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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랑드르의 한별 Mar 06. 2024

릴, 거기가 어디야?

Lille, Nord, France, 릴에 와야 할 이유

2009년 여름, 나는 릴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채로 프랑스에 도착했다. 아는 거라곤 이 도시가 옛날에 큰 공업도시였다가 크게 불황을 맞았다는 것과 사람들이 착하다는 것 뿐. 지금은 한국 여행객과 교환학생이 찾는 도시가 됐지만, 15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 얻을 수 있는 릴에 대한 정보가 마땅치 않았다. 그런데도 왜 수도인 파리나 다른 유명도시가 아니라 릴에서 몇 년 동안이나 머물고 있을까? 내 맘을 사로잡고 프랑스 정착의 원동력이 되어준 릴의 면모를 하나씩 짚어보자.



Francegeo.fr
https://sig-cartotheque.lillemetropole.fr/

    0. 릴의 지리적 위치와 몇 가지 특징

릴은 프랑스 북부의 오 드 프랑스 Hauts-de-France 도에 속한 노르 Nord 지역의 도시로, 이 두 행정구역의 수도이다. 34,8 km²라는 도시 순 면적만 보면 파리보다 세 배 작은 도시지만 (우리나라 경기도 구리시와 비슷한 면적), 그렇다고 소도시로 분류하면 정말 곤란하다. 프랑스의 도시의 대부분이 작기 때문에 면적 상으론 프랑스에서 대략 열 번째로 큰 도시이며, 백만 명이 훨씬 넘는 주민과 95개의 도시로 이루어진 '릴 유럽 메트로폴리스'는 인구 수와 일자리 수로 따지면 파리, 리옹, 마르세이유 이후로 프랑스에서 네 번째로 큰 광역시이다. 초반에 말한 것처럼 20세기 초반까지 융성한 공업도시였지만, 2차 세계 대전과 60년대부터 시작된 프랑스 직조 공업 불황과 주변 도시의 탄광 폐쇄로 인해 극심한 경기 침체를 맞는다. 80년대 후반부터 제3차 산업으로 재전환을 성공하며 경제적 활기를 되찾아 지금은 서비스업으로 유명한 경제도시가 됐다.



    1. 뛰어난 접근성

릴 메트로폴리스 주민에게 이 광역시의 가장 큰 장점을 뽑으라고 한다면 파리와 브뤽셀, 암스테르담, 심지어 런던과 가깝다는 사실일 것이다. 파리에서 TGV로 한 시간 내지 한 시간 반, 브뤽셀도 기차로 30분, 런던은 유로스타를 타면 한 시간 반밖에 걸리지 않는다. 서로 500m 남짓 떨어진 릴 플랑드르 역과 릴 유럽 역을 기점으로 릴은 교통의 요충지가 된다. 그래서 이젠 한국 여행자들이 파리에서 브뤽셀로 넘어가기 전 중간에 하루 정도 머무는 관광지가 된 것이다. 릴에서 거주하며 벨기에나 파리 주변 지역에서 학교를 다니거나 일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릴 위성 도시인 레캥 Lesquin에 공항이 있고, 릴 메트로폴리스 내부에도 지하철, 버스, 트램과 공공 자전거 등 교통수단이 다양하다.


    2. 다양한 문화 예술 공간

개인적으로 릴 메트로폴리스에 살면서 가장 만족하는 점은 바로 폭넓은 문화생활이다. 파리를 제외한 프랑스 박물관 중에서 두 번째로 가장 큰 릴 미술궁, 13세기 구제원에서 박물관이 된 오스피스 콩테스, 현대 예술작품 전시가 끊이지 않는 트리포스탈과 생 소뵈르 문화 센터, 메종 폴리 물랭, 규모가 조금 작은 파스퇴르 연구소 박물관이나 샤를 드 골 생가까지... 릴 시내에만 무수한 박물관이 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박물관 중 하나인 라 삐씬 - 앙드레 딜리장이 릴에서 지하철로 20분 떨어진 루베에 있고, 다른 위성 도시에도 크고 작은 박물관이 즐비하다. 구도심을 걷다 보면 오 분마다 한번씩 문화재 앞을 지나가게 된다 (이 면에 대해서도 천천히 다루겠다).


