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은 주인공 싱클레어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성장 소설이다. 데미안을 비롯한 여러 등장인물들이 조력자로서 등장하고 주인공인 싱클레어가 고뇌와 성찰 끝에 성장을 이룩하는 데미안의 줄거리는 전형적인 성장 소설의 서사를 따른다. 작중 싱클레어는 어린 시절 평화로웠던 자신의 세계를 위협하는 ‘프란츠 크로머’를 비롯해 많은 인물들과 만나고 사건들을 접하며 한층 성숙해진 모습을 보인다. 결말부 자신의 인도자였던 데미안과 자신을 겹쳐 보는 싱클레어의 모습에서 지금껏 그가 추구해왔던 이상에 도달했음을 보이며 작품은 마무리된다. 하지만, 싱클레어가 이룩한 성장은 여러 고난과 역경을 동반했다. 싱클레어는 오랜 방황의 시기를 거치기도 하며 자신의 이상이자 숭배의 대상이었던 ‘에바 부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도 고립되어 혼자 남을 미래의 자신을 직감하며 두려움과 걱정에 가득 찬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작중 등장인물인 피스토리우스와 크나우어는 올곧은 성장이 얼마나 달성되기 힘든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피스토리우스는 싱클레어를 인도할 수 있는 정도로 방대한 지식을 갖춘 지혜로운 존재였으나 미래가 아닌 과거의 이상에 매달리며 나아가지 않는 존재이기도 했다. 크나우어는 자신이 남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상에 도달하는 수단을 찾지 못한 채 심령론, 마법, 금욕과 같은 현실과 동떨어진 수단에 의지한 나머지 초자연적 현상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말았다. 주인공인 싱클레어 역시 자신이 이룩하고자 했던 목표인 데미안과 동일한 경지에 도달했지만 시간이 지난다면 새로운 이상을 찾아 헤맬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영원히 지속되는 꿈은 없으며, 어떤 꿈이든 새로운 꿈으로 대체된다’는 에바 부인의 말은 성장하여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이 덧없는 허상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싱클레어는 성장의 과정을 두고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처럼 힘겹고 버거운 성장이 단순히 무의미한 것이라면,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을 통해 무엇을 전달하고자 한 것일까.
# 해석
작중 초반부 데미안은 자신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긴 비결을 궁금해하는 싱클레어에게 ‘자신의 의지를 조절하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는 다소 비현실적인 근거를 제시한다. 데미안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나방의 예시를 드는데, ‘암컷 나방을 찾아 몇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날아오는 수컷 나방’의 행동과 같이 상식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행동의 원리를 일종의 ‘후각’, 즉 목적을 가진 훈련의 성과라고 주장하는데 실제로는 후각이 아닌 나비의 특별한 시각 범위에서 기인하는 현상이다. 데미안이 근거로 든 예시와 정확히 부합하지는 않지만, 실제로 배추흰나비 암컷이 반사한 자외선을 인식하여 수컷 나비들은 먼 거리를 정확히 날아 도착할 수 있다. 암컷 나비가 반사하는 자외선을 인식할 수 있는 수컷 나방만이 살아 남아 자손을 남긴 덕에 배추흰나비는 자외선을 인식할 수 있는 특성을 갖추게 된 것이다. 즉, 진화론적 필요에 의해 발현한 특성인 셈이다. ‘자신의 의지와 집중력을 어떤 특정한 일에 기울이면 성과를 얻을 수 있다’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데미안의 말은 언뜻 상충되는 의견처럼 들린다. 하지만 데미안이 말하는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일’이 ‘생존과 번식에 직결된 일’이라는 뜻이라면 데미안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배추흰나비의 예시처럼, 생존 및 번식과 관련된 일에 의지를 기울인다면 성과를 얻을 수 있겠지만 이는 인간의 의지가 아닌 진화론적 필요에 의한 것이니 자유 의지와는 무관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크나우어의 노력이 왜 무의미한 것인지에 대한 설명 또한 가능하게 한다. 크나우어가 택한 초자연적 수단과 비현실적 목적은 생존과 번식과는 무관한 일이기에 효과를 보이지 않는 것이다. 크나우어의 행동은 데미안이 ‘나방이 뜬금없는 다른 곳으로 향하려고 한다면, 아무런 효과를 보이지 않는다’라고 표현한 것과 정확히 부합하는 것이다. 데미안, 즉 작가인 헤르만 헤세는 ‘성장은 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진화론적 필요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작중에는 ‘진화’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지점이 두 군데 있는데, 두 지점 모두 데미안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피스토리우스는 하늘을 나는 싱클레어의 꿈 이야기를 듣고는 ‘당신을 날게 만드는 힘은 모든 사람이 가진 인류의 위대한 재산’이라는 말을 남긴다. 