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다른 이야기하자

수습편집위원 니나

by 문우편집위원회

나도 모르게 했던 말들


“나 요즘 살쪘어.”

“내 팔뚝은 너무 두꺼워”

“아니야 너보다 내가 더 뚱뚱해.”

이런 대화, 한국 여성으로서 한 번쯤은 친구 혹은 가족과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체중과 신체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일상 속 대화에 빠짐없이 스며있다. 팔뚝과 허벅지의 두께, 얼굴 크기, 팔다리의 길이…. 몸을 둘러싼 대화는 자신의 몸에 대한 불만족과 부끄러움, 혐오감을 부추긴다.


위에 언급된 맥락의 대화, 즉 ‘팻토크’는 자신의 몸(몸매, 신체 지수 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부정적으로 주고받는 대화를 뜻한다. 미디어에서 비추어지는 연예인들의 마른 몸과 자신의 몸 사이의 괴리는 신체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킨다. 수치심은 곧 다른 사람이 나의 몸을 어떻게 보고 평가할 것인지로 이어진다. 팻토크의 내용은 총 여섯 가지를 포함한다. 요구되는 식습관과 운동 습관에 관해 얘기하는 것, 마른 몸의 유형에서 벗어나거나 과체중이 되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것, 먹고 운동하는 습관을 다른 이들과 비교하는 것, 다른 사람의 체형이나 외모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 자신의 몸무게나 체형과 식습관에 관해 얘기하는 것, 영양 보충이나 식사를 대체할 만한 것, 혹은 운동을 하는 전략에 대한 것이다(Arroyo & Harwood, 2012).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우리를 옥죄어오는 팻토크를 일상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뱉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왜 모두가 마른 몸, 가는 다리와 팔을 위해 운동을 하고 다이어트 보조제를 먹고, 이상적인 몸에 대한 집착과 강박을 갖는 것일까? 몸에 대한 부정적이고 혐오적인 시선을 바탕으로 한 대화의 물꼬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마른 몸에 대한 집착과 강박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한 번쯤은 겪는 통과의례다. 실제 한국 여성의 95%가 “나는 뚱뚱하다”라고 여긴다는 조사 결과까지 존재한다. 하루 종일 앉아 있던 고등학생 시절, 적어진 운동량으로 찐 살을 보고 어른들이 “대학 가면 다 빠진다.”라는 말로 나를 격려하며, 살을 ‘빼는’ 행동이 정답인 듯 이야기하는 걸 들은 경험이 있다. 사람들은 타인을 보고 “얼굴이 좋아졌다.”, 혹은 “살이 좀 찐 것 같은데?”라고 묻는다. 이 말을 듣는 당사자는 당연히 마음이 편치만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몸과 얼굴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 아닌 평가를 남기는 타인들의 시선에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전전긍긍하며 대답한다.

“살 좀 빼야겠어.”, “요즘 너무 뚱뚱해졌어.”



보이는 게 다가 아닙니다

지방흡입, 비만클리닉 등 다양한 외모 관리 분야 시술이 상업화되고 발달한 현대의 소비사회는 여성의 날씬함과 마름을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동일시한다. 모 성형 광고에서는 지방흡입 시술을 햄버거 가게의 ‘드라이브 스루’와 ‘특급 배송’에 빗대며, 언제 어디서나 편히 받을 수 있는 시술임을 어필한다. 광고 속 여성들은 가늘어진 팔뚝을 보며 만족스러운 얼굴을 짓는다. 최근에는 성형 광고 속 여성들이 실제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라 AI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 사진으로 대체되었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얼굴과 몸을 보고 그 대상과 비슷해지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굉장히 모순적이지 않은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인물과 비슷한 신체를 가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돈을 내고 몸에 칼을 대는 상황이.


