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 trainer May 23. 2024

하나인 해가 사는 곳에 따라

오후부터 덮인 먹구름이 한껏 위세를 자랑하자 기다리다 지친 달은 잠자리에 들고 가로등이 홀로 주위를 밝히는 새벽이었다. 그러던 이른 아침 하늘이 무슨 일 있었느냐는 듯 홀연히 구름을 걷어내고 찬란한 일출을 선물한다. 모두들 황홀한 광경을 담기 위해 셔터를 눌러대는데  눈에선 눈물이 떨어졌다. 말기 암으로 고생하다 얼마 전 창가로 보이는 일출을 보며 일몰이 아름답다란 말을 남기고 떠난 S형 생각이 떠올라서다. 젊었을 지역 공동체를 위한 봉사모임 세미나에서 만나 알게 된 S형은 내가 예전에 올렸던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글에 소개하고 싶던 사람이다.


공공기관에서 기획 업무를 담당하는 형은 맡은 일에 모범을 보임으로 구성원들을 좋은 길로 이끄는 훌륭한 리더였고, 내가 갖지 못한 좋은 점들을 습관으로 지닌 닮고 싶은 선배였다. 실천보다 말이 앞서고 남의 말을 들어주기보다 자신의 말을 많이 하던 나와는 달리, 그는 타인의 말을 잘 경청하고 의견을 잘 받아들였으며 행동으로 묵묵히 자신의 말을 증명하였다. 나와 겨우 3살 차이 밖에 나지 않는데, 그는 대체 어떤 훈련을 거치며 어떤 삶을 살아왔길래 단계에 이른 것일까? 그를 본보기 삼아 말반줄 듣배늘(말은 반으로 줄이고 듣기를 배로 늘린다) 훈련을 시작했다.

형은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성장기를 외롭게 보냈다 한다. 그래서인지 결혼 후엔 모임도 많이 줄이며 가족을 위해 헌신했다. 가정에 무척 충실하던 그가 세월이 지나 어린 남매를 두고 이혼했단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는 많이 놀랐다. 더욱이 그 사유가 자신의 불륜 때문이란 얘기에 난 충격을 받았다. 그는 대부분의 재산과 양육권을 부인에게 넘긴 후 홀로 살면서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의무를 다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엄마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아빠를 잘 만나주지 않았고 나중엔 전화도 받지 않았다.


형과 난 있는 그대로 서로를 이해하며 속 얘기를 나누는 사이였지만 그의 불륜에 대해서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여자에 대해 물었으나 형은 침묵으로 일관했고 이리저리 파악해도 그런 정황이나 실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형을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지만 그는 여자와 거리를 둔 채 살아왔다. 내가 뒤늦게 시작한 공부에 매달려 정신없이 살던 어느 날, 형이 만나자고 하여 나갔는데 모습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 무슨 일이 있는 듯했다. 그날따라 술을 마시지 않던 형이 술도 마셨다. 얼마 후 얼큰하게 취한 형이 내게 말했다. 1달 전부터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가 여러 검사를 했는데 대장암 4기란다.


수술하지 않기로 했단 그의 말에 나는 포기하지 말 입원하여 빨리 치료받자고 했다. 그리고 그토록 아끼는 아이들과 형이 꼭꼭 숨겨둔 그 여자에게 알리라고 했다. 그러자 형이 그 여자는 없다고 쓸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실은 아내바람이 났는데, 자기는 가정을 지키려고 그만 멈추라고 부탁했단다. 하지만 아내가 계속 이혼을 요구하여 헤어지게 됐는데, 아이들이 어려 자기보다는 엄마 품에서 자라는 게 나을 것 같았단다. 그러려면 엄마를 나쁜 존재로 만들어선 안되기에, 자신이 바람피운 것으로 했다 한다.

몇몇 사람의 강권에 밀려 부분 수술은 했지만, 형은 추후 치료 등은 받지 않고 되어가는 대로 삶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내가 형에게 정신이 온전할 때 아이들에게 연락해 한 번 만나고 그간 숨겨왔던 사실을 말해야 되지 않겠냐고 거듭 권했지만 형은 끝내 그냥 자신이 안고 가겠다며 내게 비밀을 지켜달라고 했다. 형은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고 화장되어 그가 태어난 고향 앞바다에 뿌려졌다. 우리 세상 빛을 위해 오래 곁에 두고 싶었던 참 아까운 사람 ㅅㅇㅌ, 그의 나이 56살이었다.

내게 비밀로 해달라던 형의 부탁을 나는 그가 살아있을 때 지켰다. 하지만 그가 떠난 지금은 이렇게라도 글을 남겨 말을 하련다. 훗날 우연히라도 그의 자녀들이 이 글을 보고 자신들이 외면했던 아빠가 사실은 누군가 존경하고 따르는 참 좋은 사람이었단 사실과 숨겨진 진실에 대해 알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헤어진 후 한때 사랑했던 사람의 허물 자랑하듯 말하는 요즘 세상에, 사랑했기에 그 사람의 큰 허물을 끝까지 덮어주며 살다 간 멋진 사람 S형의 넋을 기린다.

하나인 해가 사는 곳에 따라 어떤 이들에겐 일출이고 동시에 다른 이들에게는 일몰이다. 또한 같은 곳에 살더라도 일출이 처한 상황에 따라 누군가에겐 일몰이 되기도 한다. 생과 사, 일출과 일몰, 모두 시간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연결체다. 눈부시게 감동인 상황이 누군가에게는 애잔한 슬픔이 되고, 눈으로 보이는 것들 이면에 수많은 사연 담겨 있는 우리 임을 배운다. 살아오며 난 오래 같이 하고 던 좋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일찍 떠나보냈다. 그래서 이제 힘들 때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다. 책이라는 좋은 친구가 있지만 사람 냄새가 그리운 요즘이다. 다가오는 주말엔 그가 뿌려졌다는 바닷가에 다녀와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나를 눈 뜨게 한 선생님의 선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