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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커피 Apr 01. 2024

고래

천명관/ 문학동네

금복이 고개를 홱 돌리며 칼자국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에 파란 불길이 이는 듯했다.

그녀는 칼자국에게 다가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행여 그런 생각은 꿈에라도 담지 마세요.

난 그이에게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모든 게 당신이 시킨 짓이라고 믿겠어요. 그리고 만일

그이가 털끝 하나라도 다친다면 난 당신 앞에서 혀를 물고 죽을 테니 그리 알아요.

 금복은 찬바람이 돌 만큼 차가운 얼굴로 문을 열고 나갔다.

그 순간, 칼자국은 단 한 번만이라도 금복의 그런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그 자리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혼자 가슴 태우며 상사想思의 고통을 겪느니

걱정처럼 장골이 바스러져 평생 병신이 되더라도 금복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면 

차라리 그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p.137




 천명관 작가의 장편소설 4권을 읽었다. <고래>에서 시작해 <고령화 가족>,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나의 삼촌 브루스 리>까지.  이 소설들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게도 재미일 것이다. 재미는 있었지만 불편하다거나, 본인의 취향은 아니라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었다. 

 쉽게 읽히는 소설들에 대한 선입견이 깨진 계기가 있었는데 '예술성이라는 이름으로 읽기 어려운 소설보다 쉽게 읽히는 소설이 더 쓰기 어렵다'라고 했던 '김호연 작가'(불편한 편의점)의 강연을 들은 후부터다.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이 말에 깊이 공감할 것이다.

천명관 작가의 장편소설들을 읽다 보면  '영화'에 대한 사랑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고래 모양의 극장을 상상해 내다니, 피노키오가 고래 뱃속에 들어간 장면이 잠시 스쳤다.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면서 가장 열받았던 순간이 감독들이 자신의 글을 함부로 훼손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감독을 꿈꿨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장항준 감독에 의하면 지금의 천명관 작가를 만든 것이 자신이라고 하는데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다. 오랜만에 전화통화를 하게 되었고 '형, 나  감독 입봉 해'라는 소식을 알렸는데 그 말에 천명관 작가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무엇이 계기가 되었든  동생의 권유로 소설을 썼고 2003년 <프랭크와 나>로 문학동네신인상을, 2004년 <고래>로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해 작가로 등단했다는 이야기. 

작년(2023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라 다시 한번 <고래>가 전성기를 맞이했으니 존버정신의 승리자라 할 수 있겠다.  노벨문학상을 타는 작가들의 나이가 기본은 80이니 환갑에 주목을 받는 것도 그리 늦은 일은 아닌 듯싶다. 2022년  김언수 작가의 소설 <뜨거운 피>로 입봉을 했으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역설적이게도 위로를 받는 느낌이 든다.


 <고래>는  쌍둥이 자매, 생선장수, 걱정, 칼잡이, 文, 약장수, 트럭운전수, 수련, 무당벌레(교도관)에 이르는 수십 명의 인물들의 지류가 모여 국밥집 노파, 금복, 춘희로 대표되는 여성 서사라는 굵직한 물줄기를 형성한다.

처음 제목은 <붉은 벽돌의 여왕>이었다고 한다. 출판사 사장이 책 제목에 '왕'이나 '여왕'이 들어가면 망한다고 해서 <고래>가 되었다.  한 인물과 미국의 역사를 잘 버무린 영화 <포레스트 검프>처럼 <고래>도 3년간의 전쟁, 장군님, 빨갱이로 대표되는 우리나라의 굵직한  근현대사의 사건들과  인물들이 잘 버무려져 있다. 

또 다른 특징을 꼽자면 소설 중간중간 나오는 변사의 목소리일 것이다. 소설을 읽는 독자를 가지고 놀기도 하고 친절하게 잊혔던 인물들을 다시 소환하기도 한다. 기존의 소설 양식에서 벗어나 기이한 특징을 갖는 이 소설은 이성이나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들도 천연덕스럽게 들이민다.

죽은 노파가 여러 번 나타난다거나 4년이 지난 뒤에 금복이 임신을 한다거나 금복이 여자에서 남자로 변하는 설정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어느새 독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이나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 라우라 에스키벨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마술적 리얼리즘소설이라고 한다. 중남미 지역의 문학이 갖는 특이성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로  환상성과 현실성이 결합된 리얼리즘 문학을 지칭한다. 남미 소설에 대한 경험이 없었다면 나 또한 정말 특이한 소설로 여겼을 것 같다.  

 강한 캐릭터성을 지닌 걱정이나 칼잡이 같은 인물은 작가가 영화의 영향이라고 대답했다. 작가 스스로 절대 영화화할 수 없는 소설을 쓰겠노라고, 소설이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는지 한계 없는 소설을 쓰겠다는 마음으로 썼다고 하니 그냥 믿고 싶은 대로 읽기를 바란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형식하에 자신이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세계를 본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우리는 세계 자체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근거율에 의해 파악된 세계를 경험할 뿐이다. 작가의 상상력, 작가의 표상, 작가의 세계관을 흡수하고 반사하는 것은 이제 독자의 몫이다.



