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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색경단 Apr 05. 2024

60년 전 독일 이야기

브런치 스토리를 시작하는 이유

오은영 박사님이 방송에서 자주 사용하시는 예시가 있다.


“여러분,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중간고사 수학 점수를 적어보세요. 기억 안 나시죠? 그렇다면 이제 시험을 앞두고 밤을 새우고 눈을 비비고 졸음을 참으며 공부했던 기억을 떠올려보세요. 어때요? 우리는 과정의 기억으로 살아가는 것이지 점수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공부한 기억에 대해 떠올려보라고 하는 순간 출연자들은 자신의 경험담을 마구 쏟아낸다. ‘그래 그래!’, ‘맞아!’라는 말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며 서로의 경험에 공감하고 당시의 열정을 공유한다. 점수를 기억하라는 질문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이 방송을 갓 성인이 된 후 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지도 않았었지만 2학년은 물론, 가장 최근에 본시험 점수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6시에 간신히 잠을 깨고 독서실로 향한 기억, 졸릴 때 샤프로 손등을 찔러본 기억, 독서실에서 날짜를 잊고 공부하다 원서 접수를 놓친 기억, 친구들과 점심을 먹으며 서로 문제를 내주었던 기억만큼은 그때도,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느꼈던 감정과 했던 생각까지 전부 떠오른다. 대학에 붙었을 때, 모든 공을 생기부에 쓰인 점수와 활동들로 돌렸지만 과거를 회상하는 지금, 그것들을 얻게 된 과정에 감사하다.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든 그 결과에 담긴 스토리는 원동력과 행복, 성장을 이끌기에. 실패와 성공에 상관없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용기를 준 것은 ‘스토리’였으니까.



할아버지의 치매 증상이 완화되지 않는다.

동생을 알아보지 못하시고, 밤과 낮을 구분하지 못하신다. 새벽에 뜬금없이 전화하실 때도 잦아졌으며, 할아버지의 꿈과 현실의 경계가 점점 허물어지고 있음이 확연히 느껴진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설날 연휴 할아버지 댁을 방문했을 때 가족들이 전부 놀라는 일이 생겼다. 할아버지께서 60년 전인 20대 시절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께선 광부로 일하기 위해 3년을 독일에서 보내셨고 그동안 많은 유럽 국가를 여행하셨다. 동생과 내가 당시 사진을 보고 싶다 말씀드렸더니 앨범을 펼쳐 사진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매우 들뜨신 목소리로 사진에 찍힌 사람들과 장소, 찍게 된 배경을 설명하시는데 며칠 전의 일처럼 자세히 알고 계신 모습에 우리 가족의 눈이 동그래졌다.



“얘가 하숙집 아들인데 나를 많이 따라다녔어.”

“이때 경비가 막 쫓아와가지고 내려가라고 소리 지르는 거야 (웃음)”

“에펠탑, 이건 개선문, 여기가 아마 몽마르트란 말이야...”

“막 외국영화 보면 커피숍 길바닥에 있는 테이블에서 뭘 먹는다고. 그거 해보고 싶어서 저랬지.”

“이 양반이 도박을 그렇게 하고 다녔어. 딸 하나, 아들 하나 있었는데 나중에 부인하고 이혼했다고. 독일에 있는데 부인이 바람을 폈더라고.”



할아버지의 60년 전 기억은 현재의 그 어느 기억보다 뚜렷했다. 비행기 탈 때 입었던 정장의 질감까지 설명하시던 할아버지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처음으로 감정을 말씀하셨다. 그때가 ‘재미’ 있으셨다고. 할아버지는 당시 월급을 얼마만큼 받았는지는 기억 못 하시지만,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카메라를 산 순간은 기억하신다. 텔레비전을 켜는 법은 어려워하시지만, 에펠탑과 몽마르뜨, 개선문을 기억하신다. 최근의 삶은 거의 잊으셨지만, 지금까지 할아버지를 이끌어 온 찬란한 20대의 스토리는 생생히 추억하신다.




나도 언젠간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을 기억하며 살아갈 것이다. 결과보단 스토리를 기억하며 살아가고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 스토리가 마냥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 그 기억이 인생을 이어나갈, 혹은 현재에 충실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면야.


과거 어떤 스토리를 품고 살아왔을까? 지금은 무슨 스토리를 만들며 매일을 살아가고 있는가? 앞으로는 누구와 어떻게 스토리를 써 내려갈 것인가?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겠다는 목표를 위한 또 다른 목표는 스토리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 이제 이 스토리, ‘나의’ 스토리를 마주하며 인생의 다음 단계를 밟아볼까 한다.








보고싶은 할아버지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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