길거리나 영화관의 대형 광고판, 버스나 지하철의 음성 광고와 같이 성형수술을 홍보하고 얼굴, 몸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요소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이런 광고들은 음식점에 방문하듯, 문구점에 들르듯 우리의 일상 속 퇴근길에, 하굣길에, 주말에 시간과 돈만 있다면 언제나 편리하게 지방을 제거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는다. 여성들이 무의식적으로 ‘날씬해지기 위해 지방흡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외모지상주의를 심화시킨다. 길에서 아무렇지 않게 성형광고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겉으로 보여지는 몸과 얼굴에 많은 신경을 쏟고 있다는 증거다.


외모지상주의가 꼭 상업과 연관된 측면에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가정, 직장, 학교 등 일반적인 인사를 건네고 안부를 물을 때 외모 평가가 자연스레 따라온다면, 겉모습에 따른 차별 대우는 공고해진다. 긍정적인 외모 평가(살 빠졌네, 예뻐졌다)는 칭찬처럼 들리지만 외모지상주의를 더욱 강화할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 외모와 몸이 업무 능력뿐 아니라 인격까지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일은 너무나 비일비재하다. 비만인 사람은 성실하지 못할 것이라는 편견이나, ‘용모가 단정한 알바 구합니다’, ‘깔끔한 인상 우대’와 같이 채용과정에서 외모와 몸매를 평가요소로 고려하는 것처럼 외모도 하나의 스펙이 되는 사회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비만에 대한 혐오와 관련이 있다. 비만인 사람에게는 자신의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사람, 게으른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직접적인 꼬리표 외에도, 간접적인 차별적 시선도 존재한다. 사람들은 ‘비만=건강하지 않은 몸’으로 규정해버린다. 비만에 대한 편견은 이미 사회에 널리 퍼져있다. 날씬하지 못한 것을 성격적인 결함이나 게으름으로 연결지으며 지양해야 할 상태로 여긴다. 소리없는 교묘한 형태의 혐오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평가하고 추구하는 몸들

비만에 대한 혐오와 더불어 SNS를 비롯한 각종 미디어를 통해 전파되는 이상적 신체에 대한 관념 또한 외모강박의 원인 중 하나이다. 자본주의와 미디어가 형성한 이상적인 몸—하얀 피부, 높은은 코, 긴 다리, 쌍커풀 있는 눈, 마른 몸—에 대한 개념이 사회 곳곳에 파고들어 몸에 대한 인식을 바꾼 것이다. 집중적인 체중 관리와 식단을 통해 마른 몸을 유지하는 연예인의 몸을 보고, 그것이 이상적이고 모두가 추구해야 마땅한 신체인 것처럼 여긴다. 도달해야 할 몸을 정해두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에 여러 수단을 동원한다. 물 단식, 초절식과 같은 방법들이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수없이 공유되고, 체중감량이라는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 정보공유방도 생겨났다.


동영상 플랫폼 틱톡은 ‘뼈말라[1] 다이어트’로 유명한 인플루언서의 계정을 정지했는데, 해당 계정의 팔로워 수는 67만 명에 달했다. 67만 명의 사람들이 뼈가 보일 정도로 마른 몸매를 추구하고 극단적 절식을 하는 사람의 영상에 노출되었다는 것이다. 틱톡은 당 인플루언서가 섭식 장애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컨텐츠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계정을 정지하였다. 그러나 유명한 인플루언서만 일종의 다이어트 문화를 공유하고 전파하는가? 그렇지 않다. 한국의 ‘프로아나’에 주목해 보자. ‘프로아나(pro-ana)’는 영어로 ‘찬성(pro)’와 ‘거식증(Anorexia)’를 결합한 용어로, 저체중 신체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거나 극단적인 마른 몸을 추구하며 거식, 먹토 등의 극단적 다이어트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프로아나는 SNS에서 하나의 커뮤니티를 이룰 정도로 작지 않은 문화로 자리 잡았다. 식욕 낮추기, 물 단식, 초절식 등 체중감량을 위한 정보를 공유하며 소통한다. H163 CW44 UGW33. 언뜻 보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는 영어와 숫자의 조합은 프로아나 사이에서 사용되는 단어이다. H는 키(height), CW(current weight)는 현재 체중, UGW(ultimate goal weight)는 최종 목표로 하는 체중을 의미한다. 이는 특히 트위터에서 자주 사용되는 은어로, 자신의 키와 몸무게를 공개하며 함께 체중감량을 할 친구를 구할 때 일종의 자기소개와 같은 표현으로 사용된다.


