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첫 아이 그레이스가 40개월, 둘째 조슈아가 15개월일 때 귀국을 했다. 아이들이 미국에서 태어나 영어를 잘하겠다는 얘기를 많이 듣지만, 세 돌, 한 돌 겨우 지난 아이들이 한국말도 제대로 못 할 때 한국에 들어온 거라 영어에 대해서는 이 아이들도 그냥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
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간다고 했을 때 많은 분들이 '아깝네. 아이들이 유치원이나 초등 1년이라도 좀 다니고 영어를 익혀가면 좋을 텐데.' 하셨다. 무리를 해서라도 그렇게 좀 더 버티다 들어가는 집들도 있었지만 나는 내심 믿는 구석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영어 공부를 시킬 수 있는 방법을 나름 찾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막 없이 영어 만화 보기, 정확히는 듣기였다.
우리는 한국인이 별로 없는 미국교회에 다녔는데 하루는 한 미국 할아버지가 그레이스를 안고 이것저것 물어보며 얘기를 나누고 계셨다. 아이는 할아버지의 얘기를 골똘히 듣다가, "Yes!" "Pink!" "Mommy"하며 제법 대답을 하고 있었다. 뭐지?
그레이스는 한국말도 이제서야 겨우 하기 시작한 30개월 정도의 나이였고, 도서관이나 짐보리 프로그램 같은 짧은 체험 외에는 영어 노출 없이 집에서 엄마랑만 지낸 아이였다. 아파트에 한국 가정이 많아 오후에 놀이터에 한국 언니오빠들이 나오면 그제서야 나가 노는 아이였기 때문에 어디서 영어를 배웠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영어교육보다는 한글 교육에 더 신경을 쓸 때라 '방귀대장 뿡뿡이'나 '한글이 야호' 같은 EBS 영상물들을 열심히 보여주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 미국 교육방송인 PBS 채널을 좀 보는 정도가 전부였는데... 그럼 혹시?
영어 영상물을 통해 영어를 익히는 방법은 널리 알려진 방법이다. 좋아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한 편을 달달 외울 정도로 수십 번 보고 영어에 통달했다는 사례들도 많고, 예전부터 일본 애니에 빠져 일본어를 잘하게 된 덕후들의 예는 발에 채일 정도로 많다.
문제는 아이들에게 그 방법을 적용하기에는 아이들의 반발이 예상보다 거셀 수 있고, 교육적 목적이라고는 하나 아이들에게 하루에 삼십분, 한 시간씩 영상물을 보여주는 것이 부모에게 맘 편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외국어를 가르치기로 마음먹었다면 말하기, 쓰기를 위한 input인 듣기, 읽기는 선택사항이 아니다. 그보다는 언제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까가 더 중요했다.
영어로 된 만화를 자막 없이 보여주는 것을 하기로 했다면 한글을 깨치기 전에 시작해야 한다. 일단 한글을 읽을 줄 아는 아이는 자막이라는 옵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것을 포기한 채 답답하게 만화를 보는 것을 분명 힘들어할 것이다. 짜증을 내며 자리를 뜨거나 자막을 틀어달라고 조른다. 첫째 그레이스가 그랬다. 본인이 그 학습법에 동의했기 때문에 막내 올리비아처럼 짜증을 내며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다 같이 비디오를 보기 시작한 지 삼십 분도 되기 전에 그레이스만 스르르 그 방에서 사라지곤 했다.
그러나 듣기 초기에는 자막 없이 몇 달이 걸리든 그냥 들어야 한다. 자막을 트는 순간 귀를 함께 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에는 들리는 표현들을 다 이해하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한 귀로 들어온 영어가 뇌를 통과하지 않고 자꾸만 반대쪽 귀로 흘러 나가는 게 문제인 시기이기 때문이다. 들리는 영어를 쉐도잉(shadowing 한 템포 느리게 따라 말하기)하며 모두 주워 담는 것 자체가 시간을 필요로 하는 훈련이다.
