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나 무거운 주제인지라 가까운 사람들과도 솔직하게 오픈하기 힘든 이야기, 바로 결핍에 관한 것이다.
20살이 되던 해에 집을 나와 오랜 해외 생활을 하다 보면 외로움에 익숙해진다. 워낙 독립적이기도 하고 주변에 든든한 친구들도 있고 즐길 거리도 많아서 딱히 외롭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지만 일 년에 한두 번 어느 날 문득 철저히 혼자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외로움이라는 감정도 결핍의 한 형태로써 나타나는 현상인데 내 안의 결핍을 가장 마주하기 쉬운 환경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그건 바로 연애할 때이지 않을까. 누구보다도 친밀한 관계에서 내가 상대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과정 속에서 나의 결핍을 마주하기가 가장 쉬운 듯하다.
그래서 연애란 단순히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뻔한 이야기이지만 이는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며 내 결핍을 마주할 용기를 얻게 되는 과정인 것이다.
어릴 적 나는 부모님으로부터의 인정과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이 컸다. 부모님이 칭찬에 인색한 분들은 아니셨지만 뭐랄까 나 스스로의 낮은 자존감에서 기인한 마음이었달까?
주변의 잘난 친구와의 비교 그리고 소심했던 성격 탓에 나 스스로를 충분히 사랑해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 어린것이 나름 스스로 잘 극복해 보겠다며 매일 밤 자기 전 침대에서 눈을 감고 내가 멋진 사람인 이유를 10개씩 되뇌며 '나 생각보다 멋진 사람이잖아!?'라는 자기만족과 함께 잠든 기억이 난다.
이런 인정과 칭찬에 대한 결핍은 내가 가까운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때 상대를 향한 과한 배려로 나타나게 되었다. 내가 좀 더 상대를 위해주면 나의 마음을 알아주고 사랑하고 칭찬해 주겠지라는 마음.
나를 거절당할 것이라는 그 두려움 때문에 나보다는 상대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게 몸에 배였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이 또한 매우 이기적인 마음이며 상대가 원하지 않는 배려는 퇴색된 의미의 배려이며 부담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배려를 고맙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의미 없는 배려였다는 것을.
거절을 당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것은 명확히 전달해야 하며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쿨하게 떠나면 된다는 것을. 어느 순간부터 상처받을 용기가 생겼고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사라졌다.
이렇게 마음을 먹은 순간 성공하지 못한 연애도 예전만큼 괴롭지가 않았다. 서로 원하는 바가 달랐던 사람들이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까지 양보할 필요는 없으며 해피 엔딩이 아니게 된 이유가 나에게 있다는 자책감도 줄어들었다.
결핍을 완전히 해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스스로 인정하기 싫고 드러내기 싫은 내 안의 결핍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절반 이상을 해소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을 회피하고 마주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도 너무나도 많기에 내 안의 못난 부분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대단한 일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내 안의 결핍을 발견했을 때 그리고 그걸 극복하고 싶을 때 이를 타인이 아닌 나 스스로 채워나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해소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영상 감독 일을 하는 친구와 만났을 때의 일이다. 어릴 적부터 예술과 창작에 대한 동경이 있던 나는 그 친구에게서 일종의 후광 효과를 느꼈다. 물론 인간적으로 멋있는 사람이었지만 내 안의 이루지 못한 꿈을 그 상대는 이루었기에 그를 통해 내 안의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무의식이 작동했던 듯하다.
상대로 인해 내가 상처받는 일이 생겨도 그의 꿈을 응원함으로써 창작에 대한 나의 결핍을 채우려는 것 마냥 나의 마음을 돌보지 않았다. 이런 경험을 통해 지금은 스스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들며 세상에 공유하는 창작 활동을 하면서 나의 결핍을 오롯이 내 힘으로 채워나가고 있다.
결핍이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나 또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스스로 해소할 수 있는 힘을 키워나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두가 내 안의 결핍을 잘 보듬어주고 채워나갈 수 있는 힘을 함께 길러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