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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경 Dec 31. 2023

2023년 마지막 날

하루일글

   며칠 전 언젠가 메모 앱에 이렇게 적어놓았습니다.

적당히 힘들고 적당히 기쁘고 적당히 재밌었다 이건 어쩌면
애매하게 힘들고 애매하게 기쁘고 애매하게 힘들었다는 말과도 같겠다.


   지난 2023년을 돌아보는 문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생각해 보니 적당히 힘들고, 적당히 기쁘고, 적당히 재밌었다는 건 모든 일이 지난 이후-감정이 다독여진 다음에 보는 시선이었지요. 곰곰히 생각해 보면 힘들었을 때는 신이 나를 외면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기뻤을 때는 그 좋은 감정을 순수하게 느낄 수 있어서 많이 행복했습니다.


   하루일글을 되돌이켜보면서 2023년 초에 참 많이 힘들었구나 싶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나는 그 신의 외면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갑상선염과 심한 알레르기가 동시에 찾아온 데다 다리에 힘이 떨어져 예전 병이 다시 찾아온 건 아닐까 불안해 하기도 했고요. 신체가 망가지니 정신력도 약해져 세상이 회빛으로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그 시기를 견딜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기쁨 때문이었습니다. 수영 할 때의 마음, 조카에 대한 사랑, 부모를 보게 되는 마음, 글을 쓸 때의 경건함, 일이 들어온다는 자신감…이런 것들에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오로지 기쁨 하나만 느껴지는 순간 덕에 회빛 현실에 색을 조금씩 더했습니다. 짧은 기쁨의 순간을 힘든 마음에 섞어 희석할 수 있었지요. 그래서 ‘적당히’라는 단어 대신에 ‘애매하게’라는 말을 붙여도 어색하지가 않네요.


   현실의 소용돌이에 걸터앉아 시간이 흐르는 속도를 바라보다 어느새 2023년 마지막 날에 다다랐습니다. 소용돌이 귀퉁이에 걸터앉아있으니 시간은 예전보다도 더 빠르게 흐르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 결국 2023년 마지막 날에서야 정신을 차렸네요. 하루라는 시간은 휘몰아친 시간을 가늠하기엔 부족하지요. 그래서 2023년이 세세하게 기억나질 않고, 그저 한 해가 뭉텅이로 과거에 쌓인 느낌만 납니다.


   2024년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어떤 감정이 저를 덮칠지 모르겠습니다. 예상할 수 없어 불안하다가도, 이미 힘들어 봤던 경력 덕에 ‘그냥 견뎌내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덤덤해집니다. 다만, 조금 더 특별한-적당하지 않고 애매하지 않은 일들로 순수한 감정을 더 명확하게, 더 크게 느끼고는 싶습니다. 2023년에 기쁨의 순수를 맛보았다면 2024년에는 기쁨의 순수함을 만끽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순수한 감정의 순간이 떠오르길 바라겠습니다.


   2023년 하루일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신다면, 제 영감이 여러분의 삶 속 기억할만 한 순간을 떠올리게 할 수 있도록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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