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아이는1.
- 네이버 어학사전.
연애를 시작하니 처음 맺는 관계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안전했던 내 작은 사회가 남자친구로 인해 더 넓게 확장되었다. '아, 이게 어른이구나!' 늘어나는 전화번호부 명단이 내 위치 같았다. 하지만 어른인 척하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이 아이였던 나는 셀프가 없었다. 사람 관계에 대해 배운 거라고는 '조심해야 하는 사람' 뿐이었다. 결국, 나는 '좋은 놈'과 '나쁜 놈'으로 사람을 나눴다. 딱 첫 만남에 나쁜 놈이 아니면 감싸 안았다.
"너 왜 그렇게 걔 눈치를 봐."
"그야…. 걔가 날 싫어하는 것 같으니까."
좋은 놈도 나와 안 맞을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좋은 사람이 쌀쌀맞으면 내 잘못인 줄 알고 전전긍긍했다. 인연 하나하나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하루하루가 아슬아슬 줄타기였다. 반면 최민우는 달랐다. 대인 관계에 거침없었다.
"형 그건 아니죠. 아무리 선배라도 지킬 건 지켜요."
"야, 하기 싫으면 하지 마. 너 말고 다른 사람이랑 하면 돼."
아니 건 아니고 싫은 건 싫다고 말했다. 상대방 의견을 듣고 확실하게 자기 의견을 냈다.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며 최민우 의견을 따라갔다. 재미있고 말 잘하는 활발한 사람. 그가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 덕분이었다.
반대라서 우린 서로에게 끌렸을까? 어느 날 최민우가 말했다.
"넌 진짜 배려심 있는 것 같아. 어떻게 그렇게 잘 맞춰줘? 애들이 너랑 있으면 편하대.“
"난 네가 너무 대단해. 어떻게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명확해? 대답도 똑 부러지게 말하고."
"자기애가 넘쳐서?"
“잘났다. 잘났어.”
장난스럽게 웃는 그 얼굴이 좋았다. 자신에게 없는 모습 때문인지 서로가 서로에게 안도했다. 그래서 난 그와의 관계가 변하지 않을 줄 알았다. 오만했고 어렸다. 1학기 중간고사를 지났을 무렵 최민우랑 부딪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학년마다 한 명씩 있는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술만 마셨다 하면 꼭 싸움을 일으키는 사람들이었기에 이상하지는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는데 그것이 시작이었다.
"걔 진짜 왜 그러냐? 여자친구가 잘 좀 타일러봐."
최민우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열이면 열 너무 강한 자기주장이 불편하다는 얘기였다. 묘하게 바뀌는 공기. 그건 과실에서만이 아니었다.
“어디야? 수업 안 와?”
“어…. 잤어. 피곤해.”
“어제도 술 마셨어? 몇 시까지 마셨길래 아직도 못 일어나?”
“아, 좀! 그만 말해. 머리 울려. 끊는다.”
그는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취할 때까지 마셨다. 마실수록 예민해졌고 인사불성이 되었다. 같이 있으면 언제 터질지 몰라 조마조마했고 내가 없을 때 마시면 다른 사람이랑 싸울까 걱정스러웠다. 어느 순간 온 신경과 감각이 최민우한테만 쏠리게 되었다. 내 하루에서 내가 사라져버렸다.
“민우 내버려 둬. 가족 때문에 힘든 것 같더라.”
사정이 있었다. 최민우와 싸웠던 사람들은 사정을 모르니 이해를 못 해준 거란다. 친한 사람들은 다 이해하고 불쌍해하고 있다. 할 말이 없었다.
“너희 부모님은 건강하시잖아!”
그 말이 족쇄처럼 내 발목에 채워졌다. 찬란하고 아름다운 스무 살. 어리석고 오만했던 그 시절. 관계도 가치도 심지어 자신에게도 어떠한 기준도 없으면서 나는 그의 구원자가 되기로 했다.
그렇게 최민우와 3년을 사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