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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랑드르의 한별 Sep 04. 2024

장미잼, 향수. 프랑스와의 첫 만남.

Nostalgie du confiture de rose

세 달 전 늦봄의 저녁, 한 친구 집에서 나와 집으로 걸어가던 중이었다. 십오 분 정도 걸었을까? 갑자기 한 예리한 감각이 부드럽게 입 주변을 관통했다. 친구 집의 장미 덩굴이 뒤늦게 나를 쫓아오기라도 한 듯, 입천장에서 코를 타고 올라오는 장미향이 입 안에서 짧게 진동하다 사라졌다. 달큼한 충격이 몇 년을 잠자고 있던 오랜 기억을 깨웠다.


공식적으로 이번 해 8월 12일은 내가 프랑스에 도착한 지 15년이 되는 날이었다. 하지만 사실 나와 프랑스의 인연은 그보다 2년 전, 고등학교 시절에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 국경 너머를 가 볼 것이란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시기에 운이 좋게 해외여행을 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것도 이웃나라도 아닌 지구 반대편의 프랑스로. 삼십 대가 된 지금엔 흐린 잔상처럼만 남았지만, 생전 처음 국제선을 타고 가는 프랑스 여행에 대한 기대는 꽤나 컸을 것이다.


두 주간 진행되는 여행엔 언어 연수도 포함되어 있어서, 아침에는 공인된 기관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오후에 정해진 프로그램을 따르거나 자유시간을 가지는 식이었다. 프랑스 남부에 머물던 첫 주에 향수로 유명한 그라스 Grasse라는 도시의 '향수 박물관 Musée International de la Parfumerie'을 관람했다. 사실 이제 와선 박물관 내부가 어땠는지, 무슨 내용의 가이드를 들었는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들른 박물관 상점에서 무엇을 살까 고민하다 작은 장미잼 병 하나를 구매한 기억은 있다.

니스에서 일 주, 파리에서 일 주를 보내고 한국에 돌아와 열어본 장미잼은 옅은 분홍색 유리구슬처럼 반짝였다. 찻숟가락으로 한가득 떠 입안에 넣자 잼은 저녁의 꽃향처럼 가볍게 혀에 닿았다가 장미수를 만들고 남은 꽃잎 찌꺼기처럼 묵직하게 끝 향을 남겼다. 이렇게나 달큼한데도 마치 먹어선 안 될 듯한 무언가를 맛보는 기분은 처음이었다. 어렸을 때 실험 삼아 먹어본 장미의 이상을 현상화한 맛이었다. 하지만 정작 프랑스에서 장기 거주를 하면서는 스스로 장미잼을 사 본 적이 없었다. 아침으로 빵을 잘 먹지 않아 잼을 발라먹을 일이 없어, 있던 잼도 곰팡이가 슬 때까지 방치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렇게 살다가 불현듯 17년 후에 장미잼을 사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15년 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장미잼을 사겠다는 일념으로 릴 중심가를 싹 돌았다. 그랑 플라스에서 멀지 않은 수재 잼 상점, 고급 식료품 상가, 큰 슈퍼마켓... 잼 한 병 사자고 배달을 시키고 싶지 않아서 한 선택인데 8월 초의 무더위에 한 시간을 돌아다녀도 다른 과일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장미잼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향수 박물관에서 구매한 것은 그 해의 특별 제품이었는지, 인터넷 상점에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그때와 같은 잼을 사는 것은 이제 불가능 하단 것 정도는 알고 이었지만, 적어도 비슷한 것이라도 내 손에 떨어질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어디를 가야 할지도 모를 정도가 되자 결국 그날 잼 발굴은 포기했다.


다음날 가이드를 위해 다시 릴 구도심을 찾았다. 일이 끝나고 바스 가 rue Basse를 걸어내려 가던 중,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은 고급 유기농 로컬 마켓이 눈에 띄었다. 좁은 벽돌집 한 칸을 차지한 작은 상가에는 신선도에 비해 가격이 꽤 높은 과일과 채소가 예쁘게 진열되어 있었는데, 빼빼 말라비틀어진 일본무도 칠천 원은 넘게 했다. 깍두기가 너무 먹고 싶어서 그 무라도 사기로 했다.

