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 이 글은 이전에 포스타입에 쓴 글 (https://www.postype.com/@hb-in-flandres/post/13066632)의 수정본입니다.
지난 주말부터 릴은 대규모 축제 준비로 한창이다. 수많은 관광객으로 릴의 9월을 뜨겁게 달구는 바로 그 연중행사, 실외 벼룩시장인 '브라드리'가 이번 주 토요일 아침에 개최하기 때문이다. 릴 관광청 기념품점에는 벌써 각종 브라드리 관련 굿즈가 들어왔다. 이미 대부분의 거리에 당일 차량 진입 금지 표시판이 걸리고, 상점도 브라드리 파격 세일을 예고하는 등 어수선하다. 브라드리가 뭐길래 온 도시가 이렇게 북적이는 걸까?
릴의 브라드리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주말 내내 온 도심이 매대 길이만 100km에 달하는 거대한 당근마켓이 되는 날이다. 릴 시민이나 외부인 모두 미리 신청하고 자릿세를 낸다면 참여할 수 있기에, 이번 해에는 8000개의 부스가 원래라면 9월 첫째 주말에 열리는 행사는 이번 년에 2024년 파리 패럴림픽 일정을 위해 한 주 늦춰졌다.
그럼 이 벼룩시장에서 무엇을 살 수 있을까? 답은 '전부 다'. 빈티지 문고리, 누군가의 박사 논문, 안 쓰는 케이블에서 19세기 마호가니 가구까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거리로 나와 새 주인을 기다린다. 탁상을 가져다 놓고 깔끔하게 물건을 정돈한 사람도 있는가 하면 방수 천 위에 물건을 쭈르르 올려놓고 파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개인이 아닌 기업과 상점도 세일을 하며 브라드리에 동참한다. 대부분 아주 대단한 세일을 하진 않으니 굳이 상점 내에 들어갈 이유는 없다. 브라드리의 본질은 중고거래에 있다.
브라드리의 유래
François WATTEAU, La Braderie, An 8, 1800 - Crédit photo RMN-Grand Palais - Stéphane Maréchalle
브라드리는 12세기부터 매년 8월에 서던 장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이 장날 동안엔 외지인도 릴에서 자릿세나 부가가치세를 지불하지 않고 제품 판매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온 유럽인들이 릴을 찾는 특별한 날이었다. 15세기말에서 16세기 초부터 이 '릴 장날 foire de Lille' 기간의 주말에 색다른 이벤트가 생긴다. 사람이 대거로 몰리는 틈을 타, 부수입이 필요한 하인이나 기타 고용인이 고용주가 더는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허락을 받고 판매하기 시작하며 별도의 '벼룩시장'이 생성된 것이다. '브라드리'라는 단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확신할 순 없지만, '굽다'라는 뜻의 플랑드르어 braaden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고문서나 그 당시 외부인의 글에서 15세기부터 장터에 고기나 해산물 구이를 파는 파는 간이 매대가 많았다는 언급이 있다.
1. 릴 플랑드르 역 부근과 구도심 Gare Lille-Flandres + Vieux-Lille 혹은 상트르 Centre 릴에 처음 오셨거나 브라드리 문화에 익숙하지 않으셔서 이 축제의 정수를 화끈하게 즐기고 싶으신 분이라면 이 구역으로 가는 것이 좋다. 우선 릴 플랑드르 역 앞의 rue Faidherbe 거리부터 대광장까지 가신다면 릴의 아름다운 건축물을 향유하는 동시에 따뜻한 온정도 느낄 수 있다. 굳이 스스로 걷지 않아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끼어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광장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음악과 춤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지역의 유명 셰프가 레시피 시연을 하는 등 각종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다.
대부분이 대광장을 돌고 rue Esquermoise와 rue de la Monnaie 등 좀 더 북쪽으로 향하게 되는데, 이 두 거리에서는 언제나 건물 발코니에서 디제잉을 하며 분위기를 돋우는 집이 있다. 여기서 살 수 있는 것은 대부분이 의류이며 일반인 매대보다 기업 매대나 상점이 더 많은 편이다. 서쪽으로는 포슈 광장 square Foch 쪽에 개인 매대가 많으나 여기도 사람이 엄청 몰리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사람에 치이는 것이 싫고, 살 것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절대 가지 않는다. 이번 해에는 이 주변의 avenue du Peuple Belge, rue de Saint-Etienne 등 매대를 설치할 수 있는 길이 추가돼서 인간 체증이 덜해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모든 구도심이 이렇게 붐비진 않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역은 옛 항구인 께 드 보 quai de Wault이다. 깔끔히 정리된 작은 운하길 주위로 아기자기한 빈지티 소품 매대가 즐비하다. 파베르제 달걀을 표방한 달걀 오브제, 50년대 대량 생산되던 다기, 옛날 가구와 도자기 인형 등 다양한 앤틱 제품을 구할 수 있다. 분위기도 조금 차분하고, 탁 트인 공간이라 산책하기엔 최적의 환경이다. 도심 중에서도 도심인 릴 플랑드르 역 부근에서도 rue Faidherbe를 올라가다 중간에 샛길로 빠진다면 전통적으로 영어 사용자들이 환영하는 rue des Arts 같은 색다를 길을 만날 수 있다.