거기에 릴 시내에만 영화관이 세 군데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한국의 CGV처럼 큰 체인인 UGC이고 나머지 둘은 소규모 독립영화부터 터키나 아이슬란드, 한국 영화 등 세계의 영화를 수입해오는 예술영화 상영관이다. 최근 5년간 영화표 가격이 상당히 올라서, 세 영화관에서 쓸 수 있는 정액권을 끊었다. 한 달에 두 편 이상 보면 본전을 뽑을 수 있다.


그리고 시내에 크고 작은 콘서트홀과 극장이 있다. 릴 플랑드르 역에서 오 분을 걸으면 20세기 초반의 웅장한 오페라 하우스를 볼 수 있는데, 고전 가곡을 현대적인 미장센으로 풀어내는 정책을 가진 곳이다. 오페라 측에서 제시하는 할인을 적용하면 어떤 유명 오페라도 이 만원에서 삼만 원 정도에 볼수 있다.



    3. 매년이 축제인 도시

문화 생활이라 하면 크고 작은 페스티발도 빼놓을 수 없다. 릴에서 가장 유명한 축제는 단연 '릴 브라드리'다. 15세기에 시작된 전통으로, 시내 전체가 9월 첫 주말에 대규모 벼룩시장으로 변신한다. 유럽에서 가장 큰 벼룩시장인 릴 브라드리 말고도 주변 도시에서도 모두 자기만의 벼룩시장인 브로캉트brocante를 진행한다. 대부분 봄이나 가을에 열리며, 규모는 시마다 천차만별이다. 빈티지 아이템을 몇 유로에 가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며, 시내 전체가 축제 분위기이기 때문에 구경하기도 좋다.


릴이 이렇게 활발한 문화의 도시가 된 결정적인 순간은 릴이 이탈리아의 제노바와 함께 유럽 문화수도 La capitale européenne de la culture로 지정됐던 2004년이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Lille 2004라는 이름 하에 릴 시내와 주변에 일년 내내 크고 작은 행사가 끊이지 않았는데, 이 해에만 9백만 명의 관광객이 집계됐다. 해가 지난 후에도 지역사회의 문화 예술 분야에 지속적으로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3000년까지 행사를 진행하겠다는 포부를 담아 3년에 한번씩 Lille 3000이라는 페스티발을 열고 있다. 비디오 맵핑, 실내 및 야외 전시회, 퍼레이드, 콘서트 등 다양한 행사가 있으니, 궁금하시다면 2025년에 열릴 "피에스타 fiesta" 에디션을 기대해주시기 바란다.  



    4. 대학생이여, 오라!

릴은 19세기부터 국립대학을 유치하기 시작하며 프랑스의 유명한 대학도시로 자리잡았다. 1980년대 이후로는 꾸준히 그랑제꼴에 준하는 명성 높은 사립 에꼴도 릴에 자리잡으며 다양한 학군의 대학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특히나 제 3차 산업에 주력하는 도시답게 비지니스 스쿨이나 마케팅 스쿨이 많으며, 여러 갈래로 나뉘어진 국립 대학 역시 우수한 커리큘럼을 낮은 등록금으로 제공한다. 이렇듯 대학생에게 매력적인 도시인 만큼 릴 인구의 36%가 25살 이하일 정도로 평균 연령이 낮다. 거기에 산업혁명부터 다양한 민족이 북쪽에 정착하며 릴에 문화적 다양성을 가져왔기 때문에 복합적인 생활양상을 발견할 수 있다. 최근 몇 년간 릴 카톨릭 대학에 한국 분들이 많이 오시는 듯 하다. 릴 국립 대학에서 7년을 보낸 경험이 있는 졸업생의 입장으로 릴에 다양성을 더 증폭시킬 수 있는 외부인이 늘어난다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다.


