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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소아 Feb 29. 2024

소설이 보여주는 경계선 너머의 신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 들어가며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나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옮김, 민음사, 2018 (p. 361)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주요 등장인물은 4명이다. 토마스, 테레자, 프란츠, 사비나는 각자 작가인 쿤데라의 분신이자 가능성을 나타낸다. 작품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대상을 인간에 한정하지 않는다면 테레자의 반려견인 카레닌 또한 이 범주에 포함할 수 있을 것이나 카레닌은 이들과는 몇 가지 차이를 가진다. 인간과 개라는 종간 차이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카레닌은 쿤데라의 가능성으로 생각할 수 없다. 그보다 쿤데라의 (실현될 수 없는) 지향점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듯하다.


“진정 심각한 질문들이란 어린아이까지도 제기할 수 있는 것들뿐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가장 유치한 질문만이 진정 심각한 질문이다. 그것은 대답 없는 질문이다. 대답 없는 질문이란 그 너머로 더 이상 길이 없는 하나의 바리케이드다. 달리 말해 보자. 대답 없는 질문들이란 바로, 인간 가능성의 한계를 표시하고 우리 존재에 경계선을 긋는 행위다.” (p. 228)


각 인물들은 쿤데라 자신이 (아마 어린 시절부터) 품었던 질문의 형상화였다. 쿤데라의 질문들은 하나같이 답을 내놓을 수 없는 것이었고 쿤데라의 한계를 명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4명의 등장인물들은 단순히 쿤데라의 질문을 제시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쿤데라가 넘볼 수 없었던 바리케이드 너머에 도달하는 데 성공한다. 바로 이 점이 소설 속의 인물들을 창조주인 쿤데라와 구분 짓는 것이며, 각자만의 고유성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각 인물들이 함의하는 대답 없는 질문은 무엇이었으며, 각자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였는지 인물별로 알아보고자 한다.




# 해석


1.   테레자, 육체와 영혼을 분리할 수 있는가?

과학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것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더 이상 영혼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과학은 정신 작용이 뇌 피질에서 발생하는 화학 작용에 불과함을, 육체와 별개시되는 영혼은 존재하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하지만 테레자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받아들이기 싫었던 것이 아니다. 테레자는 자신의 육체와 영혼 간의 괴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었고 이러한 괴리감이 그녀로 하여금 일원론을 받아들일 수 없게 했다. 테레자는 이원론적 사고관의, (작중에서 언급되듯이) 시대착오적인 여성이 되었다.


어머니와 함께 사는 동안 테레자는 자신의 육체를 고유한 것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테레자의 어머니는 모든 육체를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고 어머니를 닮은 육체가 테레자로 하여금 이러한 주장을 마냥 부정할 수만은 없게 하였다. 테레자를 제외한 모두가 육체와 영혼을 동일한 것으로 여겼다. 테레자에게 어머니의 세계는 개인이 구분되지 않으며 영혼의 존엄성은커녕 존재성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세계였다. 테레자의 영혼은 유일성을 위협받을 위기에 처하자 그녀의 영혼은 내면 깊숙이 침잠해 자신조차 존재를 인지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이렇게 육체 깊숙한 곳에 파묻혀 있던 테레자의 영혼은 토마시의 목소리(부름)에 의해 비로소 육체의 표면으로 떠오른다.


토마시에 의해 테레자의 영혼이 주목받게 되자 그녀의 고결한 영혼과 추악한 육체 사이의 괴리감이 더욱 눈에 띄었다. 테레자는 이원성에서 비롯된 괴리를 참을 수 없어했다. 그녀는 분리되어 있어 결코 화해를 이룰 수 없는 존재들이 (육체와 영혼이, 낮과 밤이, 키치와 죽음이) 조화를 이루기를 간절히 바랐다. 테레자가 육체와 영혼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간단한데, 그녀의 육체 또한 영혼과 마찬가지로 주목받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영혼이 고유한 것은 (최소한 테레자에게는) 명백하니 그녀의 육체 또한 유일한 것으로 만들면 되었다. 테레자는 토마시에게 인정받음으로써 육체의 유일성을 인정받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토마시는 테레자의 육체를 유일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육체적 관계와 정신적 사랑은 명확히 구분되는 것이라 믿었다. (이는 테레자의 생각과 동일하다.) 토마시는 테레자를 위하는 마음이 진심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는 테레자의 생각과 동일하지 않았다.) 토마시에게조차 테레자의 육체는 인정받지 못했고, 이윽고 테레자에게 자신의 육체는 누구에게도 (자신을 포함해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는 무거운 짐으로만 느껴졌다. 더 이상 테레자는 육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따라 육체를 죽여도 영혼은 살아남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토마시의 생각을 받들어 육체적 관계와 사랑은 아무런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자 한 것이다.