계산대로 가는데 내 바로 옆의 장식장에 작은 장미잼 병이 보였다. 드디어 찾았다! 8.9유로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에도 주저 없이 카드를 긁었다. 거리로 나오는데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것처럼 얼마나 기쁘고 신이 나던지... 집에 오자마자 찻숟가락을 찾고 잼 병을 열었다. 분홍 드레스의 얇은 망사처럼 투명한 여린 분홍색에 마음이 울렁거린다. 첫 술을 떠서 맛보자마자 확신이 들었다. '이 맛이 아닌데?'

확실히 이 맛이 아니었다. 심지어 식감도 좀 더 아삭한 것이, 꽃잎을 제외하면 젤처럼 매끈하던 내 기억 속의 잼에 비해 건더기가 더 들어간 듯했다. 레몬과 히비스커스 때문인지 신 맛도 있었다. 평소라면 정말 좋아했을 달콤함과 상큼함이 조화를 이루는 훌륭한 잼이었지만, 내가 찾던 '그 맛'이 아닌 것을 실감하자마자 흥분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더 이상 시중에 판매도 안 되는, 17년 전에 한 번 먹어본 그 맛을 지금 어디서 다시 찾겠는가? 알면서도 기대를 했다는 것은 아마 아주 오래전에 느꼈던 놀라움을 다시 소생시키고픈 비밀스러운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어렸던 나는 책에서만 보던 프랑스가 선사하는 아주 작은 자극에도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며 반응했다. 모 만화영화가 소개한 것과는 전혀 다른 모양의 라따뚜이와 길쭉한 쌀의 식감, 무더운 여름날 바베큐하는 집에서 나는 로즈마리 타는 냄새, 저녁 여덟 시가 되어서야 찾아오는 노을의 따듯함과 아직은 가사를 모르는 노래처럼 들리는 행인의 말소리.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감각의 소용돌이가 잠들어 있던 생존 욕구까지 깨워가며 공명하는 모든 시간을 흡수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감동하고, 실망하고, 후회하다가 행복해했다. 내 첫 해외여행은 그 이후의 삶을 뒤흔들 만큼 날카로운 경험이었다. 아마 이때 소모된 에너지의 총량이 '처음'이란 개념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격양된 감동은 반복적인 자극 노출에 조금씩 둥글게 깎여 나간다. 지하철 옆에 앉은 사람의 대화내용을 원치 않아도 이해하게 되고, 저녁을 여덟 시에 먹는 게 익숙해질 즈음엔 '프랑스'라는 넓은 땅덩어리에 더 이상 눈을 빛내지 않게 된다. 이미 내 뇌와 미뢰는 추억 속의 장미잼을 잊고 새로운 장미잼의 맛을 저장한 지 오래다.


그리스 성가집, 13세기, 남부 이탈리아 기원, 파리, BnF, Département des Manuscrits, Grec 2631. (C)BnF

전에 쓰여있던 글을 지우고 다시 글을 써넣은 양피지를 프랑스어로 palimpseste라고 한다. '긁어내다'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παλίμψηστος에서 왔다고 한다. 우리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어 자꾸 새것에 자리를 내주게 되지만, 헌 양피지에는 글자와 자국이 남는다. 이런 옛 자국을 읽는 행위를 나는 향수라 부른다. 내 혀에서 17년 전의 잉크를 어렵사리 지워냈으니, 나는 억지로라도 그 위에 새로운 글을 써야 할 것이다.


추억여행을 하기 위해 시작한 장미잼 찾기는 내 프랑스 체류 15년 주기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끝났다. 내일은 몇 백 번은 갔을 익숙한 동네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겠지만, 나를 다시금 놀라게 할 새로운 향을 발견하겠다는 다짐으로 장미잼의 병을 닫는다. 그때가 온다면 잼을 발라먹을 빵도 잊지 않고 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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