이는 하늘을 날게 하는 힘이 싱클레어 개인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닌 인간 전체가 공유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며, 비현실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것이 인간 개인의 자유 의지가 아닌 인류 자체의 진화론적 필요라는 데미안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피스토리우스는 또한 ‘자신이 모든 힘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 많은 이들이 불안해져 날기를 포기하며 두려움을 극복하고 계속해서 날아갈 때 자신의 의지로 이를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라고 말한다. 피스토리우스의 이러한 말은 언뜻 아이러니하게 들리기도 하는데, 피스토리우스 자신이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과거의 이상, 가치에 몰두한 대부분의 사람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피스토리우스의 예시는 성장을 위해 두려움을 무릅쓴 채 자신의 의지를 기울이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보여주는 좋은 예시이기도 하다. 피스토리우스는 싱클레어의 하늘을 나는 꿈이 ‘개인적’이지 않은 것임을 다시 한번 언급하며 이를 물고기의 평형기관의 부레에 비유한다. 싱클레어가 자신 안에 ‘진화 단계의 초기부터 생물에게 존재하는 기능’이 존재함을 실감한 일 역시 성장을 바라보는 진화론적 관점을 강조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나이가 들어 싱클레어와 재회한 데미안은 ‘훈련’이라는 은유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일을 그만두고 직설적으로 ‘진화론적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동시에 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의 예시를 들며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새로운 성장의 움직임이 있을 때, 이제까지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일을 이뤄내고 종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주장을 내세운다. 이는 성장의 대상이 개인 단위에서 벗어나 인간 전체로 확장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데미안이 말하는 새로운 성장의 움직임으로 ‘패러다임의 격변’, ‘기후환경적 변화’ 등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작중에서는 전쟁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데미안은 전쟁을 낡은 세계와 새로운 세계를 구분하는 기준점이 될 것이라 예감하며 싱클레어는 지금껏 자신을 비롯한 몇몇 소수만이 실감했던 ‘운명’을 전쟁을 계기로 온 세계가 체험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한다. 결국, 데미안은 지금껏 전쟁과 같은 격변의 시기에 변한 환경에 빠르게 적응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존재가 운명을 준비한 사람들, 즉 성장의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라는 말을 하고 있던 것이다.
싱클레어에게 ‘프란츠 크로머’는 세계관의 붕괴, 가치관의 격변을 연상케 하는 대상이었다. 프란츠 크로머라는 존재는 싱클레어에게 죄책감, 불안함 등 여러 부정적인 감정을 촉발시키며 지금껏 믿어 왔던 안락한 세계관의 붕괴를 이끌어 냈지만 이 또한 싱클레어의 성장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전쟁은 싱클레어를 포함한 많은 인간들에게 혼돈과 상처를 남기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인간 전체의 성장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데미안은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누워있는 싱클레어에게 ‘지금도 프란츠 크로머를 기억해?’라는 다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앞서 설명한 프란츠 크로머와 전쟁의 유사한 특성을 고려한다면, 데미안이 프란츠 크로머를 언급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프란츠 크로머로 인해 혼란과 첫 가치관의 격변을 겪은 어린 시절의 모습과 전쟁에서 부상을 얻은 현재의 모습을 동일시하며, 결국 이 또한 성장을 이루는 계기가 될 것임을 암시한 셈이다.
# 마치며
대부분의 성장 소설들은 가치관이 변화하는 시기, 즉 청소년기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은 주인공이 여러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며 자신만의 가치관을 이룩해나가는 서사를 통해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공감과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이다. 하지만, ‘데미안’은 단순히 청소년기의 독자들에게 국한되지 않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성장과 전쟁의 본질적 의미, 꿈의 일시적인 속성 등 생각할 여지를 여럿 남기는 작품이기에 성인이 되어서 읽었을 때의 감상이 달라지기도 한다. ‘성장은 좋은 것이다’라는 인식은 널리 퍼져 있는 것에 비해 성장의 목적이 무엇인지, 고통을 감수하고서 이룰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은 비교적 간과되기 왔다. 그럼에도 주인공 싱클레어의 성장 과정을 묘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성장의 목적을 제시했다는 점, 바로 이것이 다른 성장 소설들과 데미안을 차별화시키는 지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