한글을 익히기 전에 자막 없이 만화 보기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한글에는 없지만 영어에만 있는 발음, 특히 영어 모음들이 한글을 익히기 전의 아이들에게는 들린다. 이건 성인에게는 안 들린다는 말과도 같다.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영어 소리를 듣고 머릿속에 입력할 때 우리가 가진 문자 중 어느 것엔가 그 소리를 대응시켜 저장하려고 하는 습성이 있는 것 같다. 중학교 때 영어책에 한글로 '하우 와 유. 아임 빠인 땡큐'라고 한글로 적었듯이 말이다. 그래서 우리 한글에 없는 소리는 매칭시킬 문자가 없는 관계로 처리하기가 매우 힘들어진다. 자연히 발음의 차이를 구별하여 들을 수 없게 되고, 차이를 모르니 제대로 발음할 수도 없다. 그래서 성인의 영어 발음, 특히 모음 교정은 무척 어렵다고 한다.
그레이스가 두 돌쯤 되었을 땐가? 영어로 숫자 카운팅을 익히고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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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섹스? 아니 얘가 민망하게... 발음을 고쳐줘야 하나 생각하다가 몇 달 전 한글학교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내가 한글을 가르치던 초1 아이가 점심시간에 식판을 들고 옆에 서더니 '메아쎕빠유?'라고 묻는 것이었다. 뭐라고? 뭐라고? 하며 네다섯 번이나 되물으며 '얘가 나한테 욕을 하나' 싶고 통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답답해하고 있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중학생 아이가 '선생님 옆에 앉아도 되냐는데요?'하고 얘기해주어 그제서야 'May I sit by you?'라고 묻고 있음을 알았다.
six나 sit에서 i는 우리 모음 '이' 발음이 아니다. feet에서의 ee가 차라리 '이' 발음에 가깝고, i는 '이'와 '에' 사이 어디쯤의 소리이다. 원어민의 그 발음을 아무 편견 없이 들은 그레이스는 들리는 대로 그 소리를 냈을 뿐이고, 내 귀에는 '이'보다 '에'로 들렸던 것이다. 한글을 아는 나는 '이'든 '에'든 우리 문자에 있는 모음 중 하나에 그 소리를 매칭시키려는 습성이 있었으나 그레이스는 한글을 깨우치기 전이었으므로 들리는 소리 그대로를 재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건 조금 다른 케이스인데, 초성 중성 종성으로 음절을 구성하는 한글의 특성 때문에 영어 발음이 어려운 경우도 있다. 이건 무슨 소리?
미국에 처음 가 어학당에 다닐 때 선생님과 한참을 씨름했던 단어에 church(철치, 교회)가 있었다. 보다시피 church에는 모음이 하나밖에 없다. 한 음절짜리 단어이다. 그런데 우리 귀에는 철치로 들리고 그래서 철치라고 2음절로 발음하기 쉽다. 선생님이 계속 철치가 아니라 철ㅊ라고고쳐주셨고, 나도 그렇게 한다고 하는데 자꾸 선생님이 아니라고 하셔서 한참을 애를 먹었다. 비롯 장모음이기는 했으나 철ㅊ는 한 음절로 소리를 내야하는 단어였다.
한글을 아는 나는 영어를 들으면서도 실상은 한글로 읽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런데 한글을 읽지 못하는 아이들은 그런 경향성이 없기 때문에 들리는 대로 듣고 똑같이 발음할 수 있다. 그레이스의 섹스처럼 말이다.
처음 자막 없이 만화 보기를 할 때는 아이가 얼마나 이해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용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가 대사만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들은 어차피 이해력이 달려서 만화를 보더라도 한번에 다 이해하지 못한다. 겨울왕국을 열 번 스무 번 반복해서 보면서 애들이 저번에는 이해하지 못했다가 이번에 이해하게 된 장면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듣고 알았다. 어차피 애들은 대강 보고 어렴풋이 이해할 뿐이구나.
