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김뀨뀨
활개 치는 혐오에 모두가 익숙해져 있는 세상이다. 인간이라면 누릴 수 있는 당연하고 보편적인 권리인 자유가 마치 전부 실현된 것처럼 말하는 세상에서 모두는 언제 어디서든 ‘취존’을 부르짖을 수 있게 되었다. “동성애자를 차별해서는 안 되지만 동성애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게이들끼리 사귀고 레즈들끼리 사귀는 건 좋은데, 내 눈엔 안 띄면 좋겠어.”, “나는 저출산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노키즈존은 좋아. 애들도 시끄럽고 애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맘충도 짜증 나고.”, “건물에 청소하는 사람은 분명 필요하지만 그 사람들이 노조를 꾸리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해. 귀족 노조라는 말이 왜 생겼겠어?” 누군가에 대한 혐오와 차별과 착취도 취향이니 존중해 달라는 목소리들은 어느 외계인의 것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미 익숙하게 들어오던 목소리들이다. 그들은 누군가가 벽장 밖으로 드러나기를 택했다면 그로 인한 모든 결과는 그의 책임이라고 시선을 돌린다. 이것을 혐오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걸 반증하는 듯이, 오늘도 어디선가 묻고 따지지도 않고 ‘누군가’가 ‘무엇’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것은 혐오범죄가 아니라며 가해자를 ‘미친놈’, ‘이상한 놈’으로 치부하고 피해자를 ‘당해도 싼’, ‘도덕적 결함이 있는’ 사람으로 폄하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익숙한 세상에서, 혐오가 판치는 세상에서 사는 오늘의 내가 아무 일 없이 홍대거리를 나돌아 다니고 카페에 앉아 연유라떼를 마시고 버스를 타고 귀가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재수가 좋아서였다.
이 글에서 말하는 ‘혐오’는 결코 감정의 문제가 아닌,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차별의 문제이다. 내가 진짜로 성소수자나 여자, 외국인 노동자, 장애인 등을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의 문제는 혐오의 핵심이 아니다. 무언가에 대한 혐오를 바탕으로 누군가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차별하고 억압하는 사회구조를 이야기해야 한다. 이러한 혐오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세상에서, ‘지금 이대로 있는 그대로’가 좋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일단 그건 나중에 보겠다고 하는 세상에서, 너나 나의 일상이나 삶은 결코 네 것도 내 것도 아니다. 물리적인 것이든 비유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나보다 ‘힘’이 더 센 강자가 나를 해치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는 날 것 그대로의 벌거벗겨진 삶일 뿐이다.
혐오에 무감각한 세상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태초에 세상이 혐오에 무감각하게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약자에 대한 혐오는 힘을 둘러싼 정치이며 그것이 오늘의 이 세상을 만든 것이다. 힘을 유지하고자 하는 집단은 약자혐오를 통해 집단의 ‘적’을 만들어내고 적의 존재는 아군의 울타리를 단단하게 만든다. 적에 대한 이야기와 이미지는 의도와 목적에 따라 선별되고 이러한 작업을 흔히는 논점 흐리기, 프레임 씌우기, 존재 지우기 등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작업이 진행되고 적이 만들어지면서 집단 내에서는 ‘내가 적의 위치로 탈락될 수도 있다’는 공포가 확산된다. 그러한 강박은 타자로부터 고개를 돌리게 한다. 타자의 아픔 앞에서 눈을 감게 한다.
