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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97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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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먼지 Mar 01. 2024

담금질하는 여인들

에세이

어린 시절, 동이 트기도 전에 엄마가 나를 깨우곤 했다. 


"빨리 가야 물이 깨끗해."


나는 비몽사몽 내복도 갈아입지 않고, 위에 외투와 양말만 걸친 채 옮겨졌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목욕탕. 몸에 물 묻히기도 귀찮아하던 나와 달리, 외할머니는 제일 먼저 샤워를 마치고 사우나로 향했다. 그녀의 발걸음에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그런 모습에 호기심이 일어 뒤로 따라붙었다.


그렇게 난생처음 불가마를 맛봤다. 문을 열자마자 밀려드는 후끈한 열기. 고요함을 넘어서 엄숙함마저 느껴지는 분위기. 그 안에서 묵묵히 견디고 있는 여인들을 보았다. 흐르는 땀이 아니었더라면 석상으로 착각했을 거다. 그들은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열과 싸우고 있었다.


나는 그들 옆에 앉아있기를 좋아했다. 간간이 입에 식혜도 물려주고, 아이가 사우나를 잘 참는다며 칭찬도 해주었으니까. 당연한 소리지만 그들만큼 오래 견디지는 못했다.     


할머니는 불가마에서 나오면 당연하단 듯이 냉탕으로 향했다. 사람이 어떻게 그 뜨거운 열기를 견디고, 곧장 냉탕에 몸을 담그는지. 슬쩍 발가락만 담가본 냉탕은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그곳에 망설임 없이 빠지는 여인들이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느껴졌다. 뜨거운 국밥을 시원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어른이 되면 감각에 이상이 생기는 걸까. 








내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할아버지가 시각장애인이 되셨다. 장녀인 우리 엄마와 큰 이모의 터울이 열 살이니, 아직 이모들은 미성년자던 시기다. 딸들을 키워내기 위해 온갖 노동을 마다하지 않은 외할머니였다. 


그녀는 식당 주방일부터 시작해서 삶은 옥수수와 호떡을 길거리에서 팔기도 했다.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힘겨운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밤마다 할머니는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아파하다가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일을 나가셨다. 어렸던 나는 할머니의 고난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때 맡았던 파스와 새벽 공기의 냄새가 어렴풋이 떠오를 뿐이다.


집안의 대소사를 책임졌던 그녀는 그저 ‘그땐 다 그렇게 살았어.’라는 말로 자신의 고생을 과소평가한다. 엄마와 이모들은 할머니를 보며 ‘철의 여인’이라고 농담처럼 말하지만 정말 그녀의 강함은 존경을 넘어 경외심마저 들 정도다.


그런 외할머니에게 얼마 전엔 뇌졸중이 찾아왔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지만 할머니는 회복 기간을 거쳐 다시 집으로 돌아오셨다. 여전히 밭을 돌보고 볕이 좋은 날이면 할아버지와 산책하러 다니신다. 모두가 만류하지만 이런 부분에서 할머니의 고집을 꺾을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당연하게 여겼던 할머니의 강인함이, 조금씩 무뎌져간다는 사실을.


 


얼마 전엔 새해를 맞아 엄마와 언니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목욕탕에 다녀왔다.


"알면 서운해하시니까, 우리끼리 조용히 다녀오자."


그렇게나 목욕탕을 좋아하던 할머니인데, 걱정이 되어 목욕탕에 가잔 얘기를 못했다. 오랜만에 간 고향 목욕탕은 전보다 낡아있었다. 온탕도 예전만큼 뜨겁지 않았다.


탕에서 나오던 길에 문득 불가마 생각이 났다. 그렇게 들어간 불가마 안 풍경은 예전과 비슷했다. 마치 도서관처럼 침묵이 감도는 그 엄숙한 분위기. 비슷한 표정으로 견디고 있는 여인들.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오는 걸까. 쑤시는 관절에 끙끙거리며 잠이 들다가도, 새벽같이 일어나 사우나와 냉탕에 몸을 밀어붙이는 날이. 


그날 목욕탕에는 여전히 많은 여인이 자기 몸을 담금질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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