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오래된 연식의 SUV 차량이 있지만 서울에서 일정 수행을 위해 이동할 때에는 지하철을 이용한다. 주차 스트레스도 싫고 길이라도 막히면 차 안에서 할 수 있는 건 음악 듣기 외에 없고 운전 이후에는 집중도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차 없이 서울에서 일상생활을 어려워하는 지인들도 꽤 많지만 난 지하철族이다.
그러나 지하철역 근접 지역일지라도 꽤 불편한 곳 중 대표적인 곳이 신라호텔일 것이다. 3호선 동대입구(역 명칭에서도 신라호텔을 알 수 없다)에서 내려 5번 출구로 나오면 장충체육관의 웅장함을 뒤로하고 전통문을 통해 스키장 상급자 코스 수준의 아스팔트 등산이 시작된다. 그것도 한참 걷는다.
7월 셋째 주 어느 날 신라호텔에서 회의 일정이 생겼다. 스트레스가 생겼음을 말할 것도 없다. 그래도 중요한 자리이기 때문에 땀이건 비건 흠뻑 젖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도 실례일 것이라는 중압감도 있었다. 한 시간 전에 도착해 호텔 로비에서 빵빵한 에어컨 속에 있으면 감쪽같으리란 생각도 했다. 그러나 오전에 집에서 뜸을 들이다 보니 샤워 시간이 빠듯해 보였다. 이번에는 택시를 타야겠다 마음먹었는데 택시 어플을 사용하지 않고 은행 업무 보고 근처 택시 승강장으로 가서 맨 앞에 대기해 있는 택시를 보았다. 요즘 흔하게 카카오 캐릭터가 큼지막하게 뒷좌석에 그려져 있는데 이 택시는 밋밋하다. 탑승 후에 내가 인사하기도 전에 기사님이 '어서 오세요!' 인사를 건네시는데 좀 나이 든 음색이어서 보았더니 모자를 쓰고 계셨지만 뒷 머리는 하얗다.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신라호텔로 목적지를 말했고 난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찾아보았다. 오전시간에 올림픽대로는 꽉 막힌 길이다. 내가 잠시 정면을 응시하는 동안 기사님은 거울로 내 얼굴을 살피시더니 도로 밑의 탄천 주차장으로 냅다 달리신다. 혼잣말로 너무 막히네라고 하셨지만 나 들으라고 하신 말씀 같다. 그런데 속도에 비해 엔진 소리가 커서 기어박스를 봤는데 기사님은 수동 변속기에 손을 놓고 계셨다. 운전면허를 수동으로 획득한 사람으로서 알아차릴 수 있는 전형적인 수동조작 운전자의 모습이다. 이후 택시내부와 기사님을 관심 있게 둘러보았다. 아.....이 기사님은 좌석벨트도 안 매고 운전 중이시다. 또 흘러나오는 라디오는 교통방송도 아니고 AM 방송 프로그램이며, 정체불명의 경음악인데 음악검색 어플로 제목을 찾아봐도 '검색결과 없음'이다. 이 모습이 신기해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두었다.
수동 변속기보다 더 놀란 것은 대시보드에 아무런 기기가 없다. 탑승전에 그 흔한 카카오 캐릭터도 보이지 않았는데, 교통흐름을 반영해 손님과 분쟁을 줄여주는 내비개이션도 없고 카카오 호출대기 단말기도 없다. 요즘 택시 타면 음악보다도 '카카오T' 호출 소음이 없다. 그야말로 잠실에서 신라호텔까지 베테랑 감각으로 올림픽대로를 타고 동호대교를 지나 신당동을 거치는 동안 차선변경도 무척 자연스럽다. 나이 드신 기사님이어서 살짝 불안했던 마음은 이미 사라졌다.
택시를 탄 보람은 역시 신라호텔 등반 코스를 걷지 않고 편하게 올라간 부분이다. 마지막에 기사님이 내게 한 부탁이 절정이다. '손님, 현금으로 계산해 주시면 좋겠는데요....'. 난 순간 많은 생각을 했다. 현금? 지갑을 들여다보니 1만 원권 세장이 있다. 그런데 미터기 요금은 14,300원이다. 아, 거스름돈이 동전으로 최소 세 개다. 내가 먼저 우수리를 떼어 달라 말하기도 좀 불편하다. 그래서 솔직히 말했다. "기사님, 현금은 있습니다만 동전 생기는 게 싫어서 카드 하고 싶은데요."라니 기사님은 "깎아 드릴게요." 라신다. 하차 직전의 기사님의 사용하신 용어가 신기하다. '현금 계산', '깎아 드린다.' 사실 요즘 택시에서 거의 사라진 말들이다. 요즘에는 '결제', 그리고 카드터치 아니면 어플을 이용해 택시 타면 말도 않고 내리면 자동 지불이다.
내리기 전에 깎지 말고 거스름돈 달라했더니 기사님 표정이 환해지셨다. 천 원 짜리 거스름돈을 세시며, '하나, 두울, 서이(셋), 너이(넷).....'라신다. 그렇게 5,700원을 거슬러 주시고 더운데 좋은 하루를 보내라고 소박한 기원을 해 주신다. 나도 기사님께 운행 중에 수동변속기가 반가워 기사님 뒷모습을 촬영했다고 고백했다.
택시도 노포가 있다. 요즘 택시는 목적지도 말하지 않고 운행 내내 불필요한 대화를 기사분과 하지 않아 난 좋다. 그런데 이 노포 택시 기사님과 운전에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간단한 대화를 못 해 아쉬운 생각이 들었지만 기분은 좋게 하루를 시작했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