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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초태양반오로라 Feb 13. 2024

‘나’ 편한 생활

내 소개

 모처럼 늦잠을 잤다. 계속 누워있으면 반나절이 다 지날까 싶어 잠이 덜 깬 채로 몸을 일으켰다. 거실로 나와 창밖을 보니 비가 보슬보슬 내린다. 창에 어렴풋이 비친 헝클어진 머리와 무릎 나온 수면바지에서 옛날 나의 아버지 모습이 겹쳐 보인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나는 고등학교 졸업을 하자마자 일을 했다.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내 형편에 대학은 꿈도 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학에 들어간 친구들은 대학에 못 간 나를 안쓰럽게 보면서도 나와 만나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녀들은 대학에 못 들어간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그녀들의 대학생활을 나와 공유하고 싶어 했다.

  그녀들의 얘기를 들으면 세상 별천지가 바로 대학이었다. 듣고 싶은 수업을 본인 스스로 신청했다는 말에 한 번 놀라고(고등학교에서는 시간표가 정해져 있지 않은가?) 신청한 강의실이 어디인지 몰라 한참 헤맸다는 말에 두 번 놀랐다.(학교가 얼마나 크면 헤매는지 말이다.) 게다가 자유로운 동아리활동과 학교 식당 밥은 양이 많지만 맛이 없어서 다 버렸다는 이야기들은 나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대학 얘기 그만하자고 하면 잠시 그만했다가 도돌이표처럼 또 대학얘기로 돌아가는 건 당연했다. 마치 아기 엄마들이 주야장천 육아얘기만 하고 있을 때 결혼 안 한 친구가 계속 육아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것처럼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에 점점 짜증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꽃보다 예쁜 소녀들이 그 당시 얼마나 자랑하고 싶고 행복했을까 싶다.

 하여튼 그녀들의 대학생활을 들으며 나는 나대로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을 위안 삼았다. 그렇게라도 해야 질투하지 않고 그녀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돈을 벌면서도 계속 ‘나는 언젠가 대학을 갈 거야.’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들이 차곡차곡 쌓이자 대학공부를 위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때는 시급으로 돈을 받아서 돈이 쉽게 모이지 않았다. 결국 1년 넘게 일을 하고 380만 원을 모아 노량진에 있는 고시원을 구했다.  

 코리아에듀(내가 다닐 입시학원, 지금은 없어졌다.)와 거리가 꽤 멀고 창문이 없는 방이었지만 방값이 저렴해 선택했다.

 장점도 있었다. 한 달에 방값으로 15만 원을 내면 공용식당의 대형밥솥에 있는 밥과 냉장고에 있는 단무지가 무한 제공이었다.

 고시원에서 입시학원까지 걸어가는 데는 20분 정도가 걸렸다. 새벽 5시! 알람을 맞추고 일어나서 고시원 공용 샤워실에서 대충 씻었다. 샤워실이 좁고 불편해 대충 씻는 것이 오히려 이득이다.  

 6시에 첫 수업이라 아침밥을 먹을 시간이 없어 씻고 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문제집 사이에 끼워 둔 얼마의 돈에서 만원을 빼서 고시원을 나왔다.   

 노량진 새벽 공기의 그 특유의 분위기와 냄새에 괜히 힘이 나고 삶에 대한 열정을 느꼈던 때가 가끔 생각난다. 그때 분명 나는 새벽공기 덕분에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학원 옆에 있는 슈퍼에서 550 원하는 옥수수 빵을 사고 9,450원의 거스름돈을 야무지게 받아 챙겨서 학원으로 향했다.

 1층에서 수강증 검사하시는 아저씨에게 수강증을 보여드려야 2층의 수업하는 교실에 들어갈 수 있다. 2층으로 올라가서 교실 맨 앞자리에 가방을 올려놓고 복도에 있는 자판기에서 250원 하는 밀크커피를 뽑아 교실로 돌아온다. 빈 속에 커피를 마시면 잠이 깨고 뇌가 각성되는 느낌이다. 그때의 습관이 나이 40이 넘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 지금도 나는 아침을 거르고 커피를 마신다. 비록 지금은 밀크커피에서 아메리카노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6시 수업이 끝나면 아까 샀던 옥수수빵으로 배고픔을 해결했다.

 그 당시 내가 제일 부러워했던 사람은 수업 시간에 편의점 컵커피를 사 와서 책상 위에 놓고 먹는 아이들이었다. 어느 날, 나도 편의점에서 컵커피를 사 먹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 편의점에 들어갔다. 그런데 한 개에 800원에서 900원 하는 커피가격에 놀라 못 사고 그냥 나왔다. 그리고 그 덕에 컵커피를 사 먹는 친구들이 더욱 부러워졌음은 두 말하면 잔소리다.

 6시 수업이 끝나면 12시까지 학원의 빈 교실에서 공부를 했다. 일단 1층으로 내려가면 다음 수업(9시, 10시, 11시) 수강증이 있어야 올라올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학원 빈 교실을 활용했다.

 12시에 학원을 나와 고시원에 도착하면 공용거실로 가서 밥솥에 있는 밥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가끔 별식으로 짜장라면을 먹기도 하고 영양 보충한다고 참치 캔에 있는 기름과 참치를 밥에 넣어 고추장과 같이 비벼 먹었다.(진짜 꿀맛이었다.)

  지금은 편의점보다 더 비싼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밥 값보다 비싼 커피를 사서 마시고 슈퍼보다 화려한 베이글 가게에서 빵을 사 먹곤 하지만 그 시절이 생각날 때가 있다.

 치열하게 살았지만 남의 눈치 안 보고 나만 생각하면 되었던 시절이었다. 내 공부, 내 고시원 방값, 내 학원비 등 그날그날 최선을 다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직장생활, 대인관계로 스트레스받고 상처를 받는다. 가족, 시댁의 일로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남들 다한다는 부동산과 재테크에 다 실패하여 그때보다 마음고생이 심하다.

 그때는 물론 맛있는 것도 못 사 먹고 영화도 보러 못 다니고 백화점 문 구경도 못 했지만 나름 운치 있는 가난이었다. 가난했지만 나 자신을 존중했기 때문에 남들의 말에 상처받지 않았고 가난했지만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현재의 나는 마흔 살이 넘었고 교사를 하며 아이를 키우고 있는 평범한 여자사람이지만 더 좋은 집, 더 비싼 차를 가지고 싶어 몸부림을 치는 속물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 했던 고생이 그동안 나를 더 단단하고 겸손하게 만들었는데 얼마 동안 그 단단함과 겸손을 잊고 살았다. 주말에 내 청춘을 바쳤던 노량진 그 고시원 골목에 가서 그날의 나를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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