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랑드르의 한별 Aug 25. 2024

베프루아 no.0:벨기에와 프랑스 자유 도시의 종탑

Beffroi, symbole de la ville autonome

지금 내 앞에는 같은 시각이 세 번 표시되어 있다. 컴퓨터 모니터 오른쪽 밑, 컴퓨터 옆에서 충전되고 있는 스마트폰 잠금 화면, 그리고 더워서 아무렇게나 풀어놓은 시계까지 총 세 번. 집중력이 바닥나는 저녁엔 시간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시계를 거의 삼 분 간격으로 보게 된다. 이렇게 시계가 대중화되지 않았을 한 세기 전만 해도 '시간을 안다' 것은 모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니었다. 유럽 마을의 시계탑과 종탑은 주민에게 적어도 하루의 리듬을 일정하게 조정하도록 돕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종탑

이곳의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종탑에는 각자 다른 쓰임과 상징이 있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성당과 대성당의 종탑은 그 주변의 주민에게 미사 및 주요 예식과 교구 내의 경조사를 알리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두번째, 영어로는 던전이라고도 부르는 성탑은 성주의 영주권의 상징으로, 성이나 요새에서 가장 높은 탑을 일컫는다. 하지만 성탑은 군사적 요소로서 성당의 탑처럼 언제나 종이 있지는 않으며, 주변 지역 방어를 위한 망루가 발전한 형태이다. 성당 종탑과 성탑에는 필요에 의해 경종을 설치할 수 있다.

벨기에 코르트레이크 Kortrijk 베프루아

그리고 마지막 종류가 프랑스어로는 베프루아 beffroi, 네덜란드어로는 벨포르트 belfort, 영어로는 벨프라이 belfry라고 부르는 시청 종탑이다. 성탑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망루의 역할을 하다 빠르게 종탑의 형태를 띄게 되어 시민에게 적의 침입이나 화재를 최대한 빠르게 알리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11세기부터 그 사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베프루아는 옛 에스파냐령 네덜란드 지역의 일부인 프랑스 북부, 벨기에에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벨기에의 서른 세 채와 프랑스의 스물 세 채가 함께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재되어있다.


https://whc.unesco.org/fr/list/943/


중세에 플랑드르 백국과 그 주변 지역은 활발한 상업 활동과 늘어나는 가내 수공업으로 부를 축적한 자치령이었다. 상업도시 여럿이 급속도로 대도시로 발전하며, 영주에게 지명받아 법을 수행하는 법 집행관 échevin이 쓸 수 있는 시청 hôtel de ville이 지어졌다 (간혹 salle échevinale 혹은 halle échevinale 등으로 불린다). 시청 종탑은 종교권과 영주권을 상대로 그 도시의 자치성을 드러내는 시립 기관이었다.

프랑스 두에Douai 시청 종탑의 방클로크

베프루아의 네덜란드어 belfort와 영어인 belfry에 종 bel이 들어가는 것에서 알수 있듯, 베프루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방클로크 bancloque의 유무이다. 공적 공고나 알림을 뜻하는 ban 과 종을 뜻하는 cloche 의 피카르디 지역 변형어인 cloque을 합성한 방클로크는 도시의 위협을 알리고 시민을 소집하거나, 시청 행정관의 결정 혹은 판결을 공고할 때, 그리고 성벽 문을 열고 닫을 때 울리는 시립 경종이다. 중세에는 종탑에 이 방클로크가 있어야 베프루아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었다. 심지어 프랑스 캉브레 Cambrai의 Saint-Martin 성당 종탑은 탑 자체는 시립이 아니지만 방클로크가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베프루아로 분류된다.

프랑스 두에Douai 시청 종탑의 카리용


이 경종 말고도 대다수의 베프루아는 여러개의 종을 합친 악기를 뜻하는 카리용을 보유하고 있어 시간마다 감미로운 선율을 연주할 수 있다. 이외에도 두드러지는 베프루아의 특징은 멀리서도 잘 보이는 큼지막한 시계이다. 시민의 시간을 조율할 권리를 가지는 것이 당시에 얼마나 중요한 사안이었는지 알 수 있다.

분리된 베프루아의 예시: 중세에 형성된 벨기에 투르네와 코르트레이크

도시의 위상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던 만큼, 베프루아의 형태는 가지각색이다. 간혹 벨기에 브뤼헤나 헨트, 이프르처럼 베프루아가 시청이 아닌 상업 기관인 도매시장 건물의 일부거나, 아예 독립적인 건물로 다른 시설과는 동떨어져 있는 경우도 있다. 프랑스 솜므 지역의 뤼슈 Lucheux라는 도시의 베프루아는 성문의 연장선처럼 설계된 아주 드문 케이스다. 대부분의 종탑 내부는 감옥이나 병사 주둔실, 혹은 시청 회의실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베프루아는 모두 석조 건물로, 건설 초기에는 목조였으나 화재로 소실되어 석조로 재건축된 경우도 있다.

샤를 마이야르 Charles Maillard- 신플랑드르 양식으로 1866년 개관한 방브르시 Wambrechies 시청종탑
에밀 뒤뷔송 Emile Dubuisson - 아르데코와 신플랑드르 양식을 혼합.1932년 개관한 릴 시청 종탑


베프루아 형태의 다양성은 건축 시기의 차이에서도 기인한다. 12세기 후반에 건설된 벨기에 투르네의 베프루아가 가장 오래됐고, 르네상스 시기와 산업 혁명, 그리고 20세기 이후로도 베프루아는 끊임없이 지어졌다. 프랑스의 23 채의 베프루아 중 프랑스 혁명 이전에 지어진 건물은 열 두개 뿐일 정도로, 중세적 시민권의 의미가 희미해진 시대에도 베프루아는 이 지역의 전통적 상징으로 기능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나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를 폭격으로 휩쓴 제1차세계대전 이후, 파괴된 도시의 재건과 재생을 온 나라에 보여주기 위해 시청 종탑을 짓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그 예 중 하나가 19321년 완공된 릴 시청 베프루아다. 104m 높이의 철강 콘크리트 구조물은 현재도 유럽에서 가장 높은 베프루아로 불리며, 개관 당시 외신에서 '프랑스 플랑드르의 마천루'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각 베프루아의 모양과 건축 시기, 높이 등이 궁금하시다면 밑의 리스트를 참고하시길 바란다.


https://www.calameo.com/books/004497706a8610df638cf


먼 옛날 저지대 자치령의 자랑었던 베프루아는 오늘날도 시내 한복판을 지나는 이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화려하거나 둔중하기도 하고, 높거나 낮기도 한 이 변덕스러운 구조물은 간혹 화려한 주변 경관에 묻혀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에 익숙한 사람으로서 방금 도착한 여행자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것이 있다. 가능하다면 관광청에 들러 도시에 베프루아가 있는지, 있다면 올라갈 수 있는지 묻는 것으로 시작하라는 것이다. 고저가 거의 없는 이 지역에서 베프루아는 유일하게 여러분에게 도시의 파노라마 전경을 선사할 수 있는 장소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혹여나 올라갈 수 없는 상황이라면 종탑 주변을 돌며 그것의 성질과 역사를 알아보는 것으로 그 도시의 이야기를 훑어볼 수 있다. 유네스코의 55개의 종탑을 다 갈 수는 없지만, 내가 들러본 몇 군데를 앞으로 천천히 소개하고자 한다.


[베프루아 파노라마, 0호]

작가의 이전글 릴 여행 꿀팁 - 릴 위성도시의 문화·예술 공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