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팔봉칠 Jul 06. 2024

L4. 시절인연이 아프다

좋아했던 오빠가 내민 뜻밖의 다정함


다정함은 독이 되어.

그분은 같은 동아리를 통해 알게 된 사람이었어요. 누구에게나 호감인 사람이었어요. 잔잔하게 활발하고,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걸 좋아했고,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 스타일이었어요. 주류의 감성과는 약간 거리를 두었으며, 본인만의 세계가 확고하고 상도덕을 지키고자 하는 신념이 뚜렷한, 부드럽고 친근하지만 속은 단단해 보이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확신의 인싸 재질이었지만 가볍지 않고 진중한 사람이랄까요. 아무튼 일반적인 남성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좋아했습니다. 저를 편하게 잘 대해주기도 했으니까요. 그분은 제게 늘 다정하고 친절했어요. 그러나 그것이 좋아하는 이성에 대한 친절이 아닌, 그저 비즈니스적인 호의이자 예의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의 친절은 저를 들뜨게 하면서도 한순간에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어요. 저는 그분을 좋아했지만 그 사람은 저를 아는 동생 이상/이하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거든요. 이뤄지지 않을 사랑임을 알면서도 그냥 계속 좋아했습니다. 멈출 수가 없이 자꾸만 커졌으니까요. 그러다 어느 순간 마음이 커지다 못해 저를 아프게 하니까,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상대를 끝까지 붙잡고 있는 나 자신이 비참해서, 스스로가 안타까워서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계속 이어오던 연락도 점차 줄이고, 그 분과 나눴던 대화를 전부 지웠어요. 심지어 다른 사람을 잠시 좋아해 봤어요. 다른 사람을 찾아서 좋아했더니 그분 생각이 덜 나더라고요. 그분과는 한두 달에 한 번 정도만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얼굴을 보지 못하는 기간 동안 혼자 감정이 커지다 못해 너무 힘들어서, 그래서 다른 사람을 잠시 좋아했어요. 그러면서 점차 그분에 대한 감정이 옅어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동아리 활동이 끝났고, 마지막 회식을 통해 그분을 정말 오랜만에 만나게 됐어요. 보자마자 마음이 일렁였습니다. 얼굴을 보지 않던 시간 동안 많이 정리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그 다짐이 무색해질 정도로 금세 흔들리는 제 모습을 보며 아직 완전히 정리되진 않았구나 싶더라고요.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려 그분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질 못했습니다. 그 사람의 얼굴만 보면 마음이 울렁거리고 슬퍼져서, 이게 그분의 얼굴을 보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게 너무 체감이 돼서 최대한 눈길을 피했습니다. 그래도 눈이 마주치지 않는 순간에 몰래몰래 쳐다보면서 얼굴을 기억하려 애썼어요.

그리고 다른 여성분과 단둘이 오랫동안 얘기를 나는 모습을 보고 내가 아는 것보다 깊은 관계가 이 안에 있다는 걸 알게 돼서 많이 슬펐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고, 그 마음을 티 내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빨리 취하고 싶어서 술을 빨리 마시고 눈을 피하면서 나름대로의 노력을 다했네요. 그런 상태로 계속 버티다가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먼저 집에 들어왔는데, 그날 새벽부터 다음날 저녁까지 울컥한 마음이 계속됐어요. 그 사람은 나에게 이성적 관심이 전혀 없을뿐더러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궁금한 바가 없구나’, ‘오히려 다른 이성과 잘 어울린다’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물론 저의 망상이 섞이긴 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그 사람을 놓아주기에 더 편했어요.


마지막 인사였구나

슬픈 마음으로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른 채 괴로워하고 있을 즈음 그 사람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너무 놀라 휴대폰을 떨어뜨렸네요. 그 사람은 회식자리에서 제 모습을 조금은 지켜보고 있었나 봅니다. 어딘가 다운되어 보였다며 조심스레 연락을 했어요. 그리곤 내가 앞으로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말만 반복했어요. 평소에 연락할 땐 장난스러운 말투, 가끔은 무심한 말투가 전부였는데 그날만큼은 어딘가 진지하게 진심을 담아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왠지 낯설기도 했어요.


“다 무시하고 네가 행복하면 좋겠어.”


라고 말하던 그분의 말들이 너무 따뜻했어요. 그분은 저와 마지막 연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마 이렇게 진지하게 말했던 것 같아요. 더 이상 동아리에서 만날 일이 없을 테고, 따로 둘이서만 만날 사이도 아니다 보니 앞으로 얼굴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나 봐요. 저 날은 너무 놀라서 사실 마지막 연락이라는 걸 실감하진 못했는데, 그분이 보낸 말들을 곱씹으면서 깨달았어요.


‘나에게 작별인사를 한 거구나.’


그 생각이 들어 며칠 내내 더 슬프고 괴로웠어요. 그 사람의 위로를 받고 아팠던 마음이 잠시 치유가 됐는데 생각을 할수록 작별인사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그 연락을 내가 너무 부산스럽게 넘겼나 싶어서 마음이 아팠어요. 좋아했던 사람이 내가 힘들었던 순간에 먼저 연락을 줬는데 그게 마지막 연락이었고, 그 순간까지도 다정했어요. 자꾸만 저에게 행복하라는데, 내가 행복하려면 당신과 연이 끊기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그 말이 그 사람에게 닿아 부담이 될까 봐 삼키고 또 삼켰어요. 그 말을 한다고 제가 그분에게 고백할 용기가 있지도 않았거든요.


안녕

오빠가 건넨 따뜻한 위로를, 마지막 연락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면서 울었어요. 그분을 여전히 좋아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뤄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분을 앞으로 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슬펐던 것 같아요.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 앞으로 내 인생에서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된다는 게 많이 힘들었어요. 평행선의 길을 걷게 되는 게 무서워요. 관계를 잘 흘려보내고 싶은데 언제가 되면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이 사라질지 확신이 서질 않아요. 나중에 다시 얼굴을 봤을 때 또 마음이 일렁일까 봐 무섭습니다. 그분이 알려준 노래들도 이제 못 듣겠어요.


왜 다른 사람이랑 즐거워 보이던 내게 질투가 난다고 말했었는지, 왜 먼저 연락했는지, 왜 다른 사람들은 눈치도 못 챈 내 감정을 세심히 알아챈 건지, 왜 마지막을 그렇게 다정히 끝낸 건지 아직도 궁금한 게 많아요. 단 한순간도 이성적 감정이 없었는지 묻고 싶어요. 왜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항상 저를 좋아하지 않는 걸까요.


흐지부지 끝난 제 시절인연이 너무 아픕니다. 저도 나이가 들고 사람을 많이 만나다 보면 언젠가 성숙해져서 그분을 완전히 놓을 수 있을까요.


작가의 이전글 L3. 내가 모르는 누군가에게 힘이 된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