 긴긴 글을 쓰고 있다. 평범한데 ‘퀴어’할 뿐이다. 아니, 세상에 평범하기만 한 사랑 이야기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의 사랑 이야기가 그렇다. ‘퀴어’한 이야기는 더 많이 쓰여지고 더 많이 말해져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그 삶이 겪는 약한 부분까지 감싸 안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돕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퀴어문학은 상상의 세계를 말하는 것도, 기이한 말하기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현실에 있다. 내 삶이 여기에 있다. 우리로 인해서 세상은 이상해질 것이다.



[1]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05, p.17

[2] 주인공의 이름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실 분들을 위한 첨언 : 루카와 딸기는 당연히 실명이 아니다. 소설 속에서 두 주인공은 퀴어 영화동호회에서 처음 만났고, 퀴어 커뮤니티에서는 아웃팅 방지를 위하여 이렇게 실명보다 별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3] 아웃팅(Outing)은 성소수자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에 대해 본인의 동의 없이 밝히는 행위를 말한다.(위키백과 참고)

[4] 조현준,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정체성 이론』, 한국학술정보원, 2007, p.8

[5]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로맨틱 끌림을 느끼는 사람.

[6] 무성애자라고도 한다. 어느 누구에게도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사람.

[7] 유동적인 젠더, 때때로 남성이거나 여성일 수도 있고, 둘의 혼합일 수도 있으며, 다른 논바이너리 젠더일 수도 있다.

[8] 전형적인 남성, 여성의 신체 분류에 들어맞지 않는 성적 특징(성기, 성염색체 등)을 가진 사람.

[9] 단일한 정의 없이 중성/중립 젠더, 여성도 남성도 아닌 젠더 등으로 쓰인다.

[10] 섹슈얼한 감정을 느낄 수 있지만 자신이 주체가 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 사람.

[11] 자신이 사회에서 지정받은 신체적 성별(sex)과 본인이 정체화하고 있는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이 ‘동일하다’, 혹은 ‘일치한다’고 느끼는 사람.

[12] 한국에서도 2014년 생활동반자법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가족 형태를 포괄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법안이 발의된 바 있다.



참고문헌

윤이형, 〈루카〉,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2015년 제 6회)》, 문학동네, 2015


고정갑희, 『성이론』, 도서출판여이연, 2011

나영, 「정체성과 차이의 정치를 넘어, 퀴어 운동의 다자연애를 꿈꾸며」, 『퀴어인문잡지 삐라』 창간호, p.184-198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05, p.17

조현준,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정체성 이론』, 한국학술정보원, 2007

한채윤, 「엮어서 다시 생각하기: 동성애, 성매매, 에이즈」, 권김현영 외, 『성의 정치 성의 권리』, 자음과모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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