프로아나는 외모지상주의, 즉 외모에 대한 사회적 강박이 만들어낸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다. 적지 않은 청소년들이 프로아나 계정을 만들고 정보를 공유하고 끼니를 굶어가며 살을 뺀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 본인을 위해서? 그렇지 않다. 이들은 결국 타인이, 사회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의식하면서 몸을 변형한다. 프로아나들은 소위 말해 뼈가 보일 때까지, 비정상적으로 적은 체중이 될 때까지 살을 뺀다. 목표 체중에 도달하였어도 그들의 눈에 비춰진 자신의 몸은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다. 쉬지 않고 체중을 감량할 것이다. 과도한 체중감량과 단식으로 인해 몸의 면역체계가 무너지고 일상생활이 어려울 때까지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몸을 통제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몸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고정적인 미의 기준과 이상적인 바디 이미지에 종속되고 고통 받는다. 이들은 ‘자기자신’이 제거된 몸을 타인의 시선과 평가로 재구성한다.


SNS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신체 관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국의 아이돌 산업은 극단적으로 마른 몸을 정상화하고 이상화하는 데에 힘껏 이바지했다. 불과 7-8년 전 우리가 큰 유감 없이 보았던 예능을 생각해보자. 밥을 먹을 때 카메라 뒤의 매니저를 의식하여 눈치를 보고 먹는둥 마는둥하다 숟가락을 내려 놓는 장면, 극단적 절식으로 인해 쓰려졌었다는 일화를 회상하듯 웃으며 말하는 장면, 서로 살이 쪘다는 둥 빠졌다는 둥 평가를 이어나가는 장면 등, 수많은 기억들이 떠오를 것이다. TV 속 연예인들만 서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TV에 나오는 아이돌보다 훨씬 더 방대하고 거대한 익명의 청중들은 그들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평가한다. 아이돌은 정상체중에 훨씬 못미치는 체중에도 불구하고 조금 부어서, 살이 쪘다는 이유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온갖 언급을 당한다. ‘관리 안하고 뭐했냐’, ‘살 찌니까 이목구비가 묻힌다’.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사진으로, 실제보다 왜곡이 존재하는 동영상으로 아이돌의 신체를 분석하고 평가한다. 그러나 공백기 동안 체중감량을 성공하여 마른 몸으로 나타났을 때에는 ‘역시 살을 빼니까 훨씬 예쁘다’, ‘근데 살 빼니까 너무 말라서 보기 안좋다. 조금만 살을 찌우면 좋을 듯’ 하는 평가들이 이어진다. 그들이 마르든 살이 찌든 사람들은 아이돌의 ‘몸’ 그 자체를 조각내어 평가하는 것에 급급하다. 아이돌의 몸을 평가하고 난 후에는 자연스레 자신의 몸으로 시선이 향한다. 마르고 보기에 좋은 아이돌의 몸과 다른 자신의 몸을 거부하고 혐오감을 느낀다. 이는 곧 특정한 몸에 대한 선망으로 이어진다. 소위 말하는 키빼몸[2] 120 같은 신체를 자연스레 원하게 되는 것이다.


