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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May 11. 2024

쓴 것이 다하면 오는

등산 일기 2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는 사자성어, ‘고진감래’. 국어의 음운 현상 중에 하나인 ‘ㄹ의 비음화’로 인하여 감래는 [감내]로 발음된다. 고진감내. ‘감내’란 어려움을 참고 버티어 이겨 낸다는 의미인데, 어째 쓴 것은 다할 기미도 없고 감내할 일만 많은 요즘이다. 단 것은 대체 언제, 어떻게 온다는 것일까. 허울 좋은 말뿐인 것만 같다.



산에서만큼은 고생 끝에 정말 낙이 찾아온다. 우중산행으로 백록담은 구경도 못한 채 터덜거리며 내려오던 바로 그날. 온몸은 땀인지 빗물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축축했고, 입 안에서는 비릿한 쓴맛까지 느껴졌다. 대피소 인파로 인해 끼니도 거른 채 쫓기듯 하산한 탓이다. 그렇게 왕복 9시간이 걸렸던 20km의 한라산 완등은 나에게 한 장의 인증서와 함께 달콤한 성취감을 남겼다. 그때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 정상까지는 2가지 길이 있다. 상대적으로 쉬운 성판악 코스와 수려한 경치만큼 힘든 관음사 코스. 내가 다녀온 성판악 코스는 대체로 완만한 길이라 급격한 체력 소모는 없지만, 몸과 마음의 지구력이 필요하다. 답답한 마스크와 함께 내내 쏟아지던 비 그리고 원망스러운 바람까지. 이 모든 것을 견뎌냈던 한라산은 나에게 또 한 번 도전하고 싶은 곳이다.



산은 참 신기하다. 살면서 고단함을 알면서도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렇다 할 경치도 없는 등로를 묵묵히 걸어내었던 한라산에서의 기억처럼. 앞다투어 정상으로 올라가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말이다. 온전히 내 호흡과 페이스에만 집중했던 그 느낌이 필요해지는 순간은 불현듯 찾아온다. 산에는 분명 답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시 오를 엄두조차 나지 않는 곳이 있다. 그나마 지구력은 자신 있는 내가 중간에 포기할 뻔했던 유일한 산, 바로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치악산이다. 비로봉을 주봉으로 하는 치악산은 고도 1,288m의 높이와 더불어 산세가 험하기로 유명하다. 코스 중에서도 최고난도를 자랑하는 사다리병창길을 택한 나와 일행은 말등바위 전망대를 지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사다리병창길에서만 만날 수 있는 광경이니까.



사다리병창길 입구에는 새빨간 글씨(색깔부터 심상치 않다)로 ‘탐방구간 매우 어려움’이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아니나 다를까 입구를 지나자마자 계단이 보인다. ‘사다리를 세워놓은 것처럼 생긴 벼랑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가파른 계단길은 한참을 계속되었다. 말등바위 전망대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체력은 정상을 앞에 두고 무너지고 만다. 기력이 너무 떨어진 나는 털썩 주저앉아 김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 포기했더라면 나에게는 비로봉의 장관도 내려와서 먹었던 뜨끈한 국밥도 없었을 터였다. 내가 가을로 물든 첩첩산중을 물끄러미 바라볼 동안 일행은 텀블러에 담아 온 뜨거운 물로 컵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정상의 한 귀퉁이에서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먹는 컵라면이야말로 백팩의 무게를 이겨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소소한 행복. 거친 숨결이 잦아들 때쯤 찾아드는 이 행복이야말로 건강한 고진감래가 아닐까.



말등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가을로 물든 치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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