작중 등장하는 테레자의 꿈은 토마시를 질책하기 위한 특성을 지닌다. 단 한 가지의 꿈만이 다른 목적을 가지는데, 바오로 산에서의 꿈이 그러하다. 바오로 산에서의 꿈은 토마시가 아닌 테레자 자신을 질책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오로 산에서 처형인은 총을 쏴 스스로 죽기를 결심한 사람들의 목숨을 끊는다. 테레자 또한 그녀의 육체를 저버릴 생각으로 바오로 산에 오른다. 바오로 산에 갈 것을 권유하는 토마시의 모습은 자신의 육체를 죽이고자 한 그녀의 생각이 토마시의 영향을 받은 것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처형 직전 테레자는 마음을 바꿔 육체를 살리고자 말한다. 처형인은 테레자의 의지를 따를 수밖에 없다고 하며 총구를 내린다. 육체의 가치를 인정하고 말고는 그녀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처형 장면은 꿈이 아닌 현실에서도 변주되어 나타나는데, 다만 현실에서는 처형인, 즉 기술자 남성이 자신의 총구를 내리지 않는다는 차이가 존재한다. 테레자는 비로소 그녀의 영혼이 아닌 육체가 문제였음을 인지한다. 테레자는 토마시에게 인정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신의 육체가 지니는 가치를 경시했고 이에 실존적 위협을 받은 육체가 그녀의 영혼을 배신한 것이다. 육체는 영혼과 명확히 구분되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바오로 산에서의 꿈은 그녀의 영혼(의지)이 육체의 실존 여부를 결정지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했고 기술자와의 정사는 그녀의 육체 또한 (배신이라는 수단을 통해) 영혼에 위협을 가할 수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육체와 영혼이 온전히 별개의 것이라면 둘 사이의 영향을 주고받는 일은 가능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테레자의 이원론적 사고는 (테레자를 제외한 모두가 지적했듯이) 시대착오적인 것이며 테레자는 뒤늦게야 이를 이해하게 된 것일까?


테레자는 자신이 틀렸음을 알았다. 하지만 이원론의 틀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테레자는 육체와 영혼이 통합되어 있는 단일한 개념이라는 일원론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 있더라도 영향을 주고받는 일은 가능함을, 아예 별개의 것으로 구분 짓는 일이 불가능함을 인지한 것이다. 테레자의 생각은 “사랑이 창조주가 심심풀이 삼아 상상해 낸 섹스의 시계 장치와는 다른 것일지라도, 어쨌거나 사랑은 아름다운 여자의 나체에 반응하듯 거대한 시계추와 연결되어 있다.” (p. 387)라는 토마시의 뒤늦은 깨달음에 의해 뒷받침된다. 육체와 영혼은 다른 것일지라도, 설명할 수 없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테레자의 영혼과 육체는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서로에게 간섭하며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던 것이다.


토마시의 깨달음을 테레자의 대답과 연관 지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지만 테레자의 말대로, 그녀의 삶은 토마시였으며 둘의 삶은 설명할 수 없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다. 토마시의 깨달음은 테레자의 깨달음을 뒷받침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2.   사비나, 키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키치는 현실을 부정한다. 키치는 죽음을 은폐하고 인간의 한계를 규정짓지 않는다. 사비나는 키치가 모든 연대 활동의 기반이 되며 행렬, 정치, 전쟁과 같은 인간의 모든 활동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아가 그녀는 키치에 의해 유발된 모든 연대 행위를 사악한 것이라 여겼다. 그녀는 삶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따라야 할 가치나 의무가 없다고 여겼다. 사비나의 생각에 따르면 삶은 단 한 번뿐이고 일직선 상의 과정이기에 경중을 따지는 일은 무의미했고 인간의 삶은 그저 가벼운 것에 불과했다.