날씬한 몸이 되어야 한다고 평가하는 것만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모순적이게도 건강을 이유로 아이돌의 몸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여자아이돌의 복근은 건강하게 운동을 해서 만들어진 몸이기에 좋아보인다고 언급된다. 운동을 해서 만든 몸이면 괜찮고 좋은 마름인 것일까? 그렇다면 운동하지 않고 단식해서 만든 몸은 좋지 않은 것일까? 어떤 마른 몸은 괜찮고 어떤 몸은 괜찮지 않은 것, 이 또한 이상적인 몸을 위한 강박에서부터 출발하는 인식이다. 운동으로 생긴 아이돌의 복근과 마른 몸은 추구해도 괜찮은, 가치 있는 방향성이고, 프로아나들의 초절식과 먹토로 만들어진 마른 몸은 비판해도 좋은, 추구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평가하는 지금의 상황을 생각해보자. 이전에는 마르고 아름다운 몸이라는 결과만 만들어내는 것이 이상이었더라면, 현재는 어떻게 그 몸을 만들었는지까지 평가되고 고려된다.



그 안에 남겨진 우리

이렇게 아이돌 산업과 함께 오랜시간 이어진 몸에 대한 강박의 주입은 여러 피해자를 낳았다. 몸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사회 속에서 하나의 투자재원이자 재화로 여겨진다. 아름다운 몸과 얼굴이라는 재화는 노력하고 투자해서 획득해야만 하는 것이 되었다. 사회는 외모지상주의를 발전시켰으며, 여성의 몸을 평가하고 가해하였다. 그리고 이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사회 구조의 피해자가 된다. 비단 아이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랜시간 외모지상주의의 흐름에 따라 축적되어 온 가치를 고스란히 습득한 모두가 피해자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그중에서도 큰 피해를 입고 있는 대상은 이미지 소비 중심의 미디어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향유자이다. 이들은 날씬한 몸과 얼굴을 갖기 위한 집착적인 강박을 가지게 되었다.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연예인들의 몸이 ‘정상적’인 몸이라고 인식하고 그 몸을 갖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이 맥락에서의 ‘정상성’이란, 자신의 몸은 결함이 있고 혐오스럽고 고쳐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는 반면, 미디어에 노출되는 몸은 마땅히 가져야 할, 결함이 없는 몸으로 인식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자신의 몸은 사회에서 비판받고 용인되지 않기에 정상적이지 않기에 마른 몸과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몸으로 변하려 하는 식이다. 아름다움의 많은 요소 또한 사회와 미디어가 주입한 허상적인 개념이다. 즉, 어디까지나 이상에 불과한 미디어의 몸과 얼굴을 보고 그것을 정상으로 판단한다. 많은 이들은 비정상적인 자신의 몸을 고치고 변화시켜 정상 상태가 되기 위한 굴레에 빠진다. 즉, 시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타인의 몸을 평가하는 동시에, 평가한 그 몸을 자신이 추구하는 몸으로 삼게 된다. 있는 그대로의 본인 몸을 거부하고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환상에 빠진다.


이상적인 몸의 개념을 제시하는 미디어의 인플루언서나 연예인은 사회의 편견을 답습해 강화하는 동시에 그러한 편견의 피해자이다. 그들 또한 지속적인 미디어와 사회의 주입으로 인해 이상적인 몸 개념의 피해자가 되었고, 외모 강박과 개념을 물림하고 재생산하는 주요한 주체로 성장하였다. 그들은 아름다운 몸과 외모를 꾸준히 유지해야 하는 존재로 여겨지고 평가된다. 연예인이니까, 인플루언서이니까 당연히 외모와 몸을 관리해야 한다는 논리가 작용한다. 관리하지 못한 몸은 일에 충실하지 못한 탓, 게으른 탓으로 돌려진다. 몸과 외모를 가꾸고 보여주는 것이 그들 직업의 필수적 요소로 자리잡았다. 그들이 만든 몸, 외모의 이미지는 미디어를 통해 전파되고 우리에게 닿게 된다.


