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인가 내가 큰 아이를 낳고 전주 엄마 집에 갔을 때의 일이다. 엄마랑 거실에서 「엄마가 뿔났다」라는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그 드라마는 30년 넘게 시부모 봉양에 자식과 남편을 건사하는 60대 여성(김혜자)이 원룸을 얻어 나와 1년간 혼자 살기를 선언하는 여성 해방운동을 내세운 가부장적 드라마였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엄마역의 김혜자가(존칭생략) 느지막이 일어나 꽃병에 장미꽃 한 송이를 꽂아둔 작은 식탁에서 라면을 끓여 먹으며 책을 읽는 장면이었다.
그때 나는 이제 두 돌이 지난 큰 아이 육아로 지쳐있었고 둘째를 임신하고 있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간절했던 나는 집에서 나와 혼자 살겠노라 선언한 김혜자가 너무나 이해가 되었다. 내가 엄마한테 나도 나중에 저 드라마처럼 혼자 살아보고 싶다 얘기했더니, 엄마는 김혜자가 도통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엄마는 나중에 우리 삼 남매 근처에 살면서 밥 해주면서 사는 게 꿈이라고 했다.
내가 학교다닐 때 엄마는 매일 아침 다섯 시 반에 일어나 서둘러 아침 준비를 했다. 급식도 없던 때라 삼 남매 점심 저녁 도시락을 싸려면 쌀 다섯 공기로 10인분 밥을 해대고, 메추리알조림, 계란말이, 오징어채무침 등의 도시락 반찬도 하루 걸러 한 번씩 만들어야 삼 남매 뱃속으로 사라진 음식을 겨우 메꿔낼 수 있었다. 엄마는 밥을 하기 싫어 귀찮고 입맛 없는 날에도 집에 있는 식구들 먹이려고 겨울엔 소고기뭇국을 끓이고 여름엔 백숙을 고아댔다.
엄마는 꽃을 좋아했지만 장미꽃 한 송이조차 자기를 위해 사는 건
사치스러워 만날천날 길가에 꽃만 보면 ‘이쁘다. 이쁘다.’ 했다.
소설책을 좋아했지만 읽을 시간이 없었다.
결혼 전엔 다섯 남매의 큰 딸로 동생들을 진안에서 전주로 데려와 학교 보내고 뒷바라지하느라 스물아홉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 결혼 후에는 '마누라한테 월급봉투 가져다 바치는 바보천치'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 아빠 때문에 오빠를 낳고부터 또다시 일을 시작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자식 셋 서울에 있는 대학 보내느라 엄마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옷장사를 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만 원권을 열 장씩 묶어 만든 백만 원을 복대에 차고
저녁장사가 끝나면 곧장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갔다.
동대문 새벽시장에 가서 옷을 떼와 정리하고
그날은 가게에서 쪽잠을 자며 옷을 팔았다.
그렇게 고생하며 자식들을 키웠는데 60살이 넘어서도 자식들 건사하는 게 소원이라니,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7~8년 전쯤 늦깎이 약대를 졸업한 오빠가 하남에 약국을 열었다.
"엄마도 하남으로 이사해. 이제 전주에서 일도 안 하잖아."
"싫어. 거기는 물가가 비싸잖아. 한 달에 한 번 쥐띠 계모임도 있고."
"엄마, 계모임 있으면 버스 타고 한 번씩 갔다 오면 되고, 하남에도 시장도 있고 큰 마트도 있어서 싸. 그리고 엄마랑 아빠랑 전주에 있으면 자식들 일 년에 4번밖에 못 봐. 명절, 어버이날, 엄마, 아빠 생신."
삼 남매의 성화에 엄마는 자의 반 타의 반 하남으로 거처를 옮겼다. 맏딸인 언니의 주도하에 착한 막내 이모를 오빠 약국에 일자리를 마련하고 엄마 집 근처로 이사를 시켰다. 그때만 해도 오빠가 결혼 전이라 엄마는 오빠 밥해주고, 내가 나주에서 근무할 때라 일주일에 한 번 잠실 사는 우리 집에 와서 우리 애들도 봐주곤 했다. 엄마는 그럭저럭 하남 신도시에 적응을 해갔다.
이제 오빠도 결혼해서 나가고, 우리 애들도 크고 나도 서울로 올라와 엄마가 우리 집에 올 일도 없어졌다. 엄마의 할 일이 없어졌다. 엄마는 전화도 잘 안 받는 차가운 막내 딸년에게 가끔 전화를 한다.
"윤정아, 깍두기 담아놨으니까 가져가."
"지난번에 준 것도 아직 다 안 먹었어. 다음에 가지러 갈게."
자식들 근처에 살며 밥 해주는 게 소원이었던 엄마의 꿈은 절반은 성공 절반은 실패다.
나는 오늘 아침 학교 가는 열일곱 서연이의 입에 김에 싼 밥을 하나라도 더 넣으려고 발을 동동 구르며 엄마의 꿈에 무언의 동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