올해 5월에서 7월까지 큰 이슈가 되었던 육군 내 성소수자 색출과 그렇게 해서 색출된 성소수자 A대위, 그리고 A대위를 유죄로 만든 군형법 제92조 6항, 이 사건을 둘러싼 공방은 약자에 대한 혐오정치를 잘 드러내고 있다. 군대라고 하는 특수한 공간에서 군 기강의 유지와 강화는 약자에 대한 혐오를 기반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군대는 남근중심적이고 이성애중심적인, ‘서로를 성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억압된 남성 간의 유대[1]’가 강조되는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에서 군내 성소수자의 존재는 군 기강이 무너진다는 이유로 부각되며[2] 강제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그에 따라 군내의 권력관계로 인한 폭력 – 공관병 착취에서부터 군내 성폭력까지 - 은 쉽게 은폐된다. 동성애자의 항문 성교, 강제 추행에만 초점이 맞춰지고 그로 인해 군내에서 있었던 모든 폭력은 사람들의 시야에서 흐릿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군형법에서 성폭력에 대한 조항이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처벌이 가능한, 추행에 관한 제92조 6항이 여전히 공공연하게 살아 숨 쉴 수 있는 이유이다. 성소수자를 색출해 내라는 명령 및 실행, 처벌은 군대라고 하는 공동체의 유대를 강화하는 장치로써 기능했다. 군 기강이 흔들린다는 불안은 성소수자를 밖으로 끄집어냄으로써, 마치 그들을 끄집어내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인 것처럼 말함으로써 잠재워진다. 이렇게 성소수자 혐오는 하나의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된다.
이와 동시에 약자의 속성을 적극적으로 지우려고 하는 시도들은 약자 혐오범죄를 말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작년 5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을 비롯한, 그동안 ‘묻지마 범죄’로 치부되었던 약자를 표적으로 한 폭력사건들이야말로 이러한 방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을 그저 어떤 정신병을 앓고 있는, 이상하고 특이한 미친 사람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으로 독해하는 것은 사건의 맥락과 본질을 흐린다. 결국 검찰은 이 사건을 조현병 환자에 의한 우발적인 살인 사건으로 공표해 버린다. 여성혐오라고 하는 차별과 억압의 구조는 공권력에 의해 또다시 묵인당해야 했다. 하지만 어머니와 여동생, 여자친구를 사랑하는 ‘우리’는 그럴 리 없으며 괜히 모든 정상인 남자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몰지 말라는 수많은 혐오의 목소리들을 혐오범죄로부터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희생자가 혹시 꽃뱀은 아니었는지, 희생자가 얼마나 ‘희생자’ 자리에 부합하는지를 품평하는 목소리들 또한 여전히 기억한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의 가해자를 외계인으로 상정하고 나와는 다르다고 선을 긋는 행위들이야말로 혐오를 재생산한다. 그 재생산된 혐오는 올해의 왁싱샵 여성혐오 살인사건[3]과 여성 유튜버에게 살해 협박하는 것을 방송한 유튜버 김윤태·신태일 사건[4]을 낳았다. 두 범죄의 피해자들은 약자였기 때문에 범죄의 대상이 되었으며 가해자들은 혐오의 문법을 적극적으로 내재화한 사람들이었다. 이것을 지우는 순간 혐오의 구조는 깨지지 못한 채 강화된다.
약자에 대한 혐오는 앞서 언급했듯이 현 상태를, 내부의 결속력을 공고하게 다지기 위한 장치이다. 올해 5월 논란이 되었던, 정부에서 발표한 성교육표준안도 마찬가지로 ‘정상’의 결속력을 굳히기 위한 장치로 독해가 가능하다. 여성과 남성이라고 하는 두 개의 성과 서로 다른 성 간의 결합이 정상이고 보편으로 여겨지는 세상이다. 성교육표준안에서는 두 성에 대한 편견과 환상이 마치 사실인 것 마냥 설명되어 있다. 또한 성교육표준안에서는 그 정상성에 어긋나는 존재들인 성소수자의 존재는 지워져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성소수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존재를 부정당하는 존재들은 음지로 숨어들어야 하며, 음지에서 양지로 고개를 내미는 시도들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이루어진다. 그러나 성교육표준안 밖의 지금 여기 현실에는 그러한 보편에 균열을 내는 수많은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젠더플루이드 등의 ‘퀴어’들이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라고 벽장을 탈출하고 있다. 이러한 균열들을 은폐하고 성별이분법적인, 이성애중심적인, 남근중심적인 세상의 모습만을 그려내는 시도들 또한 세상 곳곳에 내재하고 있는 혐오를 숨기며 재생산한다.
이렇듯 세상은 혐오에 무감각하기를 모두에게 요구하며 그렇게 모두는 훈육되어 간다. 사건은 언제나 한 발짝 뒤에서 스크린 너머로 전달되고, 외계인으로 그려지는 미친놈에 의해 어딘가 당할 법도 했을 모난 피해자 두 사람만이 선명하게 묘사된다. “어휴 세상엔 정신 나간 사람들이 참 많아”라고 중얼거리며 텔레비전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누른다.
