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인간을 읽다.
차마 입에 올릴 수도 없을 만큼 발칙하게도 이 말을 한번 되뇌어 본다. 우리가 동물의 목숨을 끊고 거기서 취하는 여러 가지 가치들. 거기서 주어만 바뀌었는데도 불편함이 느껴지는 건, 인간으로서의 공감능력일까. 아니면 인간 말고는 이 문명을 대체할 수 없기에 인간은 모든 것을 누려야 하는데, 감히 그 사슬을 깨트린 거부감에서 오는 나의 오만함일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희곡 작품 중 하나인 인간을 읽었다. 유일하게 등장하는 남자주인공 라울과 유일하게 등장하는 여자주인공 사만타는, 어둡고 캄캄하지만 그래도 한줄기 빛은 있는 어떤 유리벽으로 둘러 쌓인 공간에서 눈을 뜨게 된다.
라울은 공교롭게도 제약회사에서 동물실험을 하던 사람이었고, 사만타는 호랑이를 조련해 호랑이 쇼를 담당하는 서커스 단원이었다. 그들은 같은 언어를 쓰고 있었지만 도저히 이곳은 어딘지 가늠하지 못했고 누구 한쪽이라도 한쪽에게 해를 끼치고자 한다면 500V 정도 되는 전기가 그들이 딛고 있는 바닥에서 흘렀다.
라울은 자신이 하는 동물실험이 내심 재미있고 자랑스럽다는 듯 열거했으며, 사만타는 그를 위선적이라 생각하면서도 차라리 라울의 동물실험보다 자신의 호랑이 조련이 인간적이란 오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매번 그들이 신체적으로 가까워질 때마다 하늘에선 미사를 집전하며 먹는 영성채와도 같은-빵맛과 종이맛의 중간이라고 되어있다- 칩이 떨어졌고, 장난감-햄스터의 쳇바퀴와도 같은 바퀴-가 떨어졌으며, 냅킨이나, 손수건, 화장지, 행주 등으로 유용할 수 있을 법한 종이두루마리가 떨어졌다. 사만타는 그 두루마리를 이용해서 자신만의 오두막을 만들었고, 라울도 그녀를 따라 자신의 오두막을 만든다.
우연히, 그들의 공간에 내려온 사다리의 존재를 자각하게 되고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사다리의 끝에는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 적어도 지구에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정체불명의 거대한 외계 동물의 존재를 깨닫는다. 자신들이 왜 이곳에 붙잡혀 왔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자신들이 붙잡혀 오게 된 이유에 대해 옥신각신 다투며 그들은 그 정체불명의 외계 동물과 평화협정을 맺기 위해 다시 또 사다리를 오른다.
그 순간이었다. 웅웅 거리는 기계소리와 함께 방의 한쪽면은 TV화면으로 바뀌었고, TV앵커는 정신 나간 독재자의 연설을 시작으로 지구에 핵전쟁이 벌어졌음을, 그로 인해 지구가 소멸될 것임을-지구가 더 이상 회생의 가능성이 없음을- 침통하게 이야기한다.
라울과 사만타는 공황에 빠졌고, 인간의 본질과 타락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해 검사와 변호사, 판사와 증인이 되어 각자 변론하고 반론하며 토론한다. 종잡을 수 없는 결론으로 이야기는 치닫게 되고, 그 둘의 모습을 보고 있는 외계 '동물'들의 다소 재미있지만 상투적인 이야기로 이야기는 끝난다.
지구에서 인간은 항상 최상위 포식자로서 철저한 갑의 위치이고, 동물들은 철저한 을의 위치이다. 인간만큼 다른 생명체를 자신의 재미 혹은 실수로 함부로 죽이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 그저 동물들은 자신의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하여 다른 동물들의 목숨을 끊는 사냥이란 행위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의 필요에 따라 동물실험을 자행하기도 하고 인간의 필요이상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육식이란 행동을 한다. 인간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 플라스틱 및 기타 재료들을 이용해서 지구를 오염시키고 그 재료들은 강이나 바다로 흘러 들어가 다른 동물들의 입속이나 콧속으로 넘어가 천천히 고통 속에서 죽음에 이르도록 만든다. 그래서 인간은 지구에서 철저한 갑이자, 인간이 아닌 동물들을 어떻게든 죽이려고 만들어진 어쩌면 지구의 암덩어리 같은 존재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스트레스받는 날, 소주 두 병 삼겹살 삼인분에 아주 알뜰하게도 삼겹살을 구우며 나온 기름에 밥까지 볶아 먹고 나오는 아주 육식에 있어서 만큼은 날 따라올 자가 없을 정도로 고기를 좋아하는 고기예찬론자인 사람이었다.
