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자들'은 '완득이'가 영화화되면서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까지 사로잡은 김려령 작가의 신작 단편집이다. '완득이'로 입문하여 '우아한 거짓말', '모두의 연수', '기술자들'까지 읽고 난 후에는 책장을 덮으며 작가의 상상력과 정교한 묘사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외과의사형 작가'답게 김려령은 이 단편집에서 주변에 있을 법한 이야기들을 가르고 헤집어내어 생생하게 눈앞에 드러낸다. 여기에는 생계를 근근이 이어가는 동료(기술자들), 황당한 이별을 겪는 젊은 여자(상자), 이기적인 장남 뒤에 가려진 순박한 차남을 애틋하게 여기는 노모(황금 꽃다발), 성인이 되어서도 아버지에게 엄살을 부리는 아들(뼛조각), 질 나쁜 가족을 견디다 못해 행불자가 되기로 결심하는 딸(세입자), 과거의 오해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의 장을 시작하는 퇴사자(오해의 숲),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자녀들을 뒤로하고 모든 것을 청소한 뒤 떠나는 엄마의 이야기(청소)가 담겨있다.
그녀의 이야기에는 가족의 이야기, 사랑과 이별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녹진하게 배어있다. 쉽게 읽히지만 때로는 무겁고, 단편집이지만 너무나 세세한 묘사로 마치 장편의 한 조각을 맛본듯한 기분이 든다
단편집의 타이틀이기도 한 첫 번째 이야기 '기술자들'에서는 배관공 '최'가 등장한다. 그가 겪는 현재는 그간의 고생이 무색할 만큼 비루하다. 3년간 애써봐도 잘 풀리지 않은 가게 일을 접고 승합차 한 대와 공구만 남겨 떠돌이 신세가 된 최에게 조가 불쑥 끼어든다. 갈 곳 없는 고속도로를 시속 100km가 넘게 달려야 하는 최와 조의 아이러니는 목적 없이 방황하는 모든 삶을 은유하는 듯하다. 길거리의 삶에 익숙한 조는 최에게 도움을 주며 점점 가족과 같은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서로를 알아봐 주고 함께 일하고 밥을 먹는 그들의 우정 혹은 가족애가 애틋하다. 이 이야기에서 '이것저것' 그러모아 일해온 사람답게 물건마저 이것저것 챙기는 조의 모습은 바로 다음 이야기에 등장하는 엄마의 모습과 닮아있다.
딸이 어린 시절 쓰던 물건들을 살뜰히 모아 '상자'에 30년 넘게 보관한 엄마의 사랑이, 딸의 애인에게는 헤어짐을 결심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서른셋 동갑내기 연인이었던 남자는 여자의 엄마가 보관해 온 물건들을 보며 어른 아기 같다는 이유로 이별을 고하고, 여자는 이를 불쾌하게 여기며 그 상자를 처분하기에 이른다. 누군가의 끈끈한 가족애가 어떤 이에게는 마치 트라우마 같은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상자'는 사소한 동기로도 연인 아니면 타인이 될 수밖에 없는 남녀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청소' 역시 '상자'와 같이 정돈과 처분의 서사가 등장한다. 이 이야기에서 경제력과 가사노동을 제공하면서도, 철없는 자식들에게 하찮은 취급을 당하는 엄마는 그간 해온 살림들을 하나하나 버리고 청소한다. 이는 의식과도 같은 행위로 그녀는 모든 정리를 마치고 미역국을 끓여 먹은 뒤 집을 떠난다. 아이를 낳고 먹었을 미역국을 먹으며 자녀를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마지막 순간까지도 요구만 하는 자식과의 이별을, 그녀는 덤덤히 실행한다.
이는 '세입자'에 등장하는 미역국의 의미와는 사뭇 다르다. '세입자'에는 화자인 딸이 어디에 가든 찾아내어 탈탈 탈취해 가는 지독한 가족이 존재한다. 그런 엄마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딸은 상한 미역국을 엄마에게 대접하며 아무렇지 않게 먹는 모습을 보인다. 상한 미역국은 변질된 모성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그녀가 번듯한 집에 세입자로 들어온 것마저 돈을 받아낼 명목으로 이용하는 엄마는 주인집 방까지 침범하여 도둑으로 몰리기에 이른다. 진범이 엄마인지, 주인집을 드나드는 조카인지 알 수 없는 주인공은, 기생충 같은 자신의 가족과 꼭 닮아있는 집주인의 조카를 보며 인간이라는 종 전체에 대한 불신과 혼란을 느낀다. 그는 그 집을 나서며 급기야 행불자가 되기를 결심한다.