사비나는 인간이 중요시 여기는 모든 의미가 환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았다. 육체와 별개시되는 영적 가치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 신에게 창자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 것, 나아가 신이 존재하리라 믿는 것, 이 모두가 사비나에게는 허영이며 말장난에 불과했다. 사비나는 이성적인 인물이다. 키치는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p. 404)에 기반하고 이는 인간의 이성이 아닌 감성에 기반한 것이기에 그녀는 키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토마시와 테레자의 죽음을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죽었다"(p. 451)고 평한다. 이는 실제와 (토마시 자신이 성취한 가벼운 죽음과) 일치하지 않는다. 토마시는 의무로부터의 해방, 즉 삶의 가벼움을 성취해냄과 동시에 죽었다. 그러나 사비나가 이를 알 방도는 없었고,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토마시의 죽음에 사비나는 의미를 부여했고, 실제와 무관하게 이를 믿은 것이다. 환상을 지어낸 것이다. 이는 사비나 역시 키치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타인의 삶과 죽음을 재단하는 일이 무의미하며 때로는 정반대의 해석을 낳는다는 모티프는 프란츠의 죽음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난다.)


사비나는 토마시에게 ‘키치의 대척점’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사비나와 다르게 토마시는 자신이 행해야 할 의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토마시의 의무는 키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의무는 신의 의도에 거슬러 인간의 육체에 손을 대는 것이었다. (토마시의 의무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사비나는 토마시를 통해 키치 이외의 수단으로 삶에 무거움을 부여하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이다. (방법을 아는 것과 행할 수 있는 것은 다르다. 무엇보다 토마시의 의무는 사비나의 의무가 아니었다.) 그녀가 삶에 무거움을 부여한 또 다른 수단이 있었으니, 할아버지의 중산모자였다. 쿤데라는 앞서 삶은 반복되지 않으므로 행위에 대한 판단이 불가하고 따라서 가벼운 특성을 지닌다고 설명한다. 이와 달리 사비나의 중산모자는 삶이 반복성을 지닌다는 암시를 남겼다. 중산모자는 할아버지의 유품이자 아버지의 기념품이었다. 사비나는 (토마시와 함께) 중산모자에게서 추억을 연상했고 회상에 잠겼다. 그녀는 중산모자라는 매개체를 통해 과거로의 회귀를 경험한 것이다.


토마시가 떠나자 사비나의 삶은 한없이 가벼워진다. 삶의 이유 없이 살아가는 것을 사비나는 참을 수 없었고, 선택해야만 했다. 이대로 목숨을 끊을 것인지 허상에 불과한 의미일지라도 수용할 것인지. 그렇게 그녀는 프란츠와 함께한다. 프란츠는 키치라는 단어의 의인화라 할 수 있다. 현실을 보려 하지 않고 환상만을 믿으며 이에 순응한다는 점에서 그러한데, 프란츠의 이러한 특성은 사비나와의 결별 이후 보다 두드러진다. 하지만 사비나는 키치를 긍정할 수 없었다. 진심으로 키치를 수용하고 싶었고 남들처럼 환상을 향유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이성적 특출남이 이를 저지했다.


이후 사비나가 택한 삶의 방식은 배신이었다. 사비나는 무엇을 위해서 배신하고, 무엇을 배신했을까? 배신의 대상은 명확한데, 사비나는 그녀 자신을 배신했다. 사비나는 인간에게서 유대감을 느끼는 그녀 자신의 감성을 배신했고, 타인이 느낄 감정과 동조할 수 있게끔 하는 (혹은 그렇게 믿게끔 하는) 그녀 자신의 동정을 배신했다. 감성과 동정이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은 것이 아니다. 사비나는 자신에게 이러한 특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잘 알았다. 거울에 비친 (어머니를 닮은) 육체가 테레자에게 육체의 동일성을 부정할 수 없게 했다면 행복한 가정을 보고 흘리는 눈물은 사비나에게 감성이 존재한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되었다.