2. 레퓌블릭 République 레퓌블릭 구역의 중심인 릴 시립 미술궁 Palais des Beaux-arts에서 만화 장터가 열리기 때문에 책과 만화 애호가가 많이 모인다. Boulevard de la Liberté는 '눈호강'을 원하신다면 추천하며 '소소한 물건 구매'를 원하는 분께는 추천하지 않는다. 골동품판매상에게 지정된 도로라 천막도 근사하게 쳐져 있고, 대리석 조각상이나 나폴레옹 3세 시기의 식기 등 화려한 아이템을 구경할 수 있으나 가격은 언제나 우리가 바라는 금액의 두 배 이상이다. 여기 상인은 집에 잡동사니를 줄이려고 참가하는 게 아니라 직업으로 물건을 팔고 계신 것이기 때문에 흥정도 어렵다.
장 바티스트 르바 대로 Boulevard Jean-Baptiste-Lebas에는 일반 시민 매대에 빈티지 상품이 상당히 많은 편이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가격이 싸진 않다. 장 바티스트 공원 옆에서 토요일에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에 의한 '어린이 브라드리'가 따로 개최되기 때문에, 장난감이나 보드게임, 책, 퍼즐, 아동복을 구매하셔야 한다면 여기로 가시는 것을 추천드린다. 브라드리에는 아동 판매자가 많으니 예의를 지켜 대하도록 하자.
3. 물랭 Moulins 중심가에서 조금 먼 빅토르 위고 대로 boulevard Victor Hugo를 동맥 삼아 진열된 물랭 구역의 브라드리는 젊으면서도 한적하다. 과열된 상트르보다는 차분하지만, 구도심보다는 새로운 느낌을 주는 이 구역은 산책을 목표로 하신 분에게 추천.
4. 생소뵈르 Saint-Sauveur 시청 주변은 각종 테마의 장터나 이벤트가 열리는 공간이다. 파리문 Porte de Paris과 시청 주변으로 다양한 비영리 단체와 정당 부스가 설치되어 있어서 사회적 주제에 대한 필요한 설명을 듣거나 사회 활동가들을 만날 수 있다. 일반인 매대 수는 다른 구역에 비해 적다.
5. 와젬, 강베타 Wazemmes-Gambetta
나는 보통 토요일 아침을 레옹 강베타 Léon Gambetta 가에서 시작하는 편이다. 직선거리도 길며 도로 너비도 넓어 쾌적할뿐더러 중간에 빵집도 많아서 아침을 때우기 적합하다. 릴의 유명한 일요장인 와젬 장터 부근으로도 정말 싼 가격의 아이템이 중구난방 널려있기 때문에, 체력이 있을 때 둘러보는 게 좋은 구간이다. 주민 간의 분위기도 아주 좋다.
6. 시타델 Citadelle 보방이 세운 시타델 주위로 발달한 에스플라나드 Esplanade와 샹 드 마르스 Champs de Mars 주변에는 8월 말부터 설치된 놀이동산으로 이미 축제 분위기다. 보통 가족 단위로 움직인다면 오전에 브라드리를 즐기고 점심을 먹은 후 놀이동산이나 릴 동물원 (세관에서 밀수입으로 걸린 동물들을 보호하는 동물원)에 가서 즐기는 것이 보편적이다. 토요일에 에스플라나드 입구에 오후 두 시 전에 도착하면 우리나라의 기차놀이와 같은 애벌레 놀이 Chenille에 참가할 수 있다. 목표는 세계 최대의 애벌레를 만드는 것. 2023년에 처음 시작한 이 놀이는 첫 해에 4623명의 참가자로 400m를 육박하는 애벌레를 만들어 세계 기록을 깨는 데 성공했다.
토요일 초저녁에 하천 수송선이 정박해 있는 라 될 La Deûle 강변을 올라가면 운하에 비치는 불빛을 보는 운치도 있고, 건너편의 넓은 에스플라나드 부지에서 아직도 장사를 하고 있는 골동품상을 만날 수 있다. 해가 지면 마치 모험가처럼 방수천과 매대 위에 전시된 내용물을 손전등을 켜서 확인하는 손님을 볼 수 있는데, 오래전부터 존재한 릴 브라드리의 전통적 경험이다.
무엇을 먹어야 할까?
