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세계 / 이아손과 메데이아 / 필로멜라와 프로크네
자유분방한 여인이 있다. 이름하야 자유부인 !
소설가 정비석이 1954년 정초 서울신문에 게재, 큰 반향을 일으킨다. 종전 직후니 그간 참고 미루던 사랑을 미친 듯 발산하고 싶었던 탓일까. 하튼 흥분할 대로 흥분한 도파민덩이는 포탄으로 쑥대밭 된 삼천리강산을 다시금 휩쓸고 만다. 사랑의 저변엔 그런 게 있지 않던가. 본성으로 꽉 찬, 참을 수 없는, 뭐 그런. 어쨌거나 '부부간의 거시기한 야그' 하려는 게 아니니, 요건 요쯤에서 마치고.
부부의 세계
얼마 전 '공전의 히트' 곧 이전에 없던 대박을 친 드라마다. 제목부터 벌써 삼삼하지 않은가. 기혼세대는 호기심에 죄다들 모여들었을 테다. 비공중파 최고 시청률을 따낸 JTBC 방송 드라마 스카이 캐슬의 기록을 깨고 대한민국 부부들의 밤잠을 설치게 했다는 '썰'이 나돈다. 불륜드라마는 흥행에서 실패하지 않는다. 이른바 불륜불패설. 불륜이 한반도 남쪽을 지배하는 요즘, 아마도 그들 입맛에 딱 맞게 제작했으리라. 결혼 생활 30년 넘은 필자에게는 원 별것도 아니구만서도. 남 부부 이야기에는 왠지 something special 뭔가가 있다는 확신으로 우리는 '씨잘데기없이' 눈과 귀를 풀 가동한다, 밤을 새며 말이지.
필자는 '부부의 원초적 세계'를 말하려 함이 아니고, 드라마 중 관심의 그물에 걸린 장면이 있어 여기까지 이야기가 이어져왔음을 먼저 설한다. 전설 따라 삼천 년 제1편에서 거론한 '메데이아의 복수' 그 이야기를 마저 쫑내야 하기, 부득 현대판 이야기 중 부부의 세계를 끌어온 게다. 지방방송은 다 끄고, 하고자 하는 내용으로 들어가겠다.
바람난 남편을 응징하는 가장 철저한 복수.
아내는 그에 대한 직접적 가해보단 그가 살아가며 죽을 때까지 떠안을 처절한 고통이 뭘까 곰곰 생각한다. 다름 아닌, 그와의 사이에 태어난 자식을 죽여버리는 것. 평생 자식 잃은 지옥 속에서 살게 될 소감이 어떠냐, 널 고통스럽게 할 수만 있다면 난 뭐든 할 수 있다는 둥, 남편에게 하나뿐인 아들이 죽어 없어졌음을 암시한다. 극중에는 아무리 봐도 아들이 죽었다거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장면은 없고 단지 암시하는 장면만 나온다. 나머지는 시청자가 알아서 판단해라 뭐 그런 거겠다.
말하자면 아내의 심적 고통, 부부의 파국이 결국 자식에게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 그런 걸 보여주려는 드라마다. 아이 앞에서 부부싸움 하지 말든가, 하려면 잘 하란 말씀이시다, 이 말이다. 부부간 갈등으로 인해 자식을 잃은, 심리적으로 죽인 거나 다름 없는, 거기서부터 파생하는 여성 심리극으로 보면 되겠다. 나중에 아들이 등장하면서 다 정리된다. 고롬 이 야그는 어데서 온 걸까나.
프로크네와 필로멜라
여인의 침묵과 억압을 소재로, 저항을 주제로 인문학사에서 자주 거론하는 자매가 있다.
옛날옛적, 고대도시 아테네의 공주 프로크네가 트라키아 왕 테레우스에게 시집갔고, 시댁에 살다보니 친정여동생 필로멜라가 보고 싶어 남편에게 좀 데려오라 부탁했더만, 아 글쎄 이 양반, 처제를 데려오다 그 아름다움에 욕정이 땡겨 강간하는 사건이 생기네그려. 혹여 냉중에 언니에게 고자질하면 큰일이라 아예 동생 혀를 자르고 외딴 곳에 가두는데....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더냐.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라, 필로멜라는 베를 짜 사건의 전말을 그림으로 수놓아 하녀를 시켜 언니에게 보내니, 언니는 진실을 알고 분노에 빠지더라.
어떤 복수를 하는 게 가장 고통스러울까 고민하던 자매, 으아 두 사람 사이에 난 아들 이티스를 잡아죽이기로 결심하네. 아, 무섭도다 무섭고 무섭어라. 그 아이 인육을 고기로 만들어 애비 테레우스에게 먹인 후, 아들 찾는 테레우스에게, "아들은 니 뱃속에 있다 이눔아" 하니, 테레우스도 광분하더라. 테레우스가 두 자매를 죽이려 칼 들고 설치자, 이 광경을 공중에서 지켜보던 신들도 너무 무서운 막장은 아니란 생각에 세 사람을 새로 변신시켜 버리는데...