사비나는 모든 의미가 부여하는 나름이며, 결국 모든 것이 환상임을 알았다. 하지만 의미를 부여하고 인과를 찾아내는 존재가 인간이자 이러한 특성이 인간성이기도 했다. 결국 동정을 유발하고, 인간적 유대를 가능케 하는 키치는 인간의 본질인 것이다. 사비나는 악의 본질이라 여겼던 키치가 모든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음을, 따라서 자신에게도 내재되어 있음을 안 것이다. 사비나는 키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동시에 키치를 긍정할 수도 없었다. 때문에 사비나는 영원히 자신을 배신하고자 했으며, 배신을 삶의 태도로 만들고자 했다.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삶을 살아가고자 한 것이다. 사비나에게 배신의 목적은 존재하지 않았고, 배신이라는 행위가 삶의 목적이었다.


3.   프란츠,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사비나와의 결별 이후 프란츠는 운명론적인 사고에 사로잡힌다. 모든 우연한 일들은 계시의 가능성을 품었고 주어진 계시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 프란츠의 목표이자 삶의 태도가 되었다. 그는 사비나를 여신과 같이 숭배했는데 사비나의 무엇이 프란츠의 광적인 믿음을 형성한 것일까?


프란츠의 믿음은 사비나에게서 비롯되지 않았다. 그의 믿음은 철저한 자기 불신에서 비롯되었다. 프란츠는 두 여인, 그의 어머니와 마리 클로드에게 동정을 느낀다. (작중 쿤데라는 동정과 연민이 명확히 구분되는 것이라 선을 긋는다.) 동정은 타인이 느끼는 감정에 동조하는 것이며 타인의 감정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동정을 느끼는 대상은 주체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토마시에게 테레자가 그러했으며, 프란츠에게 그의 어머니가 그러했다. 프란츠는 마리 클로드에게서 그의 어머니를 엿보았고, 따라서 그녀를 외면할 수 없었다. 프란츠는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이며 필연적인 것(운명)이라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프란츠는 동정의 대상을 착각했고 마리 클로드의 고백 당시 그가 그녀에게서 느낀 정서는 가변적이고 꾸며낼 수 있는 것에 불과했다. 프란츠는 마리 클로드에게 사비나와의 불륜 사실을 고백함과 동시에 이를 직감한다. 마리 클로드 안에서 보았던 어머니는 사라졌고, 애초에 존재한 적도 없었다. 지금껏 자신의 의무라 여겨왔던 것이 환상에 불과했다. 프란츠는 자신에게 내재된 동정(쿤데라의 설명대로라면 동정은 정서의 문제라기보다 능력에 가깝다.)을, 자신의 직관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프란츠는 자신이 택한 삶에 방식에 불신을 가졌고 이내 자신을 믿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다. 자신이 아닌 타인(사비나)에게 삶을 의탁하는 것이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고, 무엇보다 이 방법은 자신의 믿음이 옳은지 틀린 지 확인할 수 없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사비나는 영영 떠나버렸고, 이전에 타인의 생각을 정확히 알아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프란츠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신이 설정한) 새로운 의무, 사비나의 의지를 따르는 일에 몰두했다. 하지만 작중 프란츠의 생애는 다른 등장인물들에 비해 유독 우스꽝스럽게 그려진다. 이러한 기조는 그의 죽음을 나타내는 장면에서 명확히 드러나는데, 예상치 못한 사고로 인한 죽음을 맞았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긍정적으로 표현된 (사비나에게 행복한 죽음이라고 평가되기까지 한) 토마시와 테레자의 죽음과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진다. 프란츠는 사후 자신의 의도와 정반대로 마리 클로드에게 돌아오고자 한 인물로 기억되었으며 타인들에게 그의 생애는 방황의 연속으로 해석되었다. 앞서 설명했듯 토마시와 테레자의 죽음을 ‘무거운 분위기에서 죽었다’고 평가한 사비나의 생각 역시 실제와는 다른데 이처럼 타인의 생애를 해석하는 일은 항상 오독의 가능성을 품는다. 그렇다면 쿤데라는 이들의 죽음을 통해 타인의 삶과 역사를 판단하는 일의 무의미함을 역설하고 싶었던 것일까?


