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호초로 둘러싸인 화산섬에선 새들이 자유로웠다. 가끔씩 폭우나 강풍이 일었지만기온은 언제나 온순했고,큰 숲은 어디서나 둥지를 틀 수 있을 만큼 넉넉했다. 새들은 부러 정글 속 깊이 몸을 숨기지 않았고, 지천에 널린 먹잇감으로 싸우지도 않았다. 새들은 섬의 주민이 되어 작은 생태계에 조응했고, 섬 곳곳을 매일같이 돌아다니며 조막만 한 보물을 숨겼다. 보물이란 섬에서 자라는 카라비아의 열매였다.
새들은 그것을 끔찍이 아꼈는데 열매를 씹지 않고 그대로 삼키곤 했다. 그리고선 슬슬 아랫배가 부풀어 오르면 적당한 장소를찾아 열매를 배설했다. 그런 습관적인행동이 언제부터 반복됐는지 알 수는 없지만, 새들이 더 이상 날지 않게 되면서부터라고 추정한다. 도도새는 그렇게 화산섬에서 가장 잘 길들여진 동물이었다. 달아날 이유가 없었기에 천천히 날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경험일 테지만, 모리셔스 섬에선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러다 16세기 바다를 항해하던 포르투갈 선원들이 모리셔스 섬을 발견했고, 이후 네덜란드가 섬을 지배하면서 섬은 범죄자의 유배지로 사용됐다. 사람이 살지 않던 섬에는 곧 범죄자와 함께 개, 고양이, 원숭이 등외래종이 침입했다. 그것들은 도도새의 알을 훔쳐 달아났고, 사람들은 도도새를 보이는 족족 죽였다. 배를 곯아서가 아니라 고작 재미로했던짓이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던새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작 날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리 쉽게 멸종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리셔스 섬에서 벌어진일대 사건을 두고 도도새의 법칙을말한다. 그것은 도도새가섬의 풍족한 환경에나태해졌을뿐더러, 스스로 날기를 포기했기에 도태됐고,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선끓임 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생존 가능성이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는뜻이다. 한때 우리에게 이런 도도새의 법칙을 종종 인용했던 대통령이 있었다. 지금은 자신이 비난했던 도도새의섬 같은 곳에고립된 채 살고있다.
도도새의 그림을 보면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을 가졌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고 거칠어서 가축으로 삼기에 적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그리고 그런도도새가 길들여지지 않았다는 건 자연적 본성일 테다.그럼에도 사람들은 총칼을 들어새들을 위협했고 무분별한 사냥을 했다. 얼마나 잔인했던지 현재까지 도도새의 온전한 뼈를 찾을 길이 없다. 상황이 이런데도사람들은 도도새를 바보새라며 조롱한다. 자신들이 저질렀던 참혹한 살육 현장을 낭만적인 모험처럼 떠들면서, 모리셔스 섬엔 아주 먼 옛날날지 못하는 새들이 살았다는 이야기를 전설처럼 말한다.
도도새를 멸종시켰던 인간의 난폭성은 현재 진행형이다. 심지어 그런 폭력은 같은 종족인 인간을 상대로 자행되고 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이나 우크라이나에는 순진무구한 사람들이 죽고 있다. 인간의 탐욕은 그림 리퍼의 대낫보다 치명적이어서 살아남은 자도 불안케 한다. 그래서 멸종의 위험은 그림자처럼 늘 우리곁을 따라다닌다. 특히,건설현장 등에서 이를 경고하는 신호가 자주 감지된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이윤 창출을 위해 산업안전 비용 보다 노동자의 죽음을 싸게 치르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도도새가 섬에서 멸종되었던 것처럼산업현장에서 분주히 일하던 개미들도 조만간 전멸될지 모른다.
날지 못하는 새들은 야생과 가축의 삶 중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한 적이 없다. 오직 인간에 의해 들닭과 집닭으로나뉘었을 뿐이다. 그리고 인간은 집닭으로 구분된 것을 길들인다. 그런데 길들인다는 건 무슨 뜻일까? "길들인다는 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네가 날 길들인다면 우린 서로 필요해진단다."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말했다. 길들임은 서로를 소중히 생각하는 것이다. 길들임에는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고,천천히 다가가는 인내가필요하다. 여우는 자기처럼 길들이지 않은 동물들이사냥되지만, 길들인 닭은 큰관심을 받는다며 닭처럼 자신을 길러주길 부탁했다.
하지만 그런 여우라도 케이지 안에있길 바라진 않을 것이다. 그것은 길들임이 아니라 사육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대랑의 육계나 계란을 생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배터리 케이지에선 길들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누가 빨리 생산을 많이 하느냐를 다룰 뿐이다. 그 속에서 삶은 세상과 단절된 채 그저 의미 없이 주어진 것이다.소비를 위한 사육에선기다림은 곧 지체이고 실패를 뜻한다. 그건 여우가 바랐던길들임과는다르다.
도도새의멸종은 무분별한 욕심과 무관심 때문에 일어났다. 길들임 없이 폐기된 도도새는 우리 모습을참닮았다. 작은 날개가 있지만 쉽게 자유로이 날 수 없다는건 절망을 뜻한다. 절망은 도도새처럼한순간사라질지 모르다는불안때문이다.그래서 정말로 중요한 건 서로를 길들이며 소중히간직하는것이다. 도도새가 사라진 지 300년이 지난지금, 우리는 그런 사실을 자꾸 잊는다. 그리고 서로를길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도도새의 역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