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꾸쟁이는 아니더라도 기록쟁이 정도는 된다. 내 기록의 역사는 고등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책장에는 그때의 다이어리가 남아있다. 그렇다고 그 이전엔 기록을 안 했냐, 하면 그건 아니다. 그저 남아있는 다이어리가 없을 뿐. 기록을 했으나 남아있지 않다면 선사시대로 보는 게 맞는지요? 쓰다 보니 문득 궁금해진다.
주변의 혹자는 그렇게 열심히 다이어리를 적으면 뭐가 좋냐고 물어온다. 의외로 좋은 점은 한둘이 아니다. 우선, 한 평생 예쁜 글씨체를 동경해온 나에게는 글씨 연습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순간이다. 실제로 이 덕분인지 겸손을 잠시 접어두고 얘기하자면 나는 글씨를 꽤 잘 쓴다. 또 항상 생각이 많은 편인 나는, 유독 잡념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날에는 이를 글로 써내려가 단순화하는 작업이 필수불가결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래의 다솜을 위해서 다이어리를 적는다. 시간이 나면 종종 과거의 일기를 펼쳐보곤 한다. 가끔은 시간을 내서 다이어리를 열어보기도 하는데 이게 은근 꿀잼이다. 갖고 있는 다이어리 중 가장 오래된 다이어리인 고등학생 때의 흔적을 펼칠 때마다 눈에 잘 띄는 문구가 있다.
'별을 보고 꿈을 꿀 수 있는 하루를 보내고 싶다'
(이과였던 고딩 다솜은 시인이었나. 저런 말을 일기장 한 귀퉁이에 적어두고 공대를 가다니. 내가 학과 선택에 실패했다고 느끼는 건 필연적인 것이었다. )
이상하게 자꾸만 눈이 가는 글씨였고,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렇게 별을 보러 가는 것은 내 숙원 사업이 되었다. 어렸을 땐, 별을 보러 간다는 게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목돈이 필요하다거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거나, 그렇다고 강인한 체력을 요하는 게 아니었기에. 지금도 그렇게 생각함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말처럼, 맘처럼 선뜻 갈 수 없었다. 갈 수 없던 이유를 기십 개는 댈 수 있다. 하필 장마철이었다던가, 하필 생리 주간이었고, 하필 회사에선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었고, 하필 친구 생일 파티가 있었고... 이런 식으로 차일피일 미뤘더니 10년이 넘게 별을 보러 못 갔다.
그러다 올 초부터 사귀게 된 KB에게 우연히 별을 보러 가고 싶다고 했었다.
"오랜 꿈이 하나 있는데, 별 보러 가고 싶어."
"가고 싶은 곳이 따로 있어?"
"아니, 어디든 상관없어. 별만 잘 보이면"
"지금은 추우니까 좀만 따뜻해지면 보러 가자."
나야, 입버릇처럼 말하던 '별 보러 가고 싶다'였기에 저렇게 말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KB는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몇 주전 그는 별을 보러 가려면 지금 가야 한다고 말했다. 난 잊고 있었는데, 그가 상기시켜주었다.
내 꿈을 얘기했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으나, 사귀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커플에게 2024년도의 봄은 너무 짧았다. 서울과 수도권 구석구석을 쏘다니다 보니 여름이 와있었다. 여름은 별을 보기에 좋은 계절이 아니다. 게다가 이번 여름은 유난히 길고도 더웠다. 그렇게 가을이 오나 싶었는데 가을은 왜 이리도 짧은지. 별을 보러 다녀온 경험자들이 말하길 9월까지가 별을 관측하기에 좋은 시기라고 한다. 갑작스러운 그의 리마인드가 고마웠다. 별을 보고 싶다고 말한 건 난데, 난 또 굴러가는 대로 살아가고 있구나. 꿈을 이룰 노력도 안 하고 있구나. 여의도에서 하는 불꽃축제가 궁금하기도 했으나, 과감히 별을 선택했다. 이룩한 게 없는 2024년인데,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오랜 꿈이라도 실현시켜야 했다.
그렇게 KB와 제천으로 별을 보러 갔다.
혹여나 구름에 가려 별이 보이지 않을까 차에서 내리는 순간까지 조마조마했다. 다행히도, 기우였다. 그렇게 많은 별이 박혀 있는 하늘은 처음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별만 두 시간을 봤다. 성인 ADHD가 아닐까 걱정했던 날들이 있었는데, 그렇지 않을 공산이 더 크다는 생각이 들어 안도했다. 그곳에서 보이는 별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죄다 눈에 담으려고 쉴 새 없이 고개를 움직이고 눈알을 굴렸다. 울컥해서 별이 흐릿하게 보인 순간도 더러 있었다.
연차였지만 다섯 시간을 운전해서 온 KB와 운전을 하진 않았어도 퇴근하고 별을 보러 온 나는 자정이 넘어서까지 별을 보고 녹초가 되어 숙소로 갔다.
다음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엔 KB가 유튜브로 서울 세계불꽃축제 라이브 영상을 틀어줬다. 알뜰통신사라는 이유로 항상 데이터 기근에 허덕이는 나를 대신하여.
"내가 불꽃놀이 보러 갈지 별 보러 갈지 고민했던 것 때문에 라이브 영상 틀어주는 거야?"
"당연하지. 혼자 있었으면 안 틀어놨지."
그는 새벽 배송으로 급하게 캠핑의자도 주문하여 챙겨왔다. 몇 달 전 차를 산 이래로 캠핑의자를 갖고 싶어 했던 걸 알고 있다. 그동안 당근 마켓에서 중고로 알아보기도 하고 캠핑 광인 친구에게서 받아오겠다고 하기도 했으나 결국은 새 제품을 주문했다. 그런 대안들을 물리치고 새 제품을 산 이유가 있냐고 물었다. KB는 '다솜이 새 의자에 앉혀야지'라고 대답했다. 임기응변에 능하고 화려한 언변을 자랑하는 그에게 고려 시대에 태어났으면 서희가 울고 갔을 거라 장난스레 말하곤했다. 그래서 저 말이 100퍼센트 믿음직한 건 아니다. 근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뭐. 가끔씩 그의 다정함이 눈물 나게 고마울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