큰 축제에는 먹을 게 빠질 수 없다. 길마다 맷돌만 한 누가 Nougat나 말린 소시지 등 간식을 파는 매대가 눈길을 끌지만, 뭐니 뭐니 해도 브라드리의 상징은 바로 감자튀김을 곁들인 홍합찜인 '물 프릿 moule-frite'이다. 홍합 자체는 꽤 오래전부터 브라드리 기간에 먹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찜이 아닌 구이로 소비됐다고 한다. 감자튀김을 곁들인 홍합찜 자체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처음 선보였다고 한다. 릴이 워낙 바로 옆이다 보니 이 조합이 브라드리까지 넘어온 듯하다. 릴에서 처음 물 프릿을 팔았다는 언급은 20세기 극 초반의 신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틀간 에스타미네, 햄버거집, 일식집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적극적으로 물 프릿을 판매한다. 그러니 매 해 브라드리 기간 동안 500톤이 넘는 홍합이 소비된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손님을 끊임없이 받아야 하는 식당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홍합탕은 나름 합리적인 '패스트푸드'이다. 홍합의 생산지인 네덜란드나 덩케르크에서 릴까지 싼 값에 신선한 제품을 빨리 조달할 수 있고, 죄다 때려 넣고 끓이면 몇 분이면 조리가 완료된다는 장점이 있다. 거기다 시원한 국물까지 더해져 속을 싸악 내려주니, 기름진 북부 음식에 질렸다면 홍합탕만 한 게 없다.
브라드리 주말의 릴 시내에는 홍합 껍데기로 산을 쌓은 컨테이너들이 곳곳에 나타난다. 원래는 식당 앞에 그대로 홍합 산을 쌓는 것이 전통이었으나, 코로나 확산 이후로는 안전하게 컨테이너에 껍데기를 모으고 있다. 이렇게 모인 홍합 껍데기를 재활용해 귀여운 장신구도 만든다 하니 일석이조다. 참고로 여기 주민들이 독특하게 홍합을 먹는 방법이 있으니, 아래의 브이로그 링크에서 4분 정도부터 확인하실 수 있다.
해산물을 드실 수 없는 분들은 알맞은 식당 찾기가 조금 어려울 수 있다. 참고로 나시오날 rue nationale 가의 도x노 피자는 이 기간에 피자 한 판을 4유로에 판다.
더 즐겁게 브라드리를 보내기 위한 팁! 15년간 이 축제를 즐겨온 참가자로서, 릴 브라드리를 더욱 알차게 경험하고 싶으신 분을 위한 소소한 팁을 방출한다.
1. 아침 일찍 가기. 적어도 9시에 이미 도심에 도착해 있는 것이 좋다. 가장 좋은 매물은 이미 일곱 시 정도에 나와있다.
2. 언제, 어떻게 마음에 드는 물건을 볼지 모르니까 가방에 장바구니 두 개는 넣어서 가기.
3. 무거운 책이나 가구는 가장 나중에 사는 게 좋다. 간혹 미리 돈을 내면 저녁까지 물건을 맡아주시는 판매자도 있다.
4. 소매치기 조심! 지갑은 꼭 가방 가장 안쪽에 넣고, 동전 지갑만 주머니에 넣고 다니자. 핸드폰을 사용하기보다 각 구역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지도를 적극 이용하여 소매치기를 예방한다.
5. 구도심과 가장 가까운 지하철인 리우르 Rihour 역 근처는 언제나 사람이 꽉 차있으니, 조금 먼 레퓌블릭-보자르 République - Beaux-Arts나 강베타 Gambetta 역에서 내려서 걷자.
6. 릴엔 공중화장실이 거의 없다! 카페나 식당 화장실을 적극 이용하기.
7. 이 날에는 릴 도심에 차가 다니지 못하고, 몇몇 박물관은 사람이 지나치게 몰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문을 닫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이번 해에 오스피스 콩테스 박물관은 열지 않으니 갈 수 있는 화장실이 하나 더 줄어든 셈이다.
8. 토요일보다는 일요일, 그것도 브라드리가 종료되는 일요일 초저녁에 물건을 빨리 팔기 위해 가격이 내리는 판매자가 많아진다. 물론 여러분이 찾던 물건은 이미 나갔을 수 있지만.
9. 그룹으로 브라드리를 갈 경우 서로를 잃어버리기가 아주 쉽다. 차라리 몇 시에 어디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시작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아니면 깃발이나 맞춤 티셔츠, 풍선 등 멀리서도 볼 수 있는 아이템을 하나씩 지니면 좋다.
10. 브라드리의 주 판매자는 개인이기 때문에 당연하 카드 리더기가 없다. 잔돈을 미리 준비해서 가자.
빈티지를 좋아하시고 중고매매를 즐겨하시는 분께 이 지붕 없는 벼룩시장은 매혹적인 이벤트이다. 이 유럽 규모의 장터에선 언제나 수많은 언어들을 들을 수 있다. 릴의 위성도시에서도 작은 브라드리인 브로캉트 Brocante를 열기 때문에 9월 내내 심심할 틈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물건을 쓰는지, 어떤 물건을 더 이상 쓰지 않는지 하루 종일 보는 즐거움이 있다. 매번 아무것도 안 사겠다고 다짐은 하지만 한 번도 지켜진 적은 없다. 이번엔 어떤 보물을 발견하게 될까? 이번 주말에 전리품을 보여드리러 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