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by 생강도넛

벌거벗은 임금님

임금이 새 옷을 입고 시가행진을 하고 있지만, 아무도 그 옷을 보지 못했다. 그래도 거리에 나온 군중은 손뼉을 치고, 환호했다. 서로 "멋지고 근사하다"는 말까지 주고받았다.

아이 하나가 소리쳤다.

"임금님이 벌거벗었어!"


어른들이 하나둘씩 동의하고, 왕은 그제야 진실을 깨닫고 부끄러워 얼른 궁전으로 돌아갔다.


이래서 우화입니다.

그런데 만일, 어른들이 꼬마의 말을 못 들은 체하거나 되레 야단을 쳤더라면요?


어른들은 짐짓 듣지 못한 척했고 아이의 엄마가 아이의 입을 허겁지겁 막았다. "조용히 해라."

행렬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움직였다. 음악이 울리고 사람들이 계속 박수를 쳤다.


음악은 말리(스크루지 친구 유령)의 옷을 입었다.

오랫동안 음악사(클래식)의 여러 장면들을 마주할 때마다 벌거벗은 임금 우화가 떠올랐습니다. 어쩌다가 우리는, 음악가들이 살아생전 입지 않았던 옷을 보고 있을까요? 그들이 거울에 제 모습을 다시 비춰 보고, 우리를 눈여겨볼 수 있다면, 저 아이처럼 했을 겁니다. "우리는 그 옷을 입지 않았다!" 그때 우리는 그들의 진실을 받아들일까요?


음악에도 군중의 입장과 같은 순간이 자주 있어 왔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신성하거나 아름답거나 도발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슬퍼서, 그것으로 음악을 받아들이고 나서는 진실을 외면하고 싶어 하는 그런 장면들 말입니다. 헨델의 '메시아'가 그중 하나입니다. 신의 영감이 만든 작품. 하늘의 노래라고 박수갈채를 받으며, 크리스마스와 부활절마다 불리는 신성과 경외의 노래.


아아. 그러나 이 노래는 유감스럽게도 천상의 음악이 아니에요. 런던의 정치, 쇼비즈니스, 시장 경제, 영국 국교회, 런던의 금융, 명예, 팽창하던 식민주의, 음악가의 노력과 욕망, 기근, 군중심리 등이 한데 얽혀 빚어진 세속 그 자체였답니다.


옷으로 보자면, 희고 밝고 자체발광하는 천사의 날개옷이 아니라, 디킨스의 후회하는 유령 말리(크리스마스 캐럴)가 입었을 법한 세속의 온갖 때가 묻은 옷, 옷만으로도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옷을 입고 있어요. 헨델은 세속의 일부였으며, 세속의 방해와 응원과 도움과 무시를 동시에 받으며 음악가로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의 일상과 인생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음악은 언제나 사회적 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언젠가부터 유럽에서는 음악이 개인의 천재성과 예술적 영감의 산물로만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음악(가)과 사회 사이 실재하는 관계가 외면당하고, 음악가의 개인적인 면만 중요하게 여김 받는 풍조가 생겼습니다. 음악(가)은 사생활만 하지, 사회생활은 하지 않는 것처럼요.


눈을 들어 넓게 그 주변을 보자고요. 그리고 현장을 복원합시다. 그렇게 한다면 음악과 사회가 함께 살아온 모습, 음악의 사회생활과 문명사적 생애가 훤히 보일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음악가들의 참모습이 드러나고, 그들의 땀과 눈물과 웃음과 열망과 질투와 초조함과 기쁨이 우리 눈에 들어올 테지요. 아름답거나 숭고하거나 비극으로 포장된, 음악가 자신은 입어본 적도 없는 옷이 아닌 진짜 옷을 입은 모습을 만나봅시다.


회사후소 (繪事後素)

우리가 엉뚱한 옷을 입혀놓은 음악가와 음악의 순간들이 제법 있습니다. 그래서 <클래식의 사회생활>라는 제목으로 여러 음악과 음악가들을 만나고자 합니다.


나는 첫 번째로 헨델과 그의 오라토리오 작품 <메시아>를 정했습니다. 시리즈에 앞서, 헨델뿐만이 아니라 근대 유럽 클래식 음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문명사적 배경이 되는 몇 가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아요.

질문은 아래와 같은 것들입니다.


1. 고대 그리스에서 음악은 무엇이었을까?

2. 고대 로마-중세 유럽- 근대 유럽에서 음악의 실제 모습이 궁금하다.

3. 바로크 시대에 카스트라토라는 독특한 음악가들이 있었던 이유는 뭘까?

4. 오페라가 뭐길래 헨델이 그렇게 집착했을까?


적다보니, 의외로 길고 단조로운 과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우리는 21세기 한반도에서 살고 있잖아요. 그래서 고대, 중세, 근대의 유럽 음악의 배경을 간단하게나마 살펴보는 일에 품이 조금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약간의 시간과 열린 마음도요. 무엇보다 우리 현대인의 관점, 도덕, 가치관을 뒤로 미뤄두고, 그때, 그 자리, 그 사람들의 관점과 관심과 두려움과 도덕 가치를 있는 그대로 봐주기로 해요. 그래야 진짜 모습을 조금이라도 만날 수 있을 것예요.


그래서 나는 이 부분에 회사후소 繪事後素라고 이름을 붙이고자 해요. '그림 회, 일 사, 뒤 후, 흰 바탕 소. 흰 바탕을 잘 마련한 다음에야 색을 칠한다.' 공자는 착한 마음과 인격을 갖춘 다음, 학식을 쌓아야 한다는 의도로 이 말을 했습니다만, 나는 음악의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배경을 알고 난 다음, 음악을 즐기자는 의미로 사용하려 합니다.


이 질문들을 해치운 다음, 헨델작품 <메시아>로 넘어가 봐요. 런던 주식 금융 시장, 왕실, 노예무역, 자코바이트, 영국 국교회, 유행, 통념, 귀족, 자본가들, 영토 분쟁, 기근, 이탈리아 음악가들, 아일랜드, 런던의 대중, 런던의 쇼비즈니스 세계 등, 많은 세상일과 사람들이 헨델에게 영향을 주었고, 헨델이 이것들을 이용하기도 하고 이용당하기도 했습니다. 이 일들이 모여 어떻게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만들었는지 따라가 봅시다. 메시아를 작곡한 이후 헨델과 그의 음악은 무슨 까닭에 세상에 남아 소중해지고 보편의 음악으로까지 나아갔는지 말입니다.


다음 페이지에서 당장 고대 그리스의 음악의 달인, 오르페우스를 만나러 가려고 합니다. 그를 만나면,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음악(가)이 실제로 무엇이었는지 알게 될 것 같습니만, 그가 순순히 우리의 면담 요청에 응할 지는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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