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노벨레’는 재밌게 읽히는 작품이다. ‘꿈의 노벨레’가 작품에 내재된 의미나 상징을 해석해 가며 읽지 않아도 재미있게 읽히는 이유는 작중 주인공인 프리돌린이 독자들이 그의 심리에 공감해가며 읽을 수 있는 비교적 평범한 인물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흥미진진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줄거리가 작품에 극적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줄거리보다 주인공의 난해한 내적 세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공을 들여야만 했던 대다수의 독일 문학 작품들과는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꿈의 노벨레’는 주인공 프리돌린이 하루 동안 겪은 사건들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 프리돌린이 이 하루를 두고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로 다소 비현실적인 사건들이 연달아 이어진다. 하지만, 프리돌린은 단지 비현실적인 사건들을 겪는 대상일 뿐, 주인공임에도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주체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 일반적인 줄거리 위주의 작품에서는 주체적인 주인공이 발생하는 사건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사건 진행을 주도해 나가곤 한다. 이와 달리, ‘꿈의 노벨레’의 주인공 프리돌린은 작중에서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인물로, 주인공이 아닌 제 3의 인물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사건 발생의 주체가 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로 프리돌린이 작중에서 만나는 인물들, 특히 여성들이 그러한데, 작중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영웅적 면모를 갖추고 있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적극적인 인물들로 나타난다. 이는 영웅이 된 자신의 모습을 꿈꿀 뿐,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 프리돌린과는 비교되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프리돌린이 주인공임에도 소극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지, 작중의 여성들과 비교해 가며 파악해 보고자 한다.
# 해석
작중 하루 동안 프리돌린은 네 명의 여성, 마리안네, 부흐펠트 골목의 어린 창녀, 가면 대여점의 광대 복장 소녀, 마지막으로 무도회장의 비밀스러운 여인을 만나게 된다. 네 명의 여성들에게는 공통되는 특성이 있는데, 앞서 언급했듯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는 주체적인 인물이라는 점이 공통적이다. 프리돌린의 아내, 알베르티네 역시 자신의 감정을 거짓 없이 내보였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네 명의 여성과는 구별되는 지점이 존재하는데, 이는 이후 문단에서 다루고자 한다.
먼저, 마리안네는 약혼자가 존재함에도 프리돌린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마리안네의 이러한 모습은 덴마크 해변에서 소녀에게 성적 매력을 느꼈음에도 다가가지 못하고 오히려 무기력함을 실감했던 프리돌린의 모습과 대비된다. 프리돌린이 마리안네의 고백 직후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모호한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 역시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게 답을 내리지 못하는 프리돌린의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증거로 보인다.
부흐펠트 골목의 어린 창녀를 대할 때도 프리돌린의 이중적인 태도는 비슷하게 나타난다. 프리돌린은 마치 억지로 끌려간 것 같이 표현하며 합리화하지만 이내 창녀를 끌어 안고 성적 관계를 맺으려 한다. 오히려 어린 창녀가 프리돌린에게 저항하며 돈까지 받으려 하지 않는 단호한 모습은 돈을 건네주며 자신의 양심을 달래려 하는 프리돌린과 달리 그녀가 좋고 싫음을 분명히 할 수 있는 주관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면 대여점에서 만난 광대 복장의 소녀는 처음 본 사이인 프리돌린에게 과하게 의지하는데, 프리돌린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품에 안는다. 소녀의 당돌한 태도가 당황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녀가 프리돌린에게 일종의 도움을 기대했기에 행한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프리돌린 역시 이를 두고 ‘여자아이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어떤 의무처럼 느꼈다’라고 표현하지만 이번에도 소녀를 돕고 싶은 마음을 적극적으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다. 그저 기비저에게 소녀에게 몹쓸 짓을 하지 말아달라는 약속만을 남긴 채 자리를 뜰 뿐이다.
무도회장에서 만난 여인은 가장 눈에 띄는 행동을 보인 인물이다. 그 이유를 정확히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녀는 무도회장에 몰래 참석한 프리돌린의 정체를 파악하고 무도회장을 떠나라는 경고를 수 차례 남긴다. 하지만 프리돌린은 ‘난 있겠소’라고 그녀의 경고를 무시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도 낯선 영웅적인 어조’라고 느낀다. 하지만 결국 정체를 발각당한 프리돌린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영웅적인 행동을 취한 인물은 프리돌린이 아닌 여인이었고, 프리돌린은 여인을 구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성들에 의해 쫓겨나고 만다.
이처럼 작중에서 프리돌린의 의지는 스스로 단념되거나 외부의 힘에 의해 번번히 좌절당하며 결국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모습만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아내에게 털어 놓고 자신의 최후를 알베르티네로 하여금 심판케 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가장 잘 나타나기도 한다. 작중에서 소극적이고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인물들은 또 있는데, 베일 너머로 거울을 통해 나체의 여인들을 관음하듯 바라 본 ‘나흐티갈’과 자신들은 가면 뒤에 숨은 채 프리돌린의 가면을 벗겨내려 했던 남성들이 그러했다. 자신의 속마음을 결코 내비치지 않으며 어중간한 태도를 유지하는 남성들과 자신에게 닥칠 결과를 각오한 채 적극적으로 행동을 취하는 여성들, 작중에서 나타나는 남성들과 여성들은 ‘남자는 항상 적극적이어야 한다’와 ‘여자는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는 데 능하다’라는 전통적인 남성상과 여성상에 정확히 대치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성별간, 전통적인 가치관과의 대비는 인간이 이중적인 존재임을, 스스로가 생각하는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과 실제 현실에서의 모습 간의 괴리가 존재함을 적나라하게 나타낸다.
# 마치며
하지만, ‘꿈의 노벨레’를 읽으며 주인공의 자칫 답답해 보이는 태도에 공감하고 때로는 응원하며,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게 만드는 것은 작중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선한 모습들 때문일 것이다. 그는 마리안네를 진심으로 동정했으며, 어린 창녀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고, 자신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소녀를 지켜주어야겠다고 생각했으며, 진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을 위해 다른 누군가, 즉 여인이 희생하는 것이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프리돌린에게는 이를 행동으로 옮길 의지가 부족했고 현실적인 조건들, 혹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이 실현되지 못하도록 막아서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주인공의 어중간한 태도가 작품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여러 매체에서 접할 수 있는 마냥 선하기만 한 영웅과 그저 악하기만 한 악당은 현실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추악하다고 할 수 있는 욕망이 내면에 감추어져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인을 위하는 선의가 결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선의와 욕망을 선뜻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이유는, 작중에서 나타나듯 현실적인 조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선의로 행한 일들이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는데, 이는 작품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작중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던 인물은 모두 파멸을 맞이한다. 마리안네는 사랑 없는 결혼을 하게 되었고, 어린 창녀는 병원에 갔으며, 광대 복장의 소녀는 원치 않는 ‘합의’를 해야만 했고, 무도회장의 여인 또한 죽음을 맞이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알베르티네는 현실, 즉 가정을 위해 꿈을 저버렸기에 살아 남는다. 그녀 역시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다면 작중의 다른 여인들처럼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결국 그녀는 남편과 함께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택하는 결정을 내렸다. 꿈과 현실, 둘 중에서 무엇을 택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는 질문에는 답을 내릴 수 없다. 다만 둘 중 무엇을 택하든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항상 존재할 것이며, 바로 이것이 ‘꿈을 꾸지 않은 채’ 아이의 웃음소리로 아침을 맞이한 프리돌린 부부의 마지막 모습에 마냥 미소지을 수만은 없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