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왕십리 Nov 26. 2024

터널

01. 친구


01. 친구 


    

무더위 끝자락에서 옷 속을 스며들며 피부를 감도는 선선한 바람의 느낌은 신비에 가까웠다. ‘아! 이제 살겠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승을 부리던 늦더위가 정을 있는 대로 떨어트리고 어제 갑자기 사라졌다. 

베이징 올림픽 야구 중계를 저녁 늦게까지 시청한 정현이는 아침 출근 준비에 늦장을 부렸다. 야구 승리의 쾌감도 남아있고 오늘 회사에 특별히 신경 써야 할 일도 없는 해방감도 컸다. 

모처럼 여유로움을 즐기고 싶은 그는 커피잔을 들고 창가에 섰다. 갑자기 높아진 파란 하늘과 그 무더위에도 녹아내리지 않은 진녹색 숲을 바라보며 요즘 같은 평온함에 이렇듯 마음을 놓고 있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사장실을 나와 잠시 썰렁한 비서실을 서성거렸다. 아직도 공석인 여비서 책상은 뒤편 창문을 통한 늦여름 햇빛만 드리우고 있었고. 옆 칸막이벽에는 자신의 일정표가 오래전 그날을 마지막으로 색이 바랜 채 붙어있었다. ‘저 자리가 없어지면 그 아이의 기억도 영영 사라져 버리지는 않을까.’ 그 자리를 정리하지 못하고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본인의 애잖은 마음을 느끼며 작년 이맘때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는 그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완전히 불에 타 한 줌의 재가 되어버린 시절,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다니.’ 중년의 나이에 세상이 각각 둘로 나뉘는 경험을 했다. 그 아이와 함께한 시간과 그 외 시간으로…. 

어느 날, 아침 해 떠오르면 걷힌 안갯속에서 여신같이 나타나 자신의 품으로 들어오던 순간의 기억은 일생의 가장 화려한 걸작으로 남겨있었다. 그 아이에게서 풍기는 신선함은 다른 세계로의 여행이었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나라였다. ‘지금은 어느 누가 그 황홀함에 취해 밤낮을 잊고 있을까.’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 떨어지듯 울컥하는 마음이 파도 되어 멀리멀리 사라진다. 

아침부터 덧없는 생각으로 마음이 아려오는 그는 니글거림에 매운탕을 떠올리고 바로 정준호 전무의 방으로 향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항상 받아줄 수 있는 유일한 친구가 가까이 있어 행복했다.

“회의가 이제 끝난 거야?” 마침 월요일 임원 회의를 주관하고 돌아는 정 전무를 복도에서 만났다.

“오늘 회의가 늦게 끝났네, 무슨 특별한 사항이 있었나?”

“그런 것은 아닌데, 구미는 어떻게 해? 이달 안에는 방향을 잡아야 할 것 같은데.”

“… 그거 우선 위치만 결정하면 되잖아, 이번 주 최종자료 가지고 이야기 좀 하고, 같이 현장도 다녀오자고.” 

정현이는 오늘따라 회사일 보다 그와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에 전무실로 앞장서 들어갔다.

“어제 야구는 봤어?” 그는 어제의 흥분된 기분을 되살리려는 듯 목소리가 높아졌다.

“야구? 무슨 야구? 나는 못 봤는데.”

“아니! 이 사람, 어제 미국과 결승전이었잖아. 그것 때문에 난리였는데 뭐 하느라 그것도 못 봤어? 자네 야구 좋아하잖아!”

“아~ 나는 몰랐지, 우리 노인네 본 지가 오래돼서 시골 좀 다녀왔는데, 그것이 그렇게 대단했나?”

“그럼, 아주 대단했지, 계속 지고 있다가 9회 말에 역전시켰잖아!” 그는 맞장구 칠 상대가 없자 심드렁해졌다. 

“그나저나 어머님은 잘 계시는가?”

“잔병치레는 잦으시지만, 정신은 멀쩡하시고 아직은 건강하신 편이야, 자네도 잘 기억하시고 항상 안부도 물으신다네.”

“한번 봬야 할 텐데 죄송하기 그지없네. 언제쯤 서울 한번 모시고 오게나, 식사라도 대접해 드렸으면 하네.” 