내용을 이해하고 즐기는데 말을 알아듣는게 별로 중요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경험이 또 있다. 조슈아가 다섯 살 때 레고 닌자고 만화를 보고 싶어 해서 '영어로 볼 거면 보고 아니면 안 보여주겠다'라고 했더니 미끼를 물었다. 유튜브로 레고 닌자고를 보여주기 시작했는데 자동재생이 되며 다음 에피소드,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가고 있었다. 아이는 계속 낄낄대며 만화를 보고 있고 나는 집안일을 하고 있었는데 문득 들리는 소리가 영어가 아닌 것 같아 달려가 봤다. 어허 이런, 자동재생이 되며 어느덧 이 닌자고님들께서 영어가 아닌 스페인어를 하고 계신 게 아닌가. 그런데도 아이는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닌자고가 영어를 하든 스페인어를 하든 이 아이에게는 아무 문제도(아니면 아무 도움도) 아니었는지 모른다. 그저 닌자고들은 웃긴 놈들이었을 뿐.
그렇게 영어 만화를 즐겁게 보던 조슈아가 우리 집에서 영어를 가장 자연스럽게 잘한다. 아마도...
사실은 워낙 말이 없는 아이라 영어뿐 아니라 한국말도 별로 안 하기 때문에 얼마나 유창하게 말을 하는지 직접 확인한 바는 없다. 그러나 중학교 때 잠시 어학원에 보냈을 때 선생님께서 '조슈아는 영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면 another 인격이 나온다. 표현력이 너무 좋다'고 하셨어서 그냥 그렇게 믿고 있다. 마블 시리즈를 자막 없이 편하게 보고, 헤리포터를 비롯한 영어책을 편안히 읽는 사람은 조슈아가 유일하므로 그냥 우리 집에서는 조슈아를 영어 가장 잘하는 일 인으로 인정해 주고 있다.
듣기만 3, 4년 이상 하다가 이젠 읽기도 좀 가르쳐야겠다 싶어 조슈아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누나를 따라 동네 영어학원에 보내보았다. 그런데 그동안 만화를 보며 주워들은 단어가 적지 않았고, 책 읽기를 시키자 그 발음이 예사롭지 않아 첫날부터 학원에서 영어 천재가 왔다고 난리가 나버렸다. 눈을 끔뻑거리며 '내가 뭐 대단한 거야?' 하는 표정으로 애써 웃음을 참으며 내심 우쭐해하던 우리 조슈아의 귀여운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렇게 어깨에 뽕을 넣은 채 영어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으니 얼마나 영어 공부를 좋아했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남의 집 성공 사례를 들으면, 그래 나도 그렇게 시켜야겠다 의지를 다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게 절대 쉬운 게 아니다. 아이 성향, 시기적절한 매력적인 영상 자료, 영상 수준에 맞는 아이 연령 등 여러 요건들이 맞아떨어져야 가능하다. 아무리 이것저것 내밀어도 아이가 좋아하는 만화가 없을 수도 있고, 아이 연령에 비해 영어 수준은 높지 않아 실력에 맞추면 너무 유치하다고 안 보고, 연령에 맞추면 너무 빠른 시트콤을 봐야해 애매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아이 구미에 맞는 만화를 부지런히 찾아 대령해야 하니 엄마는 또 얼마나 공부해야 하는지 모른다.
우리 집에서도 셋 중 한 명만 성공한 케이스이므로 표본 수를 늘려도 30% 보다는 낮은 성공률이 예상된다. 하지만 만약 손주들의 영어교육을 내게 맡긴다면 아마도 조슈아의 표본을 목표로 삼기는 할 것 같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성공여부는 엄마에게 달려있지 않다. 우리 상전님들의 마음이다. 운이 좋아 내게 손주가 많이 생긴다면 이런 성공케이스를 한 건 정도 더 보고 죽을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