미디어는 여성의 외형을 굉장히 좁은 범위로 한정지었다. 특정 조건을 갖추었다면 아름다운 것이고 그 이외에는 아름답지 않다는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미의 기준을 왜곡했다. 미디어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의 이미지가 가진 문제점은 그들이 가진 외형이 매우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주변에는 다양한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 여러 형태의 얼굴과 체형, 다양한 피부색과 나이 스타일을 가진 여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미디어가 보여주는 이미지의 범위는 제한적이다. 어린 나이, 하얀 피부, 큰 키, 긴 팔다리와 마른 몸, 적당한 얼굴 길이와 큰 눈. 이러한 특색이 전부이며 이상화된다. 이는 현실 여성에 대한 감각과 인식을 왜곡하여, 다양하고 개성있는 특질을 가진 여성들의 존재를 지운다. 현실에서 미디어가 보여주는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실제로 존재할 수 없거나, 성형수술이나 인위적인 방식을 배제하고는 존재하기 어려운 대상의 이미지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점은, 미디어가 여성을 상품화, 대상화함으로써 한 명의 사람이기보다는 보기 좋은 상품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여성들의 성형과 소비를 조장하고, 외모강박을 불러일으킨다.


지금까지 우리가 외모 강박을 가지게 만들고 팻토크를 하게 만드는 요인을 알아보았다. 위와 같은 사회적 맥락은 우리를 외모중심적으로 생각하게 만들고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게끔 한다. 글의 초입에서 언급한 대화의 예시들을 다시 떠올려보자. 자연스럽게 듣는 팻토크는 우리가 있는 그대로 존재하기를 어렵게 한다.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몸과 얼굴의 상태를 인정할 수 없게 혹은 받아들이기 싫게 만든다. 얼굴에 대한 팻토크를 시작하게 되면 그때부터 자신의 얼굴을 꼼꼼하게 확인하기 시작한다. 눈은 어떻게 생겼고 코는 어떤지, 얼굴의 구석구석을 검열하게 된다. 팻토크의 흐름이 어딜 향하느냐에 따라 검열대상은 달라질 것이다. 얼굴일수도, 몸매일수도 있다. 팻토크가 시작되면 그 대화에서부터 자기검열은 시작된다. 여기서 조성된 검열하는 분위기가 우리의 몸과 얼굴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거부감을 만든다.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의 저자 러네이엥겔른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당신은 자신의 외모에 대해 생각한다. 이는 이상적인 몸매에 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일단 이상적인 몸매를 보게 되면, 자신의 몸과 그 몸을 비교하게 된다 그리고 이상적인 미란 거의 모든 여성이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이기 때문에 그런 비교 끝에선 좌절을 맞게 된다. 당신의 외모가 필수적인 것을 갖추지 못했다는 느낌에서 오는 상실감은 신체 혐오를 자아낸다. 외모 강박은 신체 혐오에 의해 강화된다. 외적인 모습을 중요시할수록 혐오는 커진다. 이는 끔찍한 심리학적 피드백 루프를 형성한다. 혐오는 생각을 다시 외모로 돌려놓고 계속 더 큰 신체 혐오를 낳는다.[3]



우리 다른 이야기하자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길거리에서, 영화관에서, 버스나 지하철에서 성형수술에 대한 안내 광고가 노래처럼 들려오는 이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예쁜 몸과 얼굴에 대한 역사는 너무나도 길다. 긴 시간 속 사회는 외모지상주의를 스펀지처럼 흡수하여 하나가 되었고, 그 사회 안에서 외모지상주의와 몸에 대한 강박의 영향 없이 살아가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완벽하고 이상적인 외모 추구에 대한 경향은 점점 심각해지는, 엄연한 사회적인 문제이다. 그렇지만 외모와 몸이 우리를 전부 대변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외모를 넘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고 바라는 사람인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외모가 전부가 되어 살아갈 수는 없다.