쿤데라는 프란츠의 태도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겼기에 그의 삶과 죽음을 통해 독자들에게 경고하고자 한 것이다. 프란츠는 (시몽과 더불어) 몽상가적 기질을 가진 인물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밖에서 (자신이 아닌 외부적 요인, 타인과 사회 현상에서) 찾고자 한다. 프란츠의 경우 사비나가 그러했고 시몽의 경우 토마시가 그러했다. 그들은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 앞의 현상이 단순한 우연인지 운명적 계시인지 분간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그들은 결론(한계)에 도달하고자 하지 않는다. 자신 앞에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갈 뿐,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고 벗어날 의지를 가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의 한계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타인에게 의지하는 것이 과연 나쁜 것일까?


사비나는 타인이 개입된 순간 (단순히 바라보는 일 또한 개입에 해당한다.) 행위의 진실성은 퇴색된다고 생각했다. 토마시 또한 타인이 강요하거나 압박할 때 자신의 진실된 의사를 내비칠 수 없다고 믿었다. 토마시는 청원서에 서명을 요구받을 때 타인이 자신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중점적으로 고려했고, 이러한 영향을 모두 제거한 후 자신의 의무 여부를 판단했다. (하지만 타인의 영향을 모두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는 자신의 의무를 명확히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테레자 또한 스스로 고민하고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테레자의 주체성은 바오로 산의 꿈속에서 자신의 육체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의사를 밝히는 모습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테레자가 토마시에게 의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삶의 통제권을 그에게 넘겨주지는 않았다. 치열한 고민과 자기 성찰 끝에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는 자신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 이들의 답이 객관적으로 옳은지 그른지는 분간할 수 없겠지만 그들 자신에게만큼은 진실된 답일 것이다. 이에 반해 프란츠는 스스로 답을 구하려 하지 않기에 그의 사상은 엉성하고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시몽의 삶 또한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신의 내밀성을 상실한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다"(p. 188) 자신의 삶을 사비나에게 의탁한 프란츠는 자신의 내밀성을 상실하였으며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만다. 이 말은 작중 사비나가 군중을 의식한 선동가, 작가들을 비판하며 한 말이지만 (사비나의 입을 빌린) 쿤데라 자신의 생각처럼 비친다.


4.   토마시, Muss es sein?

토마시는 평생을 의무에 시달리며 살았다. 의사로서 환자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 토마시의 의무였으며 신이 창조한 (것으로 여겨지는) 인간의 몸을 들춰야 한다는 사명이 그에게 부여되었다. 토마시의 바람기도 결국 그가 짊어진 의무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여성들과의 관계를 통해 타인의 은밀한 비밀을 들추었고 심원한 본질을 엿보았다. 이는 인간의 피부를 들추며 감추어진 비밀(장기)에 도달해야 하는 의사로서의 운명과도 맞닿아 있다. 세계의 비밀을 들춰내는 것은 토마시의 "내면의 명령"(p. 323), "내면적 필연성"(p. 323)에서 비롯되었다. 토마시는 정복의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테레자를 향한 토마시의 사랑도 일종의 운명이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만날 일이 없던 토마시와 테레자는 여섯 우연의 연쇄 덕분에 만나게 되었고 토마시는 자신에게 그녀를 돌보아야 할 의무가 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토마시가 자신의 의무를 확신하는 과정은 프란츠가 마리 클로드에게 의무를 느낀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토마시는 테레자의 신경과 연결된 듯 그녀가 느낀 고통과 감정을 직감한다. 토마시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는 테레자를 책임져야 할 운명이었고 따라서 토마시는 테레자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더없이 무거운 것,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는 테레자와 관련된 일이라면 ‘Es muss sein’을 읊조리며 의무의 당위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과연 토마시에게 테레자를 향한 의무가 존재했을까? 애초에 인간의 삶에 반드시 행해야 할 의무가 있기나 한 것일까?


