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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색경단 Apr 05. 2024

세븐틴의 나나투어

완벽한 그들이 여행을 즐기는 방법

쿠웨이트라는 중동국가에서 유학생활 중이다. 겨울방학 동안 한 달간의 긴 유럽여행을 했다.



여행을 모두 마치고 쿠웨이트로 돌아온 지금은 2024년 1월 28일 일요일 오후 11시 7분.

벌써 한 달이나 지나버린 오늘이지만 몇몇 장면들이 생생히 기억나는 건 왜일까?

잊어버린 듯해 서운 했던 기억은 사진을 정리하고 글을 쓰면서 퍼즐 맞추듯 머릿속 어딘가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 여행을 마무리 지었던 것은 몇천 장의 사진에 하트를 누르거나, 나의 여행담을 가족과 공유하거나, 마구잡이로 쓴 여행자금을 엑셀로 정리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드리드와 쿠웨이트를 잇는 비행기 안 혹은 번잡한 공항에서의 입국심사 혹은 밀린 잠을 청했던 기숙사 침대와 같이 명확한 장소도 아니다.


이 여행을 진짜 마무리 지은 것은 다름 아닌,

<세븐틴의 나나투어>라는 여행 프로그램이었다.



<나나투어>는 1박 2일, 꽃보다 할배, 삼시세끼와 같은 유명 여행 예능을 연출한 나영석 PD가 가이드로 변신하여 아이돌 그룹 세븐틴과 함께 즉흥 여행을 떠나는 프로그램이다. 나영석 PD님의 예능으로 힐링하고, 세븐틴의 오랜 팬으로서 그들에게 힘을 얻어온 나는 쿠웨이트로 돌아온 바로 다음날부터 나나투어를 보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아이돌이 여행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아주 흥미롭다. 내가 이 프로그램에서 기대했던 부분은 '멋진 사람들이 아름다운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재밌는 게임을 하면서 주는 적당한 설렘과 에너지' 딱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매화가 나올수록 흥미는 점차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뭐든지 완벽해 보이는 그들이 진심을 다해 여행을 즐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말이다!


조그마한 것에도 예쁘다, 맛있다, 즐겁다, 행복하다는 말을 거듭 반복하며 감탄을 아끼지 않는다.

나피디님이 여행을 간다고 말하는 순간, 여행지가 이탈리아라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순간, 숙소 침대를 고르며 신나 하는 순간, 용돈을 받고 좋아하는 순간, 피사의 사탑을 처음 본 순간… 특히, 젤라또 가게에 줄을 서서 어떤 맛을 먹을지 거듭 고민하는 그 장면이 아직도 생각난다.


13명의 세븐틴 멤버는 모두 돈 많고, 잘생기고, 해외도 자주 나가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유명 아이돌 그 타이틀에서 파생되는 자존감까지 가지고 있는 상위의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지 세븐틴이 즐거움을 느끼는 기준은 매우 까다로울 것이라는 추측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나 보다. 사소한 것들에 소리 내어 웃는 세븐틴이 큰 반전으로 느껴졌다.


참 이질적이면서도 부러웠다.

나도 젤라또를 먹었는데... 어마어마한 야경을 봤는데... 왜 저런 설렘과 즐거움을 마음껏 사용하지 않았을까? 한 달 동안 여행을 다니면서 옛날에 비해 심장이 조금 더 굳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일까. 여행 도중 계속 질문했지만 답을 찾을 순 없었다. 그러나 <나나투어>를 보고 있는 지금, 조금 알 듯하다. 나에게 너무 높은 즐거움의 장벽이 들어서 버린 것은 아닐지.



"세븐틴은 돈이 많으니까 비싼 것을 보고 먹어야만 행복하겠지. 세븐틴은 잘생겼으니까 눈이 높아서 사소한 것에는 무심하겠다. 세븐틴은 해외에 자주 가니까 이국적인 풍경에 별로 감탄하지 않을 거야. 세븐틴은 연차가 쌓인 연예인이니까 뭐든 가려가면서 할 것 같아."



세븐틴이 가진 대단한 것들이 즐거움으로 향하는 길에 장벽을 쌓고 있다고 감히 예상했다.

나 또한 조금씩 업그레이드되는 부분들 (나이, 학력, 경험 등등…)에 맞춰 즐거움의 장벽을 높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장벽을 넘을 수 없다면 아무리 마음이 움직이고 신나는 일들도 외면해 왔으니 결국 즐거움에 무뎌졌던 것.


마치 초등학교 고학년에 진학하면 보니하니가 재미없는 척하는 것처럼, 고작 초코파이 하나 때문에 수업 시간 손을 들고 깜짝 퀴즈를 맞히지 않았던 중학생의 나처럼, 더 이상 마술 공연에서 무대에 나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당시 나는 동생을 핑계로 보니하니를 보며 속으로 웃었고, 초코파이가 굉-장히 먹고 싶었고, 어른이지만 대왕 비눗방울 속에 들어가고 싶었다. 즐거움을 애써 무시했던 나의 과거는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즐거움의 장벽을 쌓아왔음을 증명한다.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여러 핑계를 들며 미루고 또 미뤘다.




<나나투어>를 보며, 이 글을 쓰며 다짐한다.

1. 즐거움을 쫓는 기준은 없다.

2. 즐거움에 관대해지자.


유치한 활동에 크게 웃고, 맛있는 음식에 극찬을 날리고, 멋있는 풍경에 한껏 취해보고, 작은 상품에 몸을 던져보고, 신나면 춤도 추자. 이제야 알 것 같다. 시간이 흘러도 여행의 몇몇 순간들이 놀랍도록 생생한 이유를. 이렇게 '진짜 즐거움'에 충실한 순간은 심장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 먼 미래에 지금을 회상했을 때 나의 모든 날들이 생생하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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