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혁의 파노라마
어제 아침에 남편이 일할 게 있어서 영월로 가겠다고 했다. 혼자 원주집에서 빈둥거리느니 백담사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풍철 주말에는 백담사에 가본 적이 없었다. 뉴스에서는 설악산 단풍이 10월 20일 경이라고 했으니 단풍인파가 아래쪽으로 내려갔을 거라 생각했다. 두시쯤 갔는데도 백담사로 올라가는 셔틀을 타려고 줄 선 사람들이 많았다.
백담사 주차장 지나 다리를 건너면서부터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경치는 단풍 유무와 관계없이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올해는 단풍이 예전만큼 화려하지는 않으며 지구온난화가 가속화된다면 앞으로 우리는 예전의 단풍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들은적이 있다. 가을이 점점 짧아져 여름 지나 바로 겨울이 올지도 모른다고도 한다. 옛날에는 가을 단풍지도를 따라가며 단풍놀이(나는 해본 적은 없지만)를 다닌 적이 있었지, 이렇게 말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니. 이런 생각을 하니 씁쓸해지면서도 이 정도의 단풍도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백담사에서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에 차라리 걸어 내려오겠다 생각한 듯한(백담사에 가보니 셔틀버스 탑승장부터 다리 건너 백담사 해우소 앞까지 줄이 서있는 걸 보니 짐작이 맞았다) 사람들이 줄지어 내려오고 있었다. 셔틀버스가 다니는 도로 옆 데크 산책로가 어느 지점부터 끊겨 있었다. 데크길이 설치되지 않은 곳을 지날 때는 버스가 오면 난간에 바짝 붙어서 계곡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오십 센티도 떨어지지 않은 정도의 거리에 셔틀버스가 휘청하며(굽은 길이 많아서)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갔다. 일방통행 도로를 오가는 셔틀버스들끼리 약속한 시간에 맞춰야 두대가 교행 할 수 있는 구간에서 만날 수 있다는 건 알겠는데 버스 속도가 너무 빨랐다.
셔틀버스를 탄 사람들도 계곡 경치 구경하게 좀 더 천천히 운전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중간에 끊긴 산책길을 이어서 사람들이 안전하게 걸어 다닐 수 있게 만드는 일이 시급해 보였다. 걷는 사람 입장에서는 차가 너무 빠른 속도로 자주 지나갔다. 이러다 차에 치여 죽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러다 갑자기 '이렇게 죽을 순 없어'라는 이찬혁의 '파노라마' 노래 후렴구가 떠올랐다.
이번달에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이 발표된 후 한강 작가 관련 추천 영상에서 작가가 택시를 타고 가다가 악뮤의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라는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는 영상을 보고 그 노래를 검색해서 들은 적이 있다. 그 후부터 종종 유튜브는 나에게 악뮤 노래를 추천해 주었다. 그러다 이찬혁의 '파노라마' 라는 노래를 들었다. 노래 전체를 다 듣지는 않았고 쇼츠로 하이라이트 부분만 몇 번 들었다. 신나는 멜로디에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버킷리스트 다해 봐야 해'라는 클라이맥스가 귀에 쏙 들어왔다. 실패한 사람이 다시 일어나겠다는 의지를 담은 노래일 거라 생각했다.
몇 달 전 둘째 딸이 친구와 악뮤 콘서트에 다녀왔는데 게스트가 아이유였다는 소식을 전하며 악뮤의 노래 중 인공잔디, 물만난 물고기, 사소한 것에서, FREEDOM을 들어보라고 했다. 그중에 인공잔디와 물만난 물고기만 한 번씩 들었다. 감각적인 멜로디도 좋았지만 전체적으로 가사가 좋았다. 가사가 좋네, 라고 딸에게 답을 했었다. 갑자기 악뮤 콘서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담사에서 내려오는 길에 둘째 딸에게 전화해서 악뮤 콘서트 하면 엄마표도 같이 끊어 달라고 했다.
백담사까지 왕복 14km를 3시간 넘게 걸었더니 식욕이 돋았다. 콩밥에 무나물 무침과 소고기볶음고추장을 넣어 비볐다. 핸드폰으로는 이찬혁의 파노라마 뮤직비디오를 검색해서 틀었다. 집중하지 않고 들어서인지 가사도 귀에 잘 안 들어오고 뮤직비디오 내용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가사만 나오는 노래를 찾아서 들었다. 1절에서 사망선고라는 단어가 나왔다. 비빔밥을 숟가락 가득 퍼서 입에 넣으며 이 경쾌한 노래가 진짜 죽음의 순간을 노래한 건가, 생각했다.
노래 리듬에 맞춰 비빔밥을 신나게 먹던 중이었다. 1절이 끝나고 2절이 시작될 때 갑자기 눈물이 왈칵쏟아졌다.
난 분명 걷고 있었는데
마지막 기억이
한마디 뱉어야 하는데
심장이 점점 굳어가고
뒤집어엎는 가족들 왠지
이 코믹 같은 상황이 받아들여지네
라는 가사가 흘러가는데 이태원참사가 떠올랐다. 그러다가 한강다리 위를 지나다가,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다가,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배를 타고 가다가, 걷다가... 그 순간이 마지막일지 몰랐을 사람들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혼자 울면서 비빔밥을 먹었다. 밥을 다 먹은 후에도 눈물이 나왔다. 가족 단톡방에 '저녁 먹으며 이찬혁 파노라마 가사 보면서 노래 듣다가 울었네 멜로디는 신났는데 슬픈 노래였다니'라는 글을 남겼더니 첫째 딸이 바로 답장을 했다.
"울지 말고 무병장수"
가볍지 않은 노래 한 곡이 비빔밥 먹던 오십대 중반의 한 사람을 울리고 단 8글자의 카톡이 울던 사람을 웃게 만든 저녁이었다.
어느새 내일이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이태원참사 이 주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