자매는 나이팅게일과 꾀꼬리로, 웬수 테레우스는 후투티로 변신하지 않았는가. 후투티 머리 위에 칼처럼 날카로운 이유도 이래서라나. 그후부터 시인에겐 나이팅게일의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자매의 고통으로 연상하는 전통이 생겼더라. 아, 슬프고 슬프도다.
자자, 진정하고. 이도 어디까지나 극단적 복수와 정의라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적 감정을 극대화하는 전형적 수법이다. 그나저나 후투티가 진짜 테레우스였을까. 뭔 누명을 뒤집어쓰고...
* 테리우스 : 70년대 만화 '들장미 소녀 캔디' 남자 주인공. 잘생긴 장발 미남을 지칭할 때 흔히 사용한다. 테레우스가 아니다. 미노스 섬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무찌른 테세우스도 있다.
* 계문강목과속종 / 나이팅게일은 참새목 딱새과로 분류. 참새 밤꾀꼬리 휘파람새와 유사
이아손과 메데이아
고대 그리스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에 의해 자식을 죽여 복수하는 이야기가 있으니. 한 남자에게 반해 그를 왕으로 등극시키려 제 가족과 조국을 등진 여인, 메데이아. '라이온킹'처럼 삼촌에게 왕위를 빼앗겨, 왕위를 되찾기 위해 처절한 여행을 떠나는 왕자, 이아손. 이들의 스토리가 그거다.
왕권을 거머 쥔, 선왕의 이복동생 펠리아스Πελίας. 왕위계승자인 조카 이아손에게 왕위를 돌려주지 않으려 무지막지한 모험을 다녀오게 한다, 거기 가서 죽으라고. 이리하야 아르고호 원정대가 출항하고 여기에 헤라클레스와 *펠레우스Πηλεύς도 동참한다. 이탈리아 사람 콜롬부스와 포루투갈 사람 마젤란이 대항해시대를 맞이할 때, 바로 아르고호의 모험을 머릿속에 넣고 떠났으리라.
이아손이 왕위를 돌려받으려면 황금양피를 가져와야 한다니, 이 말을 들은 연인 메데이아는 온갖 수를 써 양피를 얻도록 남편을 돕는다. 추적하는 아버지의 군인들을 따돌리려 데리고 온 남동생을 죽여 토막내 바다에 버린다. 전개과정이 살벌하다. 이것도 사랑의 범주에 드는가. 어쨌거나 조국을 배반하며 한 남자를 왕으로 만들었으나 남자란 틈만 나면 울타리 밖을 넘으려는 동물이더라.
양피를 구하고 돌아오는 여정은 신기하게도 오디세우스의 귀향 항로와 많이 겹친다. 헬라인들이 개척한 바다 중 험난하기로 유명한 곳은 뻔할 테니까. 이차저차 돌아와 자식 낳고 잘 사나 싶더니만, 메데이아와 생고생한 건 까마득히 잊고, 이아손은 이제 새로운 욕망을 갈구한다. 이웃나라 왕 크레온이 자기 딸 글라우케와 결혼하라는 제안에 헤까닥, 젊은것과 놀아나는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권태기였을까 악행만 저지르는 메데이아에게 싫증난 탓일까.
순순히 있을 메데이아가 아니렷다. 젊고 아름다운 새신부에게 입힐 선물이라며 마법에 물든 예복을 선사한다. 글라우케는 고통스레 죽는다. 여기까진 뭐 바람난 남편에게 흔히들 할 수 있는 질투 정도로 봐준다. 이아손을 망가뜨리려 혈안이 된 메데이아는 고통의 궁극이 뭔지를 구상한다. 그를 죽이기보단 살아서 죽는 날까지 느껴야 할 고통의 맥시멈, 곧 자식을 죽이는 일임을 확정한다. 이게 말이나 될 법한 상상인가. 하튼 메데이아는 동생살해도 모자라, 이아손이 끔직히 애끼던 두 아들을 무심히 죽여버린다, 뭐 무심하진 않았겠지만서도.
* 펠리아스 말고 펠레우스 :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결혼, 아킬레우스를 낳는다.
메데이아는 남편이고 조국이고 뭐고 지겨워...쩌어기 이란 북서쪽 카스피해 남쪽 어디에 자리를 트는데 바로 '메데/메디아'라는 나라다. 한때 신바빌로니아와 힘 합쳐 아시리아를 무너뜨린 강국이었으나 나중에 들어서는 키루스2세의 페르시아 (아케메네스왕조)에 의해 멸한 후 역사에서 사라진다.
유대땅 헤롯왕의 의붓딸 살로메, 셰익스피어의 맥베드에 등장하는 마녀들이 팜므파탈의 시초 메데이아를 보고 배운 거 아닐까. 에고, 무섭고 무서버라. 뭔 이런 이야기를 조상들은 만들었을까나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