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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소아 Jun 21. 2024

비극의 관객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괴테

니체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비극을 통해 삶에 대한 직관과 대담함을 갖출 수 있었다고 말한다.* 영웅들이 맞이하는 불행한 결말은 운명의 비정함과 파멸성을 드러낸다. 그리스인들은 비극을 관람하고 이에 동조하는 경험을 통해 삶을 보다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의 주인공 베르터는 비극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지만, 동시에 비극의 관객이기도 하다. 작중 베르터는 수많은 타인의 불행을 목격한다. 레오노레의 죽음, 막내아들을 잃은 여인, 정신이 나간 남성의 이야기는 공통적으로 한 가지 결론을 함축한다. 거대한 운명 앞에 인간은 무력하고, 삶은 파멸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과부를 살해한 하인의 대목에 이르러 베르터는 더 이상 관객으로서 그들의 이야기를 관조할 수 없게 된다. 격정을 못 이겨 파멸을 맞이한 하인은 베르터 자신과 동일시되고, 타인의 불행은 “자네 친구의 이야기”**, 곧 자신의 이야기가 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운명을 직시하고도 활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충만한 생명력 덕분이었지만, 베르터는 “성스러운 생명력을 잃어버”린 이후였다. 


베르터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비극 속 영웅들이 그러하듯이,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베르터는 자신과 다른 모든 것을 비교하고 타협하며 살아가는 속물적인, 보다 인간적인 삶을 살아보고자 한다. 하지만, 이는 “자유가 싫어 자기 몸에 안장과 굴레를 채웠던 말이 결국 죽도록 달리는 신세”와 같았다. 운명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오히려 자신의 몸에 족쇄를 채우는 일과 같았고, 베르터에게는 격정을 버텨낼 생명력 또한 남아있지 않았다. 


 베르터가 보고 듣는 타인의 불행은 자신의 파멸을 암시했다. 베르터는 자신의 삶에 부여된 의도를 여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자연 만물에 내재된 절대적인 존재가, 삶을 지배하는 근원적인 흐름이, 괴테가 자신의 파멸을 종용하는 것이 분명했다. “차분하게 운명에 몸을 맡길” 수 있는 태도가 훌룡한 인간의 덕목이라고 생각해온 베르터에게 남은 선택의 여지라고는 없었다. 


아니다. 베르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존재했으며 베르터 또한 이를 내심 짐작하고 있었다. “내가 정말 영주라면….. 내 관할 안에 있는 나무들에 신경이나 썼을까?” 베르터는 마을 사람들의 일상 중 일부를 차지하던 호두나무를 베어버린 일에 대해 이와 같은 의문을 품는다. 만일 자연 만물에 내재된 절대적인 무언가가 실재한다면, 그것이 인간 개인의 소망과 행복에 관심을 가지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이는 곧 운명이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며, 베르터는 이러한 가능성을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베르터는 로테가 자신을 잊는다면 미쳐 날뛸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운명이 자신에게 무관심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던 것이다.


“하느님이 주신 값진 선물”인 상상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비유라는 매개체를 통해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믿게 한다. 이는 감각적으로 인식하기 어려운 개념이나 현상을 연상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인간과 무관한 존재에게서 인간적인 의도를 찾고자 한다는 편향성을 가지기도 한다. 베르터는 상상을 통해 인간의 삶에 내재된 근원적인 존재를 지각했지만, 이를 숙명으로 오독, 왜곡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인간에게 통시적이고 일반적인 무언가가 실재하며 인간의 삶을 파멸적인 귀결로 이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해안가의 파도가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모래성을 무너뜨려도, 파도가 악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아무런 의도가 부여되지 않은 삶에 무슨 가치가 있을까. 인간의 삶이 무너져 내릴 모래성과 같다면, 일생 동안에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기나 한 것일까. 삶이 살아가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냐는 물음에는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어도, 삶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것임은 분명하다. 파도가 모래성을 무너뜨리는 건 한 순간이지만, 자연적으로 모래성을 세우기 위해서 몇 번의 파도가 쳐야 할지 상상할 수 있을까. 이처럼 삶에서 의도를 배제할 때 남는 것은 생명에 대한 외경이다. 자유는 이 지점, 삶을 관조하는 태도에서 발원하는 것이 아닐까. 추구해야 할 가치가 없다는 것은 행해야 할 의무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과 같다. 인간의 삶에 절대적인 무언가가 내재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을 온전히 설명한다고 할 수 있을까. 자신이 관객이 되어 삶을 관조할 수 있을 때 한계와 동시에 가능성을 체감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삶의 주체가 되는 일이라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니체, 『비극의 탄생』, 박찬국 역, 아카넷, 2007 참고. 

**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허승진 역, 더스토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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