“자네 바쁜 것 다 아시니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그나저나 오늘 날씨가 참 좋다!” 그는 일어서서 창밖을 바라보며 서성거리다 지나가는 말로 무심한 듯 내뱉었다. 

“요즘 그 애 소식은 없나?” 

“누구?” 그는 대답 대신 계면쩍은 미소를 띠었다.

“지금 영선이를 생각하고 있는 거야?” 

“… 일부러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궁금하기는 하지.”

“이 사람, 그만해요, 월요일 아침부터 왜 그러나! 그렇게 보고 싶으면 다시 오라고 할까?” 정 전무는 비꼬며 그의 말을 막았다.

“누가 보고 싶다고 했나! 이 사람, 농담도 못 해! 하하하!” 그들은 웃었지만 정 전무는 걱정이 되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닌가?’

“나가자,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그는 시계를 보면서 속내를 무마하려는 듯 앞장서 나갔다.     

차는 팔당대교를 지나 양수리로 향하고 있었다. 푸른 하늘과 반짝이는 물결은 보며 곧 다가올 가을을 마중 나가는 듯했다. 

강에는 웬 길 잃은 갈매기 한 마리 급히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참! 그리고 말일세, 지난 금요일에 구현이가 회사에 왔었는데 별도로 연락받은 것 없었나?” 정 전무가 차 속의 침묵을 깨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뭐? 구현이가 왜?” 그는 동생의 방문이 달갑지가 않았다.

“마침, 자네가 없어 내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 갔는데 급히 자금이 좀 필요하다고 하던데.”

“무슨 돈? 지금 철물점도 잘 되고 있다면서 또 무슨 이야기야?”

“지금 납품하고 있는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발행되는 어음을 할인해 주는 일인데 아마 이익률이 엄청 높은 모양이야, 자기에게는 둘도 없는 절호의 기회라고 1년만 도와 달라고 신신당부하고 갔네만.”

“거참! 하던 장사나 잘하지 돈놀이 그거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데, 그 사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     

황 정현과 황 구현, 어렸을 때 깊었던 두 형제간의 우애는 지금 고스란히 정현이의 짐이 되어 그를 힘들게 하고 있다. 

구현이는 학교를 졸업하고도 제대로 취업하지 못하고 있다가 겨우 형의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모난 성격으로 인한 직원들 사이 마찰 등 불성실한 근무 태도로 계속 형의 심기를 건드리더니 급기야 하도급 계약에 관여하여 부정거래를 주선하다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사실이 정현이의 아내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그렇지 않아도 시동생을 못마땅해하던 아내의 분노는 정현이를 향하게 되어 그는 별수 없이 동생을 회사에서 내보내야 했다. 

“형수의 화가 풀릴 때까지 상황을 보도록 하자.” 별수 없이 동생을 내보내는 형의 마음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때만 해도 형은 때때로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는 동생의 부탁을 지원하면서 그의 자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하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았고 그때마다 동생을 도와주는데 아내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한계가 있었다.      

차는 호수가 어느 허름한 집에 도착했다. 이미 주차장은 빈자리를 찾을 수 없었고 식당 안에는 손님들로 가득 차, 간밤의 야구시합 이야기로 왁자찌껄 시끄러웠다. ‘이런 곳에 이런 식당이 있다니.’ 

“여기 처음 와봤나? 전에 나하고 같이 오지 않았어? 여기 유명한 맛집인데.” 그는 신기해하는 정 전무에게 설명해 주었다. 

“여기 잡어 매운탕이 유명하지.”

구현이 말이야, 형한테는 어려워 말을 못 하고 일부러 나를 찾아온 모양인데 어렵겠지만 자네가 다시 한번 더 들어볼 수는 없겠나? 분명히 이번 주에 다시 찾아올 텐데.” 자리에 앉자마자 정현이가 동생의 이야기를 피하려고 하는 눈치에 정 전무는 마무리하고자 다시 말을 꺼냈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라고 그 친구도 모처럼 기회 있을 때 기반 한번 잡아 보겠다고 하는데 자네가 가능한 범위 내에서 힘이 되어 주면 좋지 않겠어? 딱 1년만 봐달라는데.”