그런 나도 어느 날, 유튜브를 보다가 산 오징어를 손질하는 -오징어의 다리 부분을 숭덩 썰고 잘린 단면에다 간장을 부으니 오징어가 벌떡 하고 일어서는- 영상밑에 달린 댓글이었는데 입에서 눈물이 난다는 댓글 보고 엄청난 거부감을 느꼈다.
살고자 하는 마음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다른 동물들의 본능일 텐데 그 동물이 고통을 느끼고 못 느끼고를 떠나서 그런 걸 깡그리 무시하고 그저 단순히 다른 생명체의 죽음을 보며 입에서 눈물이 난다는 말은 그 죽음의 과정들이 단지 오락 정도로 여기는듯한 오만함이 느껴지는 듯해서 그래서 더 거부감이 들었던 것도 있다.
물론 그 죽음에 대해 미안해하고 눈물을 흘려가며 추모하란 말은 아니고, 굳이 그런 이제 쉬다 못해 썩어빠진, 이제 입술에 미동조차 오지 않고 눈 버렸다 싶을 정도로 재미없는 드립을 쳐야 할 만큼 그 고통이 신이 나느냐는 말이다.
인간 세상에 인간이 아닌 인간보다 더 발전한 문명이 나타나 철저한 갑의 입장이었던 인간이 철저한 을의 입장이 되었다고 치자.
누군가 인간을 잡아 딸깍딸깍 숨이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얇은 포를 떠서 싱싱하다며 회를 처먹고, 아직 채 태어나지도 않은 인간을 강제로 모체에서 분리해 가죽을 벗긴 다음 최상급 가죽이라고 하여 그걸로 가방이나 장갑을 만들고, 늙고 병든 인간의 가죽과 고기는 국거리용으로 쓰며, 강제로 인간을 임신시키고 아기는 아기대로 키워 고기로 활용하거나 지금 젖소와 똑같은 위치에 인간이 처하게 된다면.
그리고 인간의 도축과정을 보며 누군가 입에서 눈물이 난다며 낄낄거리고 그 도축과정을 영상으로 소비하는 문화가 발생한다면 -당연히 나는 철저한 을의 입장이기에 가능한 일이다라며- 누가 이런 죽음을 납득하고 날 먼저 죽여줍셔 하고 나설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이란 이 책을 읽으며 무심코 우리가 자행하는 일들에 주어를 바꿔 놓고 보니 이 얼마나 끔찍하고 비록 살기 위해 그런다지만 인간만큼 이기적이고 또 독선적인 생명체가 세상에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인간은 다 죽어야 한다! 는 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필요이상의 행동을 하지 말잔 이야기다. 일주일에 다섯 번은 먹는 고기 세 번으로만 줄여도 충분하다.
그렇다면 축산농가는 어쩌란 말이냐!라고 이야기 할 텐데, 필요이상의 소비를 떠받치기 위해서 필요이상 -공장식 축산법-으로 학대당하며 고통받는 동물들이 대부분이다. 필요이상의 소비를 다섯 번에서 세 번으로만 줄여도, 고통받는 동물이 줄어들 것이고, 고통받지 않으며 자란 동물을 제값을 주며 취할수 있다.
조금만 양보하면 전인류가 충분히 먹고 소비할 만큼의 식량을 충분히 생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요이상의 소비를 하느라 어디선 음식이 흘러넘치고, 또 어디선 당장 물조차도 구하지 못해서 썩은 물을 갖다 떠 마시고 있는(이조차도 흘러 넘치는 쪽으로 자원을 몰빵하느라, 항상 여기는 이모양 이꼴이다), 이 불공평하고 인간사이에서도 철저히 갑과 을의 위치가 나뉘는 이 잔인함이란.
랄프의 이야기로 이 긴글을 마무리 하려고 한다. 마무리 하며 최소한 철저한 갑의 위치에 있다는 인간이라면, 나 아닌 다른 것들의 고통을 보며 깊은 동정을 표할수 있는 측은지심 정도는 가져야 인간이라고 할수 있지 않을까. 아직도 다른 것들의 고통을 보며 입에서 눈물이 흐른다면 그건 아직도 인면수심인것이고.
https://youtu.be/I3tta73m6Vg?si=iAN3toeGyIG3XzWI
오늘의 독후감 끝! 땅! 땅! 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