과연 객관적 진실이안 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람들의 입을 통해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일까? 칼자국이 죽어가면서 금복에게 한 말은 과연 진실일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조차도 인간의 교활함은 여전히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서도 마찬가지, 우리는 아무런 해답을 찾을 수가 없다. 이야기란 본시 전하는 자의 입장에 따라, 듣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이야기꾼의 솜씨에 따라 가감과 변형이 있기 마련이다. 독자 여러분은 그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 된다. 그뿐이다. p.149




 천명관 작가는 소설 <고래>를 통해 '거대한 것'의 비극성을 다루고 싶었다고 한다. 바다에서는 고래를, 육지에서는 코끼리가 아마 거대한 것을 대표하는 종일 것이다. 잡힌 대왕고래가 해체되는 장면이나 코끼리 점보가 죽어서도 박제가 되어 전시되는 모습이 해당된다. 현대사회에서 생명체가 커다란 것은 비극이다. 일단 덩치가 크면 인간은 경외감을 갖는 동시에 경계심을 품는다. 경계심은 때때로 학살의 전철을 밟기도 한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보면 뉴질랜드의 첫 사피엔스 정착자인 마오리족이  섬에 도달한 후 2백 년도 지나지 않아 그곳의 대형동물 대부분이 멸종했고 모든 조류 종의 60퍼센트가 멸종했다고 한다.

 유대목의 포유동물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호주에서는 이미 이들이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몸무게 2백 킬로그램에 키 2미터인 캥거루, 호랑이만 한 유대목 사자, 타조 두 배 크기의 날지 못하는 새들, 용 같은 뱀들, 5미터 길이의 뱀들이 숲 속을 어슬렁 거리고 있었다. 이로부터 몇천 년 지나지 않아, 대형동물은 사실상 모두 사라졌다. 몸무게 50킬로그램이 넘는 호주의 동물 24종 중 23종이 멸종했다. 


 '거대한 것의 비극성'은 인간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3부 공장에서는 방화범으로 몰린 춘희의 감옥생활이 나온다. 춘희는 말을 못 한다. 몸집도 열네 살이 되기 전에 백 킬로그램을 넘어섰다.  원시와 야만을 상징하는 고래를 춘희라고 보는 시각은 아마도 춘희의 커다란 몸집이 한몫을 한다. 교도소장은 춘희를 진화의 흔적이 없는 값비싼 골동품으로 평가를 내리고, 통째로 알코올에 담가서 보관하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춘희의 거대한 몸은 가혹한 폭력에 노출된다. 대형동물에 대한 폭력은 때로 커다란 몸집에 낮은 지능을 가진 인간에게로 표출된다. 다름을 보는 나의 시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춘희는 언어대신 원시적인 소통방식으로 코끼리 점보와 소통한다. 누구보다 사물과 현상에 대한 이해가 깊기 때문이다. 섬세하고 동물적인 감각을 가진 춘희를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문명화된 인간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다.



 돈을 어떻게 유용하는가에 따른 세 인물의 태도도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부분이다. 목숨에 대한 위협을 받으면서도 지키기에 급급했던 노파는 오로지 복수를 위해 돈을 모은 인물이다.  

타고난 장사 수완에 말 그대로 돈벼락(노파의 전재산)까지 맞은 금복은 다방을 열고, 벽돌공장을 짓고, 운수업에 뛰어들고, 고래 모양의 극장을 짓는 인물이다. 한마디로 돈을 불릴 줄 아는 자본주의의 표상이다. 결국 극장에 불을 지르고 자살을 선택하는 장면에서 인생의 덧없음이 느껴진다. 여장부였던 금복이 남자가 되면서 치졸하게 변하는 모습은 인생의 아니러니가 아닐 수 없다.

춘희에게 돈은 그저 종이 뭉치일 뿐.

모든 인물들의 죽음과 실패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 춘희에게 벽돌은 어떤 의미인지 작가는 묻고 있다. 단순 유희였는지, 노동이었는지, 예술이었는지, 추억과 그리움의 대상이었는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이었는지. 나는 춘희 나름의 치유와 기록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인물들, 트럭장수, 아기, 코끼리 점보에 대한 애도의 시간을 벽돌이 함께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고독의 시간은 그녀를 장인으로 만들었다. 이래서 인간은 그 어떤 형식으로든 기록을 남겨야 한다.

어떤 형태를 띠었든 모두에게는 각자의 '벽돌'이 있다.


작가가 서술하고 있는 '그것은 ~법칙이다'를 보면서 결국 인간은 선사시대 이후 누적된 법칙의 무게를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구나 싶었다.  자연의 법칙으로 시작해서 대중성의 법칙까지 44개의 법칙을 보면서 나만의 법칙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개망초와 붉은 벽돌 건물을 보면 쓸쓸히 죽어간 춘희가 생각날 것 같다. 개망초의 꽃말이 '멀리 있는 사람은 가까이 다가오게 해 주고, 가까이 있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준다'는데 꽃말까지 너무 시큰하디. 춘희의 아이가 살아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그건 정말 소설 같은 이야기일 것이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소설 <고래>였다. 

 



 그간 춘희의 수형생활은 침묵과 망각의 시간으로 채워졌다. 그녀는 사람들이 두려웠다. 그래서 언제나

사람들을 피해 구석자리를 찾아다녔다. 그동안 새순처럼 여리고 무구한 춘희의 감성은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춘희는 자신의 상처를 어떤 뒤틀린 증오나 교묘한 복수심으로 바꿔내는 술책을 알지 못했다. 고통은 그저 고통일 뿐 다른 어떤 것으로 환치되지 않았다. 상처는 지워지지 않았고 그녀의 가슴 한가운데엔 고통이 화석처럼 굳게 자리를 잡았다. 그것이 춘희의 방식이었다. p.445



44개의 법칙을 소개하며 진짜 끝.(법칙이다는 생략 한다)

자연, 세상, 무조건 반사, 소문, 유전, 사랑, 그들, 중력, 생식, 고용,

화류계, 가속도, 무지, 의처증, 거리, 금복, 칼자국, 구애, 비만, 운명,

무의식, 습관, 작용 반작용, 작살, 이념, 거지, 흥행업, 구라, 진화, 관청,

유언비어, 만용,  자본주의, 헌금, 경영, 알코올, 플롯, 감방, 신념, 토론, 

권태, 지식인, 독재, 대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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