“나는 그 녀석 그 즉흥적이고 부화뇌동하는 성격을 못 믿겠어, 처음 시작한 제과점만 해도 그래, 보기와는 달리 제빵사 관리도 그렇고 매일 재고처리 하기도 힘들다고 잘 생각하라고 내가 몇 번을 이야기했나, 홀딱 다른 사람 말만 듣고 시작했다가 주위에 경쟁업체가 생기자 1년도 안 돼 두 손 두 발 다 들었잖아.” 그는 동생의 무능함에 생각할수록 화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그 사람 능력이 그것밖에 안 되는데 어떻게 하겠어? 그래도 어쩌겠나 급할 때 도움을 줄 사람은 자네밖에 없는데.”

“이 사람아! 자네도 너무 구현이 역상 들지 마라, 자네가 매번 감싸고 드는 바람에 그 녀석이 세상 물정도 모르고 저러는 것이야!” 그는 애꿎은 친구에게 화풀이하듯 언성을 높였다. 

준호는 학창 시절 정현이보다 자신을 형이라고 더 살뜰하게 따르던 구현이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식탁에 매운탕이 끓고 있는데 그들은 수저 들 생각을 잊은 듯 멍하니 냄비만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자! 밥이나 먹자고.”   

       

황 정현과 정 준호, 그들은 다르지만 같은 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어렸을 때 넉넉하지 못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정현이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마치 세상의 고통을 혼자 짊어지고 있는 표정이었다. 

반면 아버지가 은행의 지점장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던 준호는 출중한 외모뿐 아니라 포용력과 의협심이 강하여 학창 시절 친구나 여학생에게 두루두루 인기가 많았다. 

중학교 시절 어느 날 문뜩 이러한 준호의 눈에 들어오는 애가 있었다. 수업 중 쉬는 시간에도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책만 보는 정현이가 외로운 처지라는 것을 알고 슬그머니 다가가서 물었다.

“야! 너는 이곳 출신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왔냐?”

“고향은 순창인데 이번에 이사 왔어.”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친구가 없었던 정현이는 이렇게 다가와 준 그가 고맙고 반가운 것은 당연했다.

“순창! 우리 고모님이 순창에 사시는데, 거기 군내에서 약국하고 계셔, 원진약국이라고, 알아?” 

“나는 군내에서 더 들어간 곳에 살아서 약국은 잘 모르겠는데,” 

“그런데 혼자서 무슨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냐, 놀 때 우리 같이 놀아야지.” 성격상 친구를 쉽게 사귀지 못한 정현이는 그때 내미는 준호의 손을 덥석 잡은 후 의지하며 따르게 되었다. 나이는 동갑이지만 준호가 항상 형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학을 진학하면서 방향이 달랐던 두 사람은 각자의 환경에 충실하면서 그런 불가분 한 관계에서도 벗어나게 되었다. 학교 성적이 좋았던 정현이는 일류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아르바이트하면서 학비 마련에 급급했었고, 준호 또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젊은 새엄마도 떠나면서 어려운 대학 시절을 보내야만 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서로를 잊고 지내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정현이의 결혼식 때이었다. 군대를 다녀온 후 학창 시절 가정교사로 가르치던 태광산업 무남독녀와 결혼을 앞둔 정현이는 지금까지 자신과 제일 친한 친구를 생각하다 부랴부랴 준호를 찾았다. 

“그동안 연락도 못 하고 이럴 때 불쑥 부탁하러 와서 미안하다, 이것만은 꼭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내 마음 알지!”

“그래! 너의 함진아비는 당연히 내가 해야지.” 준호도 그렇게 생각하는 정현이가 고마웠다.

그렇게 다시 만난 준호는 정현이의 간곡한 권유로 다니던 증권 회사를 떠나 정현이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고 지금까지 그와 같이 일을 하고 있었다. 준호는 친구들 사이에 자신과 정현이가 고용인과 사장으로 비추어지기도 하겠지만 개의치 않았고 정현이와 같이 일하는데 만족해하며 마치 회사가 자신의 분신처럼 앞장서서 챙겨 오고 있다.     

