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인간은 고쳐서 쓰는 게 아니다, 사람 안 변한다 등 사람은 쉬이 변하지 않는다를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믿음은 있는데 성격이 좀 그런 사람 VS. 믿음은 없으나 착한 사람을 고르라면 나는 후자를 택하는 사람이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 받을 수 있지만 성품은 변하지 않는다 생각해서였다.
그런 내가 남편의 변화를 바란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 하지만 사실 나는 남편이 카지노를 다니지 않는 것이 근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불이 꺼져 어둠 속에 있을 때 적응이 되면 어느새 그 어둠에 적응된 눈은 그곳에서도 물체를 식별할 수 있게 된다. 탁하고 불이 켜지면 잠시 앞이 보이지 않다 이렇게 밝은 세상이 있다니 하고 놀라는 것처럼 나는 그저 남편을 빛으로 나오게 하고 싶었다.
나오는 과정이 길거나 오는 중간 부딪쳐 다치거나 중간에 주저앉아 쉰다 해도 그를 끌고 나올 심산이었다.
그 길이 얼마나 길지 얼마나 험난할지 생각지 않은 채 나는 그의 영과 육의 구원을 바랐다.
우리는 매주 함께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결혼 전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는다 고백했던 사람이었지만 어떤 사유인지 결혼 후에는 한 걸음씩 멀어졌던 사람이었다. 그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꺼려했다.
그런 그가 함께 집 근처 교회를 함께 가주는 것은 나에겐 고마운 일이었고 안도감을 주었다.
가정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할 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매주는 아니더라도 그는 노력했다.
나름 중국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IT회사에서 일했던 그는 소위 노가다판으로 뛰어들었다.
어릴때부터 건실한 직업을 위해 꽤 많은 돈을 쏟아부으신 시부모님들의 눈에는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한국에서 외국인이 땀 흘려 일하며 가정을 꾸릴 적당하고 정직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수학과 컴퓨터에 능통한 그는 설계프로그램을 어느 정도 만질 줄 알아 어느 정도 기술을 쌓은 뒤 작은 팀의 팀장이 되었다.
그는 그 간 낭비된 시간과 돈을 어서 회복하고 싶어 했다.
밤낮없이 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줄어들었고 함께 예배를 드리는 시간도 없어졌다.
아이는 아빠를 볼 수 없었다. 새벽녘에 나가 아이가 잠들 무렵 잠이 들면 들어오는 아빠였기 때문이다.
가족이 가장 중요하고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나도
"어쩔 수 없잖아."라는 말에 그에 대한 섭섭한 잔소리 하기를 멈추었다.
그가 가정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풀액셀을 밟으며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