토마시는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고 판단할 권리가 있는가에 대한 회의"(p. 301)를 가진다.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고 사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면 인간에게 선택할 권리가, 자유가 존재하는 것일까? (토마시가 품은 문제의식은 인간의 자유의지 실존의 문제와 직결된다.) 토마시가 ‘Es muss sein’을 외칠 때 그는 거부할 수 없는 "위대한 필연성"(p. 317)이 실재한다고 믿었고 자신은 이에 따르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기 직전 토마시는 자신이 비로소 의무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단언한다. 의무를 짊어진 그의 무거운 삶이 어느 순간 가벼움의 특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를 의무로부터 해방시켰으며 그가 위대한 필연성으로부터 ‘그리 단호하고 쉽사리 빠져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테레자를 향한 진실된 사랑이었다. 그리고 이는 앞서 언급한 의무적 사랑과 구분되는 것이다.


쿤데라는 진실된 사랑의 조건을 몇 가지 제시한다. 그것은 대상의 변화를 바라지 않는 사랑이며, 무엇보다도 자발적인 사랑이다. 카레닌을 향한 테레자의 사랑이 그러했듯이, 토마시 또한 테레자를 자발적으로 사랑할 수 있음과 동시에 비로소 동정의 저주로부터 해방된다. 동정은 의무를 유발하는 것이 아니다. 동정은 인간이라는 개인이 실은 개인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며, 이는 타인의 정서와 공명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토마시는 청원서에 서명함으로써 테레자가 겪을 고난을 예상했고 그녀가 느낄 고통을 생생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서명하지 않았다. 테레자에 대한 사랑은 토마시의 의무(Es muss sein)를 초월하는 것이었다.


5. 본질

“그들은 하나의 상황, 하나의 문장, 그리고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본질적인 것은 여전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근본적이며 인간적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있는 은유에서 태어난다.”(p. 361)

(눈치가 빠른 독자들이라면 361쪽이 지금껏 수 차례에 걸쳐 인용되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는 361쪽이 작품의 척추이며 핵심이기 때문이다.)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의 삶에 담긴 동기, 상징, 의미를 명확히 파악할 수 없는 이유가 이 단락에서 드러난다. 이유는 간단한데, 작중 그들의 본질이 제시된 적이 없었기 (그럴 의도 역시) 때문이다. 쿤데라는 직접적으로 이들의 본질을 언급하기를 꺼렸다. 이는 작품, 나아가 쿤데라가 생각하는 참된 소설의 동기와 맞닿아 있다. 등장인물의 내밀성은 유지한 채 독자들로 하여금 인물의 본질에 접근하게끔 하는 것. 이것이 소설 속 인물에게 독자의 머릿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생명을 부여하는 방법이자 쿤데라가 생각하는 소설의 참기능이다.




# 마치며


“그들은 하나같이 내가 우회하기만 한 경계선을 뛰어넘었다. 나는 바로 이 경계선에 매혹을 느낀다. 오로지 경계선 저편에서만 소설이 의문을 제기하는 신비가 시작된다.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 (p. 362)


인간은 이성과 경험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직시한다. 그들은 자신이 파악한 경계선을 기준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한다. 실현될 수 없는 가능성에 대한 우려와 미련을 내려놓은 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실현가능한 일들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함으로써 성공을 거둘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마주한 사람들이 곧장 이를 받아들이고 경계선을 에둘러 떠날 수 있을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길을 우회해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 나서는 것뿐일까? 한계의 직시는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달할 수 없는 경계선 너머를 ‘상상’하는 것이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아니, 오로지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것,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지 않은 것을 찾아내는 일만이 의미를 가질지도 모른다. 인간이 시련을 마주하고 이를 통해 가치(혹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노력을 기울여 찾은 가치는 이미 그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던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인간이 시련을 통해 성장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은 결국 실현될 수밖에 없으므로)


쿤데라는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지 않은 것, 신비로운 무엇인가를 찾고자 한 것 같다. 그리고 그는 소설이 이를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소설은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을 실재하게끔 하는 수단(유일한 수단일까?)인 것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4명의 인물들은 모두 쿤데라 자신의 경계선을 뛰어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경계선은 쿤데라 자신의 경계선이었지 토마시, 테레자, 프란츠, 사비나의 경계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쿤데라에 의해 탄생했지만 쿤데라 자신은 아니었기에 쿤데라와 한계를 공유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의 한계만을 공유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를 가진다’는 한계가 그것이다. 쿤데라는 자신과 구분되는 별개의 인물을 창조해 쿤데라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과정을 묘사했다. 창작을 통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를 가진다’라는 필연적인 한계를 극복한 것이다.


