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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 백 Feb 01. 2024

그대로 둠

그대를 위해, 그대로 둡니다.

성인이 된 후 가치관적으로 가장 큰 변화라면, 세상을 그대로 두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제야 나는 조금씩 세상과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듯하다.


 워낙 분석이나 해석하기를 즐겨하고, 직관도 강한 편이라 내게 주어지는 상황이나 사람들을 나도 모르게 ‘나의 방식’으로 재해석하곤 했다. 더해 늘 ‘정의’라는 명목으로 양 쪽 중 하나의 입장에 서거나, 무엇이 선인지를 판단해야만 했던 학창 시절 때문인지, 특유의 ‘정의’나 ‘옳고 그름’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이러한 성향은 뚜렷한 가치관과 깊은 통찰력을 가지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만의 선에 갇혀 타인과의 다름을 틀림 취급하고 타인을 받아들일 공간을 축소시켰다. 이를테면 나는 나와 맞는 사람들과 상황들을 먼저 정해두고 그렇지 않은 상황은 먼저 피해버리기도 했다. 예컨대 나는 외향적인 사람들이랑은 안 맞아, 현실적인 사람들은 왜 이상적 세상에 별 관심이 없을까, 진지하고 성숙한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이야, 같은 생각으로 늘 내가 익숙하던 세상을 찾아다녔다.


 그렇지만 대학생활을 돌아보면 나의 깨달음은 새로운 세상, 즉 다름을 경험하는 과정 속에 찾아왔다.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이들의 순수한 애정, 현실을 직시하고 그에 맞는 담백하고 효과적인 대처를 하는 지혜, 유쾌한 사람들이 주는 기쁨과 스트레스의 해소. 나와는 참 다르지만 너무나도 아름답고 매력적인 모습들이었는데. 나는 나와 다른 모습, 또는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섣불리 싫다, 라고 말한 것이 아닌가. 나의 가벼운 싫음들이 무겁게 부끄럽다.


 요즘에 나는 무언가를 쉽게 미워하거나 싫다고 말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그대로 두려 한다. 이해할 수 없는 것에는 섣불리 결론 내지 않고 미결 사건으로 둔다. 강아지의 목줄을 잡고 내 곁에 두려는 게 아니라, 언덕을 뛰노는 그 강아지의 흩날리는 털을 본다.


 ‘그대로 둠’의 태도는 내가 세상에 조금 더 편안하게 존재하게 하고, 세상이 내 안에 담백하게 머무르게 한다. 섣부르게 무언가를 단정 짓거나 타인을 마음대로 곡해하지 않으면서 받아들이게도 한다.


 첫째로는 특성 자체의 다면적인 모습을 받아들이게 한다. 모든 특성은 각각의 산과 바다가 있다. 예를 들어 감수성이 풍부하다면 공감을 잘하고 따뜻한 말을 들려주지만 감정 기복과 순간의 예민함이 있는 편이고. 내성적이고 차분하다면 유쾌하기도 어렵다. 그런 모습들을 장점이나 단점으로 분류하지 않고 그냥 그렇구나, 의 영역으로 남겨둔다. 특성 내에 공존하는 양면성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네가 어제는 펑펑 울고 오늘은 세상 밝게 웃어 보여도 괜찮아.


 둘째로는 사람 내에 공존하는 여러 모습들을 인정한다. 오늘 나에게 무례하게 굴었다고 해서 지난 시간 동안 보여준 따뜻한 모습들이 거짓되는 것도 아니고, 이제 우리는 만날 일이 없다고 해서 지난날 함께 쌓은 추억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일적으로는 정말 안 맞지만 친구로서는 너무 좋은 관계일 수도 있다. 인간관계란 생각보다 유약해서 타인에게서 본 작은 단점이 실망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아쉬운 마무리는 긴 시간을 빛바래게 하기도 하고. 그러나 단점의 파장이 관계 또는 시간 전체에 퍼져나가는 것을 막아보는 건 어떨까. 미워하거나 실망할 필요도 없어, 그냥 나와 너는 이럴 때 이랬고 저럴 때에는 저랬던 거다. 세상에 여러 색이 존재하듯 나는 사람의 다양한 모습들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네가 나를 최악의 동료이고 동시에 최고의 친구라고 여겨도 괜찮아.


돌이켜보니 더욱 안타까운 것은, 어떤 것을 쉽게 싫어하는 만큼 나 자신도 쉽게 싫어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진지하기도 하지만 장난치기도 좋아하고, 엉뚱하게 굴기도 한다. 그렇지만 후자의 모습이 너무 가볍고 애 같아서 싫었다. 나는 일반적으로는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지만, 가끔씩은 분노나 우울이 끓어오를 때가 있다. 그럴 때엔 이성적이고 차갑지 못한 내가 싫었다. ‘좋은 나’의 특징을 정해두고 변수를 통제하려 들었으니까. 인지한 나의 모습들을 스스로 선과 악으로 분류하다 보니 나는 나와 공존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의 어떤 모습들이 좋다,라고 하면 내가 꾸며낸 모습을 좋아하는 것 같아 불안했고,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의아했다. 타인에게서 들어오는 부정적인 피드백에는 완전히 잠겨 자신을 난도질하기도 하고.


 이제 나를 그대로 두는 연습을 해야겠다. 타인의 피해를 주지 않는 개인적인 영역에서, 나의 기본적인 특성들을 관찰하고 받아들여야겠다. 각 특성들과의 충분한 대화를 거치고 나 자신을 이해할 때 나는 나의 모습들을 단정하게 꺼내어 세상과도 이야기 나눌 수 있겠지. 나의 미숙함은 늘 나 자신을 꾹 누를 때 그 사이를 울컥 비집고 나왔었으니.


 최근에 만난 너와의 대화에서 나는 ‘너의 이런 모습이 좋지만, 네가 이래서 좋은 건 아냐.’ 라고 했었다. ‘훗날 본 네가 이런 모습을 가지지 않더라도 그런대로 네가 좋을 거야.’라고도 말했다. 이 말의 함의를 너는 알고 있었을까. 이제 나는 조각이 아니라 너의 입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거야. 너를 좋아할 자신은 아직 없어. 하지만 너를 베어서 어떤 단면이 나오더라도 너를 싫어하지 않을 거야. 문득 좋아함도 싫어함도 없어도 사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할 말은 충분히 썼지만 나는 이 에세이의 결론을 내지 않을 거다. 평소라면 내가 주욱 늘어놓은 문장들을 툴툴 털어 단정히 결론 내었겠지만, 나는 이제 서론과 본론이 길고 결론이 없는 레포트들을 빼곡히 쌓을 거니까, 이 에세이에서부터 연습할 거야.


그대로 둔다는 건 매너리즘에 빠져 무기력해지겠단 뜻이 아니다. 난 늘 그렇듯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상의 흐름을 열심히 분석하고 들여다보겠지. 다만, 내가 해결하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들여 세상을 그대로 두는 연습을 해 본다.


그대로, 그대로 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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