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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나무 Jul 02. 2024

잠이 오지 않는 봄

늦은 밤, 날이 선 벨소리에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이 시간에 누구지?’

  핸드폰 너머로 중년부인의 흐느끼는 소리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려 화면을 보니 정희의 엄마였다.

  “어머니, 무슨 일이세요?”

  “선생님께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 

  정희가 집으로 가는 길에 교통사고가 났다. 트럭기사의 졸음운전 때문이었다. 무슨 정신에 병원으로 뛰어갔는지 지금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날은, 오케스트라 오디션 전 날이었다. 정희는 백장미와 안개꽃이 가득한 꽃다발을 들고 활짝 웃는 얼굴로 연습실 문을 열었다.

  “선생님, 정말 감사드려요. 오디션 전에 선생님께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어요.” 

함께 연습했던 힘든 그 시간들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했다.

  “준비하면서 힘들기도 했지만, 많이 행복했어요. 잊지 못할 시간들이었구요.”

  “그래.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네. 내일 잘 될 거야. 걱정하지 말고 오늘은 일찍 푹 쉬자.”

  “선생님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조금만 더 연습하고 들어갈게요.”

  정희는 짧은 인생의 마지막 연습을 했고, 잊을 수 없는 꽃다발을 안겨주고 떠났다. 남겨진 나는 자괴감과 죄책감에 점점 피폐해졌다. 정희에게 오디션을 준비시키지 않았다면 사고는 없었을까? 다른 연습실에서 연습했더라면 무사했을까? 지정곡은 모차르트 플릇 협주곡 K313번으로 너무 어려운 곡이었지만, 정희도 나도 꼭 합격하고 싶었다. 정희는 유학을 가고 싶은 목표가 있었고, 나는 결과에 집착하여 많이 몰아세웠던 것 같다.     

 

  아마도 그날의 이별이, 기억이 나를 잠들 수 없게 만들었나 보다. 반년을 불면으로 보낸 나는 어쩔 수 없이 의사의 처방으로 토막잠을 자기 시작했다. 하지만 약의 부작용으로 고질이었던 편두통이 더욱 심해지면서 급기야 악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더 이상 삶을 지켜내기가 힘들다고 느꼈던 그때, 의사는 약을 바꿔보자고 했지만 나는 모든 약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고는 한강으로 나갔다. 고3 체력장 이후 한 번도 운동을 해보지 않았던 부실한 몸과 몽롱한 정신으로 천천히 걷기를 시작했다. 여러 날이 지난 후부터 발걸음이 점점 빨라져 조금씩 뛰는 것도 가능해졌다. 아이는 바람결에 날아가듯 어이없이 생을 마감했는데, 나는 살겠다고 미친 수탉처럼 한강을 뛰어다녔다. 집에 돌아올 때까지 정신없이 걷고 뛰고를 반복하다 보면 땀과 눈물이 뒤범벅이 되었다. 뭉친 근육에 스팀 타월을 얹어 놓으며, 문득 사라진 두통에 놀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흔들렸던 오선지도 조금씩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정희가 떠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났고, 빈자리는 점점 흐려져 가고 있다. 정희와 마지막으로 연습했던 모차르트 플릇 협주곡 K313번을 들어도 눈물이 흐르지 않는다. 내가 이래도 되는 걸까! 정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아픔을 품고 흘러가주는 세월 덕분에 살아가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이른 봄이 되면 당연히 찾아오는 불면증,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잠이 오지 않는 봄을, 흐르는 강물을 보듯 유유히 살아내는 건, 정희에게 보내는 위로이고 그리움을 전하는 마음이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잠을 기다린다. 이불의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거슬린다. 길고 긴 밤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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