하지만 작가와 인물이 무관할 수 있는지, 결국 소설 속 인물들은 작가의 가능성이 아닌 경험에서 탄생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쿤데라는 자신의 실현되지 못한 가능성들을 인물에 투영함으로써 생명을 부여했다. 이미 죽어버린 존재를 타인의 머릿속에서 태동시키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죽어버린 존재는 다시 태어날 수 없다. 탄생을 경험하지 못한, 따라서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 존재만이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자신의 가능성을 투영한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작가를 두렵게 만든다. 이미 죽어버린 존재가 다시 생명을 얻는 것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공포다. (어찌 보면 쿤데라 자신의 선택에서 비롯된 종말을 맞은 가능성, 죽어버린 존재들이었기에 더 큰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작가란 자기 자신 이외의 것은 말할 수 없다고들 하지 않는가?” (p. 361)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고유한 한계를 가지듯, 소설은 소설이기 때문에 고유한 한계를 가진다. ‘작가는 작가의 이야기밖에 할 수 없는 것’이 쿤데라가 생각한 소설의 한계였다. 쿤데라는 작품에 직접적으로 자신을 등장시킴으로써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쿤데라 자신의 목소리인 ‘나’가 개입함으로써 작품의 등장인물과 작가 자신을 명확히 구분 짓고자 한 것이다. 쿤데라는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의 목소리와 자신의 목소리가 독자들에게 별개의 것으로 들리기를 바랐다. (이 방법이 효과적인지, 작가와 인물을 구분하는 일이 가능한 것인지 생각해 볼 여지가 남는다.)


이는 작품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혼란을 유발한다. 한 작품 안에서 5명(화자까지 포함해)이 각자의 이야기를 각자의 시점에서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본질은 제각각 다르기에 각자가 중요시하는 가치와 혼란의 근원, 혐오의 대상 또한 전부 다르다. 심지어 시간은 멈춰 있을 수 없기에 이들의 가치관 또한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 인물의 시점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는 점, 소설의 전개가 아크로니적 (아크로니: 시간적 연관성 없이 다른 사건들과 동떨어져 있는 사건을 이르는 말) 구성을 하고 있다는 점 또한 독자의 혼란을 가중한다. (독자의 혼란을 가중하는 것이 작품의 질적 하락을 유발한다는 것과 동일하지 않음에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이처럼 모든 것이 다른 이들일지라도 한 가지 동일한 부분이 있는데, 바로 자신만의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이다.


토마시는 자신의 의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일련의 사건들로 토마시는 자신에게 의무라는 것이 존재할지 의심한다. 이내 토마시는 자신이 의무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깨닫는다. 테레자는 육체와 영혼의 이원성을 인지한다. 일련의 사건들로 테레자는 자신의 육체가 별다른 가치를 가지는지 의심한다. 이내 테레자는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온전히 분리 지어 사고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사비나는 키치가 헛된 환상이라는 사실을 인지한다. 일련의 사건들로 사비나는 자신 또한 키치에 사로잡힌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이내 사비나는 키치가 자신의 본성 중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지만 결코 수용하고자 하지 않는 삶의 태도를 취한다. (작중 사비나의 죽음만이 유일하게 제시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그녀가 도달한 결론이 배신의 삶을 이어가려는 의지였기 때문이다.) 프란츠는 동정을 느낀 대상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음을 인지한다. 일련의 사건들로 프란츠는 자신의 동정과 직관을 의심한다. 이내 프란츠는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된 자신이 아닌 타인을 삶의 지침으로 삼고자 한다.


이들의 삶에서 공통된 특성은 의심, 대상이 자신을 향하는 자기 의심이다. 4명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삶의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뚜렷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믿음이 위협받는 순간이 찾아왔고 그들은 이에 대응해 새로운 답을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전까지의 자신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인물로 탈바꿈했다. 이들의 변화가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판단하는 일은 무의미할 것이다. 외부인의 입장에서 타인의 변화가 긍정적인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자기 의심에서 비롯된 자신들의 변화가 성장으로 비칠 것임은 명백하다.