정현이는 보이지 않는 처가의 속박과 권태로운 회사생활 속에서도 잃어버린 자아를 찾으려 노력했었다. ‘멋있게 늙어가고 싶다.’ 틈틈이 어학 공부도 하고 평소 생각하던 그림공부도 했었다. 준호를 따라 동창회에 나가 친구들도 만나고 주말에 준호가 바쁠 때는 혼자 등산이나 골프도 다니며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이 무엇인지 찾으려 했다. 

결국, 영선이의 사건으로 그 일탈의 정점을 찍었고, 그동안 그의 마음은 완전히 회사를 떠나 있었다. 그 공백을 준호가 충실하게 회사를 지켜내 왔으며 지금 그 사건의 마무리까지 해야 했었다. 

그 후 정현이는 회사 일에 자신이 너무 소흘이 하지는 않나 스스로 반성도 해보았다. 이제부터라도 좀 더 신경 쓰고 챙겨봐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그 의지가 하루를 지켜내기가 어려웠다. 언제부터인지 신경 쓰이는 일에는 겁부터 나고 피하고 싶은 데다, 준호가 검토하여 올린 서류는 자신이 흠잡을 것이 없어,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편한 마음으로 옆에서 조언이나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정현이는 특별한 공적인 일 외에, 볼 일이 있으면 항상 준호를 사장실로 부르지 않고 자신이 직접 전무실을 찾았다.

“커피는 마셨나?” 정현이는 정 전무의 방을 들어서며 물었다.

“방금 마셨네, 커피 안 드셨으면 한잔하지.”

“아니, 나도 마셨어, 저, 내일 저녁 시간 있나?” 정현이는 자리에 앉지도 않은 채 서성이며 물었다.

“내일? 왜? 시간은 있는데. 무슨 일로?” 준호는 다이어리를 보며 말했다.

“내일 주말이잖아, 저녁 식사나 같이하자고.”

“내일이 무슨 날인가?”

“그런 것은 아니고, 집사람이 같이 식사한 지 오래됐다고 자네 보고 싶다고 해서. 하하하,”

“하하하, 너무 감사한 말씀! 고맙다고 전해줘!”

“오늘따라 컨디션 좋아 보이는데 건강한 모습이 너무 보기 좋네, 지금도 아침 운동 계속하고 있지?”

“물론이지! 우리 사장님도 골프는 운동이라고 할 수 없으니 별도로 체력단련 좀 하시게나, 요즘 체중이 더 늘어 보이는데.”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내 마음 같지가 않아, 천성이 게으른 것은 극복이 안 되나 봐.” 정현이의 시선은 계속 준호를 따라가며 부러운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사람을 여럿 대하지만 저 사람처럼 만나면 기분이 편안해지는 사람도 없어.’ 정현이는 가끔 자신이 준호에게 친구 이상의 호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생각해 보기도 했다. 긴 시간 어렵고 외로울 때 같이한 특별한 우정을 떠나, 같은 남자가 보더라도 준호의 남성으로서 매력은 때때로 그의 마음을 설레게까지 하였다.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성격에 믿음직스러운 외모는 사람들의 호감을 끌기에도 충분했고 정현이의 아내도 그런 준호를 싫어하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세상 아무 불만 없어 보이는 차분하고 예쁘장한 식당 여사장은 환한 미소로 먼저 도착한 준호 부부를 익숙하게 예약된 방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부러 입구 쪽에 자리를 잡아 뒤늦게 도착할 정현이를 배려했다. 

“여보, 저게 누구 그림이라고요?” 매번 이 방에 들어오면 눈을 끄는 벽의 그림이 있다.

“밀레.” 대답하는 준호도 볼 때마다 의아했다. ‘이삭 줍기, 만종 등 유명하고 아름다운 작품이 있는데 하필 생소한 씨 뿌리는 사람을 걸어 놨을까? 식당 주인이 평범을 거부하는 스타일인가?’

방에 들어선 정현이는 준호는 쳐다보지도 않고 혜경이에게 허리를 굽히며 두 손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혜경 씨 보고 싶어 빨리 오려고 했는데 이 사람이 무슨 치장을 한다고 늦장을 부리는 바람에 좀 늦었습니다. 용서하실 거죠. 대신 오늘 저녁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맛있는 것 많이 드세요. 하하하!”