짧은 시간 안에 무언가 거창하게 변화시키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사회적 차원 이전에 우리 개인의 삶에서부터 작은 변화를 하나하나 만들어간다면 우리를 옥죄는 외모강박이 점점 느슨해지는 것이 보일 것이다. 성큼 다가오는 팻토크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벗어날 수 있을지 지금부터 함께 고민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부당한 몸』의 저자 수전 웬델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몸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이상형을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몸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온다. 우리 몸이 변하고, 나이 들고, 아프거나 장애를 갖게 되고, 그리고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4]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몸은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몸은 우리와 함께 나이를 먹고 사용되고 늙어갈 것이다. 숙명적인 평생의 동반자라 할 수 있는 몸을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기를, 평가하지 않기를 노력해 본다면 어떨까? 혹은 나의 몸, 타인의 몸에 대한 평가를 잠깐 쉬어가는 것은 어떨까? 물론 오랜 시간 동안 외형의 평가와 관심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들에겐 (그리고 적어도 나에게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나의 몸을 부끄러워해 왔고, 지금까지도 그래왔다. 내 몸이 이상적이고 예쁜 몸이지 않아서 싫었고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왜 나는 TV에 등장하는 아이돌처럼 마른 몸을 가지지 않았을까 자책했고, 몸을 거부했다. 타인으로부터 ‘살 좀 빼야겠다’, ‘몇 키로 정도만 빼면 딱 보기 좋겠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수치스러웠고 나의 몸과 얼굴은 점점 내 것이 아닌 기분이 들었다. 나를 갉아 먹었던 외모강박과 팻토크는 자신을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팻토크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단지 외모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시간과 돈, 그리고 우리 자신을 앗아가고, 계속해서 거울 앞에 서 있게 만든다. 이런 기분을 비단 나만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 혹은 더 심한 경험을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외모평가를 들어왔고 이상적인 외모적 가치에 대해 생각해 왔기에.


하지만 내가, 우리가, 여성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 사회를 변화시키고 나 자신을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서는, 변화를 위한 작은 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짧은 시간 안에 무언가 거창하게 변화시키기에는 어려움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회적 차원에서 보기 전에 우리 개인의 삶에서부터 작은 변화를 하나하나 만들어간다면, 우리를 옥죄는 외모강박이 점점 느슨해지는 것이 보일 것이다. 성큼 다가오는 팻토크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벗어날 수 있을지 지금부터 함께 고민해 보아야 한다. 정말 간단한 변화부터라도 좋다. 예를 들면, 대화 중 영어 말하기가 금지되는 훈민정음 게임처럼 <오늘은 팻토크 하지말기>를 그날의 규칙으로 만드는 것이다. 정말 간단하지 않은가? 간단하게 보일지라도 말이 가지고 있는 힘은 우리의 생각보다 크다. 우리가 발화하고 듣는 말은 생각과 행동까지 금세 이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팻토크는 전염성이 강하다.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팻토크는 겉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그렇기에 친구를 만났을 때 ‘너 살빠졌다’, ‘나 살쪘어’, ‘다이어트해야 돼’’라고 말하지 않기를 목표로 하는 걸 제안한다. 여기서부터 작은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외모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집중해보자. 앞에 마주한 사람의 외형이 다가 아님을 명심해 보자. 팻토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물질적인 이득을 얻지도, 당장 큰 변화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얼굴, 몸에 대한 언급을 한번 덜 함으로써 우리를 괴롭게 만들던 외모강박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음을 기대할 수 있다. 상대방과 자신이 외모와 몸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존재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해보자. 우리의 몸과 마음을 잘 마주하기 위해서 지금부터 우리를 괴롭히는 팻토크의 존재를 견제하면서 살아가 보자. 그렇기에 글을 마무리하며 외쳐본다. 우리 오늘은 팻토크 하지 말자!




[1] 온몸의 뼈가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마른 몸을 의미한다

[2] 키 빼기 몸무게의 줄임말이다. 예를 들어 키빼몸 120이란 키에서 몸무게를 뺀 숫자가 120이라는 의미이다. 키뺴몸의 크기를 통해 마른 척도를 설명할 수 있다.

[3] 러네이엥겔른,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웅진지식하우스, 2017, 104

[4] 수전 웬델, 『거부당한 몸 』, 그린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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