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 눙, 포슬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
한 영화의 대사입니다. 지난 반년을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올해의 봄과 여름은 예년보다도 희미하게 지나왔던 듯 합니다.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수업을 듣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친구들의 안부를 묻는 나날들 – 이런 하루하루가 계속될수록, 판데믹 이전의 살과 살이 맞닿는 부대낌들은 점차로 낯선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대신, 우리는 화면 상의 이미지로서 타인을 접합니다. 촉감, 냄새, 그리고 관계가 옅어진 이 이미지들은 너무나도 선명한 해상도로 나와 남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련의 질문들을 던져볼 수 있겠습니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보는가 – 그리고 그 이전에, 왜 그렇게 보아야만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육체의, 혹은 은유로서의 눈을 시선이 귀착하는 곳으로 상정할 때, 우리는 우리의 감각이 경유하는 장소들의 궤적을 그려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장소들은 사회라는 좌표평면 위 한 점일수도, 거대한 단면의 일부일 수도 있습니다. 문우 65호, 『시선의 좌표』는 이 지점들을 규명하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장애’라는 메인 기획에서부터 삶과 사회의 다양한 층위들을 분석하는 ‘문우의 눈’ 기사들까지, 이번 호의 글들은 공통적으로 우리가 타인, 그리고 자신과 마주하는 방식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김도현은 “‘장애학의 시좌’에서 세상을 본다는 것”을 “세계의 변방으로 밀려난 이들의 자리에서 이 사회의 풍경을 본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1] 이번 호의 메인기획, ‘장애’는 이 부족하게나마 이 ‘변방의 자리’를 언어화하고, 각자의 공간으로 적용하기 위한 글들로 가득합니다. 눙과 포슬의 「경사로와 줌: 2021년 학내 장애정치 방문하기」는 어쩌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장소인 대학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배제의 풍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학교의 일상이 가장 가까운 존재들을 재확인 하는 자리라면, 미디어는 반대로 먼 곳의 존재들을 우리의 곁으로 불러오는 매체일 것입니다. 이일의 「장애의 재현,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나아가야 할까」는 무의식중에 지나쳤을 다양한 사례를 불러내어, 대중문화가 장애를 재현하는 방식에 대해 무게감 있는 의문을 던집니다. 앞의 두 글 모두 장애를 지닌 신체가 시야에서 벗어나는, 혹은 왜곡되게 보여지는 방식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한편, 지오의 「이 긴 터널의 끝에는 광활한 우주」는 그 이후를 고민합니다. 독자(獨自)로서의 삶을 추앙하는 사회 속에서 어떻게 상호의존과 돌봄의 윤리를 이야기할 수 있을지에 대해, 그의 글은 많은 고민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메인 기획을 지나, 이제 ‘문우의 눈’으로 넘어가 봅니다. 이번 호 ‘문우의 눈’은 여느 때 없이 풍부한 이야깃거리들을 담고 있습니다. 학력을 향한 우리 안의 시선을 고발한 염, 페미니스트 여성을 향한 적대적 시선을 짚은 야부의 글은 타인을 바라볼 때 개입하는 구조의 영향력을 끄집어 해체하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가 향유하는 취향의 면면을 살펴본 계월, 온라인상의 정체성 형성 양태를 비판적으로 뜯어본 단의 글은 우리의 가장 깊숙하고 내밀한 곳까지 침투하는 타인의 시선을 보여줍니다. 그 시선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이야기함에 있어, 이지의 글은 중국 민족주의의 예시를 통해 ‘타자’에 대한 배제의 근원을 추적합니다.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당신을 봅니다. 응시가 대칭이라면, 어떤 존재를 온전히 정의내릴 수 있는 단 하나의 시선은 없는 것이 아닐지요. 그러나 우리의 세상은 ‘정상적’인 이미지만이 빽빽하고 답답하게 범람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나와 당신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평등한 우리의 부대낌이란, 어떤 모습일까요? 이번 호의 기사들은 정말 많은 범주의 타인들과 마주하려는 시도들이고, 또 그만큼 미숙함도 많을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수많은 시선들이 어지럽게 겹치고 교차하는 그 사이에서, 독자분들이 저마다의 안온한 공간을 그려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각자의 좁은 책상에서, 편집장 눙, 포슬
[1]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오월의봄, 2019,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