“좋아요! 사장님 즐거우신 것은 여전하시네요, 하하하!” 혜경이도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런데 인주 씨! 오늘 환한 얼굴이 보기에 너무 좋습니다, 그렇게 젊어지기만 하면 곤란한데요, 하하하.” 준호도 장단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무슨 말이세요, 우리 혜경이야말로 아직 처녀 같은데! 오늘따라 아주 방이 환한 것이 등을 꺼도 되겠네.” 이렇게 두 집의 만남의 시작은 늘 그랬듯이 화기애애했다.

혜경아! 지난번에 이야기했었지, 우리 해외여행 가는 것, 어떻게 생각 좀 해 봤어요?” 인주는 혜경이에게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그런데, 회사에 두 분이 동시에 빠지면 안 된다고 이 양반이 주말에 국내 여행으로나 하자고 하는데 어떻게 해요?” 혜경이는 인주에게 응원을 청하듯 볼멘소리를 냈다.

“여보! 회사가 그렇게 바빠요? 우리 열흘 휴가라고 생각하고 다녀오자고 지난번에 약속하지 않았던가요?”

“인주 씨! 그게 어려운 것이 지금 그때 하고는 상황이 달라졌어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우리 업계가 뒤숭숭한데 관에서 무슨 조사라도 나오면 대처하기가 어렵습니다.” 남편에게 동의를 구하는 인주의 말에 정현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준호가 잘라 말했다. 

“아니! 은비아빠에게 물었는데 왜 당신 생각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혜경이는 항상 사장보다 앞서 회사를 챙기는 그런 남편이 못마땅했다.

“정 전무 말이 맞아요, 당신은 해외여행 너무 좋아해서 탈이야, 국내에도 좋은 곳도 많고 맛있는 것도 많은데.” 

“왜 남자들은 마음이 자주 변할까? 싫으면 관두세요, 혜경 아, 그럼 남자들은 빼고 우리만 다녀오자고.” 남편의 핀잔에 인주는 쀼루퉁해졌다. 

“그나저나 요즘 은비아빠는 어때요? 근무 전선에 이상 없나요?” 또 그 이야기를 하려고 그런가 싶어 정현이가 아내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아이, 이 사람이 지금 식사 중에.”

“아, 왜 그러세요, 아직도 걱정되세요? 하하하! 인주 씨는 은비아빠를 못 믿으면 어떻게 합니까, 이제는 믿어도 됩니다.”

“아니요, 저 양반은 조금만 방심하면 또 딴짓하는 것 아시잖아요.” 인주는 앙갚음이라도 하려는 듯 남편의 아픈 곳을 찔러댔다.

“안심하세요, 내가 있잖아요. 이번에는 잘 감시할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에도 무슨 일이 있으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또 인주 씨에게 바로 보고할게요. 하하하”

“정말 지난번처럼 못 본체하시면 저도 준호 씨 다시 보지 않을래요, 이제는 감시 좀 제대로 부탁드려요. 어쨌든 준호 씨가 있어서 든든하긴 합니다.”

“자! 혜경 씨도 있는데 창피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건배나 한잔하자고.”

그렇듯 그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의 풍경이었다.     

혜경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남편과 나이 차이도 있거니와 유난히 외모관리에 신경을 쓴 탓이기도 했다.

그녀는 정현이 부부를 처음에는 사장님, 사모님으로 부르다가 이제는 나이 차이도 많은 관계로 가끔 형부, 언니로도 대하며 그들을 많이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두 부부가 같이 만나는 날에는 혜경이의 마음이 그렇게 편하지만 않았다. 인주가 차리고 나온 옷이며 액세서리들은 설명을 들어보지 않아도 자신은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값비싼 명품들이었다. 이렇듯 경제적인 면에서 느끼는 상대적 위화감은 물론이고 남편들이 둘도 없이 친한 사이라고는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은 상하의 선입감에 스스로 움츠러드는 자신을 느끼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입은 봉급 외에 별다른 실속도 없으면서 마치 자신의 회사인 양 온몸 받쳐 일을 하는 남편 때문에 자존심마저 상할 때가 많았고 때로는 그런 남편이 가식적으로 보이기까지 해 싫었다. 그래서 그들을 만나고 돌아온 날이면 우울한 기분을 털어내는 데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keywor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