# 사견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공개를 염두에 둔 글은 처음이어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진 것도 있었고 분량 조절에 대한 감을 전혀 못 잡은 상태인 탓도 있는 듯합니다. 원래 처음 다루려던 작품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아니라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었는데 이 서평은 얼마나 길어질지 두렵기도 합니다. (조금의 기대도 있습니다만…)


어쨌거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첫 작품으로 다룰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작품의 어느 페이지를 펼쳐 봐도 사유할 여지가 충분했고 이를 정리해 하나의 흐름으로 풀어놓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들였습니다. 정말 힘겨운 시간이었지만 제 자신의 한계를 직시할 수 있는 값진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앞으로도 이 작품은 제게 큰 의미로 남을 것 같습니다.


사실 다루지 않은 부분이 정말 많습니다. 작품의 구성적 완성도(이것을 다루기에만 지금까지 쓴 분량의 배가 넘게 필요할 것입니다.), 의도를 가지고 창작한 소설 속 인물이 의무로부터의 해방을 외치는 아이러니함, 작품에 명백히 녹아들어 있는 쿤데라의 정치관(기회가 된다면 글을 덧붙이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동정과 마음 이론, 카레닌과 토리노의 말, 영원회귀와 행복의 연관성 등등… (쓰다 보니 빼먹은 부분이 정말 많군요. 지금까지는 뭘 다룬 것인가 싶습니다.)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핵심만 적어 두고자 했는데 제 의도대로 되었는지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 이 서평을 쓰며 제 부족한 부분을 정말 많이 실감했습니다. 어찌 보면 저도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처럼 자신의 경계선을 발견하게 된 것일 수도 있겠군요. 다만 저는 훈련을 통해 일정 수준까지 자신의 한계를 확장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이제 한 발짝을 내디딘 셈이니 제 자신의 한계에 실망할 것이 아니라 개선할 여지를 발견했음에 기뻐해야 맞을 겁니다. 시작이 늦었으니 정진하고자 합니다. 함께 읽어주시는 분들도 앞으로도 계속될 글에서 발전된 모습을 찾아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습니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처음 읽었을 때가 1년 전인데 1년 남짓한 시간에 작품을 바라보는 눈이 많이 달라졌음을 느낍니다. 같은 작품을 읽으며 매번 다른 경험을 받는 것은 일직선 상의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특권이겠지요. 가벼운 마음으로 제 변화를 관조하고자 합니다.




글을 읽으며 거부감을 느꼈을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쿤데라의 의도는 이런 것이다’하며 단정 짓는 행위가 거부감을 유발했을 것이고, 저도 일정 부분 동의하는 바입니다. (제 생각을 전달하는 능력이 미숙한 탓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글을 읽는 독자로서 갖춰야 할 마음가짐에 대한 원칙이 여럿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교리들은 모두 ‘출간(외부로의 공개) 이후의 글에서 작가의 의도는 전혀 중요치 않으며 개인의 생각만이 가치 있고 옳은 것이다’라는 원칙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물론 개인의 해석은 논리적 비약(이때 판단의 대상이자 주체는 자기 자신이 될 것입니다.)이 아닌 치열한 고민 끝에 뒤따른 결론이어야 하겠지요. 저에게 쿤데라의 진실된 의도는 중요치 않았습니다. 제가 쿤데라의 의도를 이처럼 파악했다는 제 생각만이 중요했습니다. 작품에서 작가의 의도를 논외시하고 (작가가 글 외적으로 뭐라고 떠드는지 무시하고) 독자의 의견을 존중할 때 작품은 독자의 상상 속에서 새로이 태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이 글을 쓴 저의 의도 역시 (철저히) 무시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오로지 이 글을 읽은 독자 개인의 생각만이 가치를 가질 것입니다. 다만 한 번 공개된 글은 수정할 수 없지만 제 생각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차이가 있겠지요. 그러니 저와 다른 생각을 가진 여러분의 의견은 무조건적으로 환영합니다. 어떤 점에서 차이를 느꼈고 제 감상에 오류가 있다면 어째서인지 자유롭게 소통해 주신다면 진심으로 기쁘겠습니다. (이 진실된 기쁨 역시 바뀔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기쁨이 싫증으로 바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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