그러나 혐오는 구조의 문제이다. 어느 한 미친놈의 문제도 아니고, 어느 누군가의 호불호 문제도 아니다. 그 구조 속에서 모두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와 타자에 대한 혐오를 습득하고 내재화한다. 그리고 이 구조를 유지하고자 하는 힘이 혐오를 적극적으로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혐오의 문제는 나를 가리키고 있는 혐오의 화살을 옆의 누군가에게로 치워버려서 끝날 문제가 아닌 것이다. “혐오의 정치는 어차피 다른 혐오 대상을 찾아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싸움을 당장 눈앞에 닥친 혐오를 피하거나 없애려고 애쓰는 구도가 아니라, 혐오를 필요로 하는 자들의 숨은 의도에 집중하고 그 필요 자체에 맞서는 판으로 가져가야 한다.”[5] 우리는 눈이 멀어 혐오를 볼 수 없게 된 것이 아니다. 혐오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감각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이제는 생존을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다시 보고자 하는 시도들이 필요해졌다.
혐오에 익숙해져 있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공포에 시달리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혹여 벽장 속에 갇혀있는 ‘진짜 나’를 드러냈다가 공동체로부터 배제당하지는 않을지, 폭력에 노출되지는 않을지 전전긍긍해야 한다. 자신이 정상으로부터 이탈될지도 모른다는 끊임없는 강박을 요구당하는 것은 사람의 삶이 아닌, 노예의 삶이다. 이럴수록 나와 타인과 세상을 둘러볼만한 여유는 사라진다. 생존에만 시선이 가있을수록 삶에 대한 상상력은 점점 줄어든다. 동시에 나도 모르는 사이 혐오라고 하는 거대한 억압 구조의 작은 기계 부품이 되어버린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의도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누군가를 배제하고 상처 입힌다. 내가 누군가를 찌를 수도 있지만 마찬가지로 나도 누군가에게 찔릴 수도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혐오의 순환구조는 삶을 좀먹는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혐오에 익숙해져 있는 세상에서 혐오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은 언제나 사회의 기억 저편으로 잊혀가야 한다. 혐오에 대한 무감각으로 인해 죽어야만 했던, 폭행당하고 상처받아야만 했던 이들은 계속 있어왔고 그들 혹은 그들의 주변에서는 그 혐오에 의한 폭력이 망각되지 않도록 발버둥 쳐왔다. 그는 ‘무엇’이었기 때문에 폭력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달라고 말이다. 그는 여자였기 때문에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과 왁싱샵 여성혐오 살인사건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는 게이였기 때문에 동료들과 길을 걷다가, 사랑하는 사람과 팔짱을 끼고 걷다가 이름 모를 사람에게 구타를 당하고 욕설을 들었다. 그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교복을 입고 촛불집회에 나갔다는 이유로 낯선 사람에게 성희롱 당하고 집에나 가라는 조롱을 들었다. 그는 외국인 노동자이었기 때문에 고용주에게 하루 종일 구타당하고 임금을 받지 못했다. 이런 세상 속에서 나의 삶은 과연 어디까지 다할 수 있을까. 어느 미친놈들을 욕하며 한순간만 분노하기엔 리모컨 전원 버튼이 너무 무겁다.
나는 노예로 살아가는 것을 거부하겠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더 이상 노예로 살아가지 않기를 권하고자 한다. 혐오에 익숙한 세상 속의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혐오에 민감하게 감각하는 법을 고민하고 익혀야 한다. 내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에 균열을 내고 처음부터 다시 세상을 읽어내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을, 그 기민함을 가장 익숙한 세상에서 가장 낯선 존재들이 가르쳐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내가 아끼는 글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자 한다.
