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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준 Jul 23. 2024

10. 드로잉, 석고데생에 대한 새로운 접근.

석고데생을 파스텔로 그리는 모습을, 틀린 것으로 판단하는 형태로부터 감정이 담긴 왜곡을 얘기는 모습을, 치우친 구도를 폄훼하지 않고 구도 자체로 서술할 수 있는 내용과 감정에 관해 얘기 나누는 모습을 지켜본 옆지기는 신선한 재미를 느꼈나 봅니다. 데생으로 한 꼭지를 얘기해 보자 하네요.


90년대 초, 세 번의 입시라는 삼수를 하는 동안 데생의 적수를 찾아 수많은 미술학원을 옮겨 다녔습니다. 나보다 잘하는 상대의 그림을 분석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재미를 통해 입시 데생의 지겨움을 분쇄했던 것이죠. 입시 데생에서 금지된 선들을 사용하면서도 미술학원 연합시험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자존심은 입시 탈락이란 쓴잔으로 돌아왔고, 이번에도 떨어지면 군대라는 삼수생의 위기, 데생을 입시 스타일에 맞춰 뜯어고치는 굴욕은 입시 합격이란 달콤한 성공으로 보답 되었습니다.


선풍적으로 유행한 극사실주의에 대한 경이로움은 공개된 제작 과정을 마주한 순간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모눈종이와 같은 그리드를 제작하여 형태를 잡고, 사진과 꼭 같은 색감을 칠하는 모습은 마치 유치원생 색칠 공부와 다름없어 보였습니다. 영혼을 담는 예술에 대한 환상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죠. 하다못해 그렇게 증오했던 입시 데생이 그보다는 낫겠다는 자만까지 차오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는 걸 깨닫는 데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팔을 뻗쳐 연필에 손톱을 찍어가며 중심을 쟀던 것이 그리드 형식과 동일한 작업이었으며, 열심히 선을 그어 명암을 표현한 것은 ‘정확한 영역에 색칠하기'와 다를 것이 없으니까요.


선생님들이 가르쳐주지 않아 스스로 터득했던 빛에 대한 이해는 이제 인터넷 검색을 통해 간단명료하게 정리된 자료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영어지만 말이죠. 색깔이 없어야 빛에 대한 원리를 더욱 쉽게 파악할 수 있기에 하얀 석고를 선택하고, 석고 주변의 물체와 빛의 종류에 따라 석고 명암의 변화를 이해했다면, 보고 이해한 것을 색칠 공부로 표현한 것이 석고데생이 됩니다. 그러니 이 공부는 책상에 지그시 앉아 3~4시간 동안 차분하게 수학 문제를 푸는 것과 다를 것이 없어요. 원리를 이해하고 다양한 차이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옮겨 담는 작업은 복잡한 수학 문제를 푸는 과정과 닮은 점이 많거든요. 한 마디로 성격이 맞는 사람이 잘할 수밖에 없답니다.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시도해 볼 만하죠. 자신과 성격이 맞는지는 부딪쳐 봐야 아니까요. 그래서 저희는 아이들에게 석고소묘를 한 번 시켜봅니다. 물론 기존의 석고데생과 조금 혹은 많이 다르지만 말이죠. 소묘는 연필이나 목탄 등을 이용해 단색으로 명암을 표현한다는 통상적인 규칙을 깨고 파스텔을 이용합니다. 이유는 단순해요. 수많은 선을 쌓아 색감을 만드는 지난한 과정을 쉽게 표현할 수 있도록 바꾼 것입니다. 파스텔을 눕혀 사용하면 색칠하기 정말 쉽거든요. 명도와 채도에 대한 이해를 활용하여 밝은 원색은 밝은 면에, 혼합 색상은 어두운 면에 칠하면 명암이 쉽게 표현됩니다. 이렇게 명암을 파스텔로 색칠하면 정육면체 소묘를 몇 분 내에, 때로는 수십 초 만에 완성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처음 그리는 정육면체 석고데생이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종이를 꽉 채우는 구도를 만들지도 못하고, 수평 수직 평행이란 규칙을 시행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틀린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사진처럼 똑같이 베껴내는 입시 데생의 세계에선 틀린 것일지도 모르지만, 예술이란 더 넓은 영역에서 보자면 틀린 것이 아니니까요. 수많은 훌륭한 예술가들이 인물을 표현할 때, 누구와도 다른 그 사람만의 성격과 분위기와 느낌을 그리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시각화하기 위해 형태를 과장하고 왜곡하고 특별한 구도를 사용했으니까요.


[정육면체 소묘] 종이 위에 파스텔.   2023년 김별(초4)


위 그림에서 아이는 형태가 틀렸다며 일부분을 수정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고치기 전의 왜곡된 모습에서 특별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고, 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런 느낌을 극대화하기 위해 표정까지 넣으며 얘기를 나눴죠. 

아래 그림은 사춘기에 들어선 승민이의 그림입니다. 정육면체 소묘를 공간의 이야기로 확장했습니다. 


[정육면체 소묘] 종이 위에 목탄.   2023년 송승민(중2)


[솔이의 애교] 종이 위에 연필, 파스텔.   2023년 김별(초4)


위 그림 중 왼편은 온통 직선만으로 혹은 곡선만으로 대상을 표현하는 드로잉 수업 중, 아이가 눈앞에 다가와 애교 부리는 강아지를 그린 작품입니다. 얼굴이 잘린 구도. 보통은 좋지 못한 구도로 폄훼하겠지만, 얼굴 가까이 다가와 애교부리는 강아지의 느낌이 잘 표현되었기에 파스텔로 다시 그려달라 부탁했습니다. 아이들과 그림을 그리다 보면 이러한 구도를 종종 마주합니다. 그때마다 우리 어른은 되뇌어야 합니다. “틀린 구도는 없다, 특별함이 담겼을 뿐이다.” 그 특별함을 이야기 나누고 아이가 기억하여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실력이라 일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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