https://www.losc.fr/node/8498

    5. 스포츠의 도시

최고의 강점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스포츠를 좋아한다면 릴은 둘러볼 가치가 있는 동네다. 현재 프랑스 축구 리그 1의 4위를 차지하고 있는 LOSC가 있고, 최신식의 넓은 경기장 (옛 피에르 모로와 경기장, 현 데카틀롱 경기장)이 릴 바로 옆의 빌뇌브 다스크에 있으며, 여성 축구팀도 아주 활발하다 (빌뇌브 다스크에서 여성 축구 국대가 연습하고 있는 것을 간혹 볼 수 있다). 광역시 안에는 올림픽에서 수영과 워터 폴로로 많은 메달을 따낸  '넵튠의 아이들' 수상 스포츠 클럽으로 유명한 뚜르꼬앙 시도 있다. 큰 도시답게 헬스장이나 수영장도 여기 저기 보인다.








    6. 흥미로운 역사

11세기에 형성된 릴 도심은 10세기간 꾸준히 변화해왔다. 플랑드르 백작령에서 부르곤뉴 공작령으로, 합스부르그 가의 영토에서 에스파냐령을 거쳐 1667년에 프랑스에 귀속되기까지 파란만장한 역사가 색다른 아우라를 만든다. 거기에 20세기 초까지 공업 도시였던 탓에 허물어지거나 재활용되는 공장과 양조장 등을 볼 수 있다. 공장식 대량생산 면에선 릴보다 더욱 활발했던 릴 주변 도시에선 옛 공업단지의 폐허를 재활용한 문화 공간이나 로프트가 사랑받고 있고, 이런 공간을 중심으로 도시 탐험 Urbex도 활발하다. 굳이 위험하게 폐허로 향하지 않더라도 릴 이곳 저곳에서 18세기의 비단 세루 직조공의 사암으로 만든 집이나 가난한 노동자의 벽돌집, 1차 세계대전 이후 지어진 아르 데코 형식의 건물을 쉽게 볼 수 있다.



    Conclusion. 릴에 와야 하는 이유

릴의 인기는 지난 15년 동안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1990년대부터 이어진 재생 사업이 이제 드디어 빛을 발하는 듯 하다. 유럽 주요 국가와의 접근성, 다양한 문화체험과 다양한 프로필의 사람들과의 만남은 국경 근처에 위치하는 활발한 광역시가 가지는 강점이기도 하다. 거기에 현지인들도 친절한 편이라 외지인과의 소통도 원활하다. 다른 대도시에 비해 작은 규모와 고즈넉한 낮은 건물 등, '인간 척도 échelle humaine'의 기준으로 봤을 때 부담스럽지 않아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작년엔 프랑스의 유명한 비디아스트이자 스트리머인 앙토안 다니엘 Antoine Daniel이 프랑스 도시 탑 티어 리스트를 만드는 과정에서 릴을 1위에 올려놓기도 했다. 물론 정식으로 연구한 학술적 수치는 아니지만, 주류 미디어에서 릴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는 십여 년 전엔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참고자료 : https://youtu.be/fbf_lz9Y6pc?si=oY3INkqI0aP1jDEj)


벨기에와 홀란드, 옛 신성 로마 제국과 에스파냐와의 긴밀한 연결 속에서 팽창하고 변화한 릴은 우리가 기대하는 '통상적인 프랑스'와는 다른 독특한 풍경을 선사한다. 거기에 불경기를 딛고 올라서며 정립시킨 다양한 사회제도나 문화산업이 릴과 그 주변 도시에 안정적인 활기를 불어넣으며 릴을 동시에 '살기 좋은 도시'와 '관광하고 싶은 도시' 반열에 올려놓았다. 물론 릴은 무릉도원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이기에 단점들도 상당히 많다. 릴에서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어떤 것이 있을까? 다음 글에서 아주 주관적인 시선으로 본 릴의 문제점을 다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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