퀴어 정치학은 정체성을 안정되고 초역사적 사건으로 가정하기보다 젠더와 섹슈얼리티라고 여기는 것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배치되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권력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를 탐문한다. 퀴어 정치학의 이런 성격은 퀴어의 삶이나 LGBT/퀴어에 해당한다고 여겨지는 것만을 논의의 범위로 제한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이 세상을 해석하는 인식론이듯 퀴어 정치학 역시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배치되는 방식뿐만 아니라 그것에 제한되지 않으면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질문하고 세상을 해석하는 인식론이다.[6]
가장 낯선 존재들을 세상에서부터 지우지 않을 때, 우리는 좀 더 다양하고 다채로운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사람’의 범주는 확장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내가 남자든 여자든 젠더퀴어든,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양성애자든, 연애를 하든 안 하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내가 그 무엇이든 경계가 희미해져야 한다. 경계와 경계를 넘나들 수 있게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는 우리는 서로에게 외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혐오의 대상들은 서로 닮은 얼굴을 한 내 곁의 너이자 네 곁의 나이다. 이 사실을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퀴어 퍼레이드가 한창인 서울시청 앞 광장 속에서였다. 광장에서 “FREE HUG” 푯말을 들고 있는 사람과 포옹을 할 때 전해져 오는 맥박과 온기가 그와 내가 사람임을 증명해 준다. 그의 이마에도 나의 이마에도, 심지어 광장 옆에서 동성애 반대 집회를 하는 사람의 이마에도 땀방울이 맺혀있을 뿐이다. 나는 ‘사람’이기를 원한다. 나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혐오가 여전히 유효한 문법인 세상을 함께 거부하자고 말하고 싶다. 인생은 섹슈얼리티보다 크고, 삶은 사랑보다 유장하다.
[1] 우에노 치즈코,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호모소셜, 호모포비아, 여성혐오」, 은행나무, 2012.05.02.,p36
[2] 남근중심적이고 이성애중심적인 젠더권력구조는 성적인 것을 억압한 남성 간의 유대를 배경으로 한다. 이 때 남성 간의 성적인 시선은 금지되는데 그것은 성적 주체 간에 서로를 성적 객체화 하는, 성적인 시선은 남성 간의 유대를 해치는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책, p35-36
[3] 30대 남성 배모씨가 유명BJ의 브라질리언 왁싱 영상을 통해 신상이 유포된 왁싱샵 여주인을 살해한 사건. 그는 그곳에 손님으로 찾아가 왁싱 시술을 받은 후 흉기로 피해자의 목을 찔렀다. 그리고 피해자의 체크카드를 훔치고 강간을 미수하고 여자가 죽지 않자 여자를 한 번 더 찔러 숨통을 끊었다.
이세아, 「30대 남성, 인터넷방송으로 신상 알려진 여성 찾아가 살해 … “또 여혐살인” 분노 일어」, 여성신문, 2017.08.01., http://m.womennews.co.kr/news_detail.asp?num=116021#.WY6mdzfu7CQ
[4] BJ김윤태가 한 여성 게이머이자 BJ가 ‘남성혐오’를 했다는 이유로 그의 신상을 털고 살해 협박을 하며 그의 집으로 살해하러 가는 영상을 생중계했다. 그러나 결국 김윤태는 범칙금 5만원만을 물게 되었다. BJ신태일은 그 여성BJ의 실명과 얼굴을 찾아 인터넷에 허위 유포했다.
박용필· 곽희양, 「“‘갓건배 집 찾아간다” 협박, 신상털고, 집 찾아다니고, 생중계까지…」, 경향신문, 2017.08.10.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708101156001&code=940100
[5] 한채윤,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왜 한국 개신교는 ‘동성애 혐오’를 필요로 하는가?」, 교양인, 2017.01.10., p190
[6] 루인,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음란과 폭력을 다시 생각한다」, 교양인, 2017.01.10., p65-66
1. 우에노 치즈코, 역 나일등,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은행나무, 2012.05.02.
2. 정희진 외 4인,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교양인, 2017.01.10.
3. 이세아, 「30대 남성, 인터넷방송으로 신상 알려진 여성 찾아가 살해 … “또 여혐살인” 분노 일어」, 여성신문, 2017.08.01.,
http://m.womennews.co.kr/news_detail.asp?num=116021#.WY6mdzfu7CQ
4. 박용필· 곽희양, 「“‘갓건배 집 찾아간다” 협박, 신상털고, 집 찾아다니고, 생중계까지…」, 경향신문, 2017.08.10.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708101156001&code=94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