자식을 착취하는 부모의 이야기와 반대로 '황금 꽃다발'에서는 엄마의 가난마저 미학화하여 자신의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큰아들이 등장한다. 악착같이 자식을 찾아와 박박 긁어먹고야 마는 '세입자'의 부모처럼, '황금 꽃다발'의 장남은 팔순을 앞둔 노모를 어떻게 하면 최대한으로 이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인물처럼 느껴진다. 그는 사회적으로 성공했어도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부모에게 일절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채 결혼비용, 딸의 육아, 거짓된 인터뷰를 염치없이 당당히 요구한다. 아버지의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않은 그를 보며, 노모의 마음은 동생에게 기운다. 사업 수완이 없어 번번이 실패하지만 순박하고 제 것 내세울 줄 모르는 차남은 그런 형조차 아끼고 환대한다. 장남이 기자를 대동하고 찾아와 갑작스레 요구한 인터뷰에서 '황금 꽃다발' 태몽 이야기를 하며 장남의 거짓된 삶에 일조하는 노모는, 이야기의 말미에서 사실 그 태몽은 차남의 것이었음을 밝힌다. 이기심과 거짓으로 점철된 장남의 작태에도 꾸역꾸역 인터뷰를 하는 모습이나 동치미 국수를 해먹이며 차남의 장수를 기원하는 모습에서는 무조건적인 모정이 느껴진다.
'황금 꽃다발'에 속으로 삼키는 모정이 절절하게 드러나 있다면 '뼛조각'에서는 아들의 오랜 엄살을 알면서도 묵묵히 받아주는 아버지의 사랑이 그려져 있다. 인턴으로서 정직원 전환을 위해 낮밤 없이 달리는 심경으로 일하는 주인공의 무릎에는 선천적으로 쓸모없는 뼛조각이 박혀있다. 환자로서의 편익을 누리며 이 뼛조각을 이용했던 중학생 시절을 거쳐 성인이 된 시점까지도, 화자는 자신의 무능과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한 번 더 뼛조각 카드를 꺼내 엄살을 부려본다. 정식 사원 전환이 되기 힘든 상황을 자신의 탓이 아닌 무릎뼈 수술로 돌려보고자 한 것이다. 그는 수술 과정이 생각보다 엄중하고 복잡해지자 당황하지만, 모든 일이 끝난 뒤에도 '아아아... 아아아...'를 연발하며 자신을 간호한 아버지에게 엄살을 부린다.
작가의 전작 '우아한 거짓말'에서 학교폭력과 따돌림의 주제가 무겁게 다뤄졌다면 '오해의 숲'에서는 주인공이 학창 시절 친구에게 느꼈던 상처가, 그리고 그 여파로 인해 직장에서 느꼈던 소외감이 실은 모두 오해였음이 밝혀진다. 결말을 읽으며 독자는 안도감과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비슷한 주제의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가는 작가의 역량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우리 인생에서 오해의 숲을 헤매는 듯한 막막함을 느낄 때 기술자들 같은 소울 메이트가 나타나 목적 없는 고속도로라도 함께 달려준다면, 나의 탄생과 유년기, 태몽까지 생생하게 기억하며 고이 상자에 간직해 줄 엄마가 있다면, 내가 엄살을 부릴 때조차 묵묵히 돌봐줄 아버지가 있다면 삶은 얼마나 살 만할 것인가.
혹은 반대로 지독한 가족에 지쳐 떠나고만 싶거나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자 하는 누군가에게 이 책은 작은 공감과 위로가 될지 모른다.
김려령 단편집 '기술자들'은 그간 세상에 내놓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 자신만의 애착 작품으로 가지고 있던 이야기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만큼의 사랑과 그만큼의 따뜻함이 느껴진다. 독자의 마음에 아주 따뜻하게 가닿았으면 하는 작가의 바람은, 그러니 성공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