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에 온 지도 벌써 6년을 지나 7년을 바라보고 있다. 냅다 학교 합격 레터만 받고 무작정 캐나다에 왔는데 영어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재수 후 삼수까지 준비했던 나이기에 영어 리스닝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웬걸.. 영어 듣기에서 듣던 깔끔한 교과서 발음이 아닌, 이민자들의 영어가 날 둘러싸기 시작했다.
수능 영어는 꽤 자신 있던 나이기에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지 뭐-하고 왔는데, 밴쿠버에서 혼자 살 집을 구하려고 craiglist 포스팅을 보면 죄다 전화를 하란다. 꾸역꾸역 문법 검사기를 돌려 이메일을 보내면 반은 답장이 없고 반의반은 전화하란 말을, 남은 반의반은 스캠이었다. 그래서 전화를 하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늘어놓곤 했다. ‘다문화가 어우러지는 밴쿠버에 가겠다’라는 허울좋은 핑계를 대놓고 정작 날것 그대로의 억센 악센트가 뒤섞인 영어를 들으니 아찔했다.
밴쿠버의 장점은 이민자가 많은 것, 단점 또한 이민자가 많은 것. 나 같은 늦깎이 이민자들이 쉽게 섞일 수 있는 곳이지만 그만큼 영어가 늘지 않는다. 나는 한 5년쯤 외국에 살면 외국어가 유창해질 줄 알았다. 개뿔! 4년제 대학, 그것도 커뮤니케이션과 퍼블리슁-출판을 전공해놓고 여전히 엉망진창인 문법과 처음 보는 슬랭에 허덕이고 있다.
그렇게 웃음이 많아졌다. 한국어를 할 때에는 말을 잘한다, 딕션이 좋다, 예민하고 직설적이라는 말을 종종 듣곤 했는데 영어를 할 때는 넉살 좋은 웃음이 잦다. 왜냐고? 못 알아먹어서, 상황에 딱 들어맞는 찰떡같은 한마디 날리고 싶은데 그게 안 튀어나와서.. 그냥 눈칫밥으로 여차저차 넘어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동네 작은 주스가게부터 로컬 스타트업, 한인 회사를 거쳐 지금의 번듯한 직장과 타이틀을 갖기까지 약 4년 정도 걸렸다. 다른 업계의 다른 직종은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호스피탈리티-F&B 업계, 그리고 또 마케팅을 맡고 있기 때문에 완벽한 영어가 중요하다고 스스로를 압박하고 있었다. 어딜 가나 첫 소개에서 ‘내 영어는 완벽하지 못해.. 근데 그만큼 열심히 해볼게’ 하고 운을 떼는 게 내 단골 멘트였다. 그때마다 돌아오는 건 ‘네 영어는 완벽해! 우리는 네가 무슨 말 하는지 다 알겠는데’ 하는 격려였지만 그럼에도 나는 늘 불안했다.
완벽한 영어란 뭘까?
맞다, 아직도 나는 100% 영어를 구사하지 못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의 모국어인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는 없단 걸 받아들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다. 언어의 장벽이 내 일에 대한 열정을 꺾을 순 없다고, non-verbal 한 내 노력을 더 보여주자고 미친 듯이 일했다. 입버릇처럼 말하는데-진심은 통한다고, 내가 영어 좀 못해도, 표현이 좀 틀려도, 고맙게도 내 부단한 노력을 알아줬다. 가끔 말이 엉켜 답답해할 때가 있는데 한번은 보스가 나한테 ‘괜찮아. 아무도 너를 오해하지 않아, 우리는 네가 얼마나 섬세한 사람인지 알아. 너가 실수해도 오해하지 않으니 그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마, we hear you’라는 말을 건넸다. 그날 밤, 언어의 장벽이 높은 게 아니라 그 벽을 겹겹이 쌓고 있는 건 나라는 걸 알아차렸다. 사람들은 단순히 내 영어만 듣지 않는다. 그들은 내 평소 습관, 표정, 문맥, 행동도 본다. 그들은 '영어-English'가 아니라 내 '언어-language'에 귀를 귀울이고 있다.
‘언어는 한 사람의 세계이다’. 언어학 수업을 들었을 때 교수님이 하신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아마 죽을 때까지 내 세계-언어에 대한 내 갈증은 해소되지 못할 거 같다. 영어를 좀 할만하니까 스페인어, 프랑스어에 자꾸 눈이 돌아간다. 그래도 요즘은 ‘미안 내가 영어가 완벽하지 않아’ 대신에 ‘well, you will get used to Lauren’s languages soon!’이라며, 곧 내 언어에 익숙해질 거야-라는 농담을 건네곤 한다. 언어는 단순히 한국어/영어로 나눠지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같은 영어를 미국 안에서 써도 주마다 다르고, 같은 스페인어를 써도 나라마다 다른데 하물며 동양인인 내가 서양에서 구사하는 영어가 그들과 똑같을 순 없지. 영어는 상대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수단’일 뿐, 단어와 문법으로 내 한계를 정해줄 수 없다.
모국어가 아닌 제 2 외국어로 일을 하는 마케터로써, 이민자로써 서글퍼지는 순간이 있다. 아니 그니까, 누가 그러래? 네가 선택한 일이니 네가 감당해야지-하는 쭈글 모먼트가 오기 마련이다. 혼자 그 시간들을 웅크리고 지내왔기에 얼마나 서러운지 안다. 나를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의 따뜻한 위로가 충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냥 혼자 동굴 속에 처박혀 허우적거릴 때가 있다. 더 이상 그들에게 기대기도 미안하고 이게 맞나 싶을 때 먼저 겪어본 내가, 부족한 게 당연한 거라고,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