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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나무 Feb 19. 2024

6,000개의 별처럼 그리운 녀석

  1987년도 12월 첫인상을 단정하게 보여야 한다며 부모님이 사주신 생애 최초 순모 정장에 실크블라우스, 리본 달린 가죽 구두를 신고 첫 부임지로 향했다. 1시간 넘게 배를 타고 겨울 파도를 견뎌 도착한 섬은 큰 배는 부두에 댈 수가 없어 종선으로 갈아타야 하는 작은 섬이었다. 종선에서 내려 바위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차가운 바닷물이  처음 신어본 예쁜 나의 가죽 구두를 적셨다. 찌르르르 차가운 느낌이 메스처럼 뇌리에 스쳤다. 이제는 혼자서 모든 일을 해내야 하는 이곳에서 왠지 내 앞날도 순탄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울컥 눈물이 올라왔다. 두꺼운 겨울 외투에 모자와  목도리를 두르고  가슴을 움츠린 많은 사람들이 잰걸음으로 사라져 버리고 물어물어 도착한 초등학교에는 이십여 분전 말없이 나를 지나쳐간 선생님들이 '풋내기 한 명 왔구나' 하는 가벼운 미소로 나를 맞이해 주셨다. 

 

   그날부터 '나의 무인도에서 살아남기'가 시작되었다. 살을 에이는 듯한 칼바람과 소금기 있는 지하수에 얼굴과 손은 벌겋게 트고 대책 없는 정장차림으로 나타났던 나는 독감에 시달려야 했다. 학교에 타자기가 한 대만 있어 모든 문서가 수기였던 시절, 생애 처음 작성한 16장짜리 계획서에 강조하고 싶은 부분을 빨간색 파란색 볼펜으로 적어서 제출하자 무슨 공문서에 빨간색 파란색을 사용했냐며 다시! ㄹ자를 왜 흘려 쓰냐며 다시! 초임교사 군기 잡는 교감 선생님, 교무실과 교장실, 숙직실에 단 3대밖에 전화기가 없던 시절이라 나 같은 초임은 가족의 안부는 편지로 주고받아야 했다.  들뜬 주말, 바람이라도 불면 우리는 꼬박 일주일을 다시 섬에 묶여야 하는 시간이 부지기수였다. 매번 자리를 비우는 공중 보건의, 길을 걸어가다 보면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쥐와 뱀,  섬 생활에 적응이 된 나의 모습은 큰 키에 섬 거주 생존템인 길고 두툼한 패딩, 털실모자, 목을 둘둘 휘감은 커다란 목도리, 커다란 크로스백 덕에 나는 종종 남자로 오해받곤 했다. 한 번도 갈아본 적 없던 연탄은 왜 이리 잘 꺼지는지 배에서 내리자마자 구입하는 번개탄은 일주일 기본 열 장을 소비했던 것 같다. 그중 최강은 우리 반 동규(가명)였다.


     동규는 요즘 같으면 학폭위가 매일 열리고 강제 전학이나 고소, 고발이 이루어졌을... 매일같이 친구들을 거칠게 때리고 쌍욕을 서슴없이 하는 복장 불량의 남자아이였다. 동료 샘들에게 들은 이야기, 가정방문을 하던 시절이라  듣게 된 그 가정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나라도 동규를 바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공산품을 제외한 모든 식재료를 직접 준비해 판매하는 식료품점을 운영해서 생계를 이어가는지라 가장 바쁜 시간에 유치원에 가고 가장 바쁜 시간에 들어와 차려놓은 밥을 먹고 곤히 잠들어 버리는 탓에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고 하셨다. 다행히 집이 가까운 곳이고 그 섬에는 택시로 사용되는 차가 두 대 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어머니께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계속 돌려보낼 테이니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챙겨 주시라고 미리 말씀드렸다. 그리하여 더러운 옷 갈아입고 오라고 돌려보내고 양말 한 짝 찾아서 두쪽 다 신고 오라고 돌려보내고 머리 감고 곱게 빗고 오라고 돌려보냈다. 세수하고 오라고 돌려보내고 손톱 깎은 후 손톱에 낀 흙먼지 깨끗이 씻고 오라고 돌려보내고 양치하고 오라고 매일같이 돌려보냈다. 그 정도 시간에는 어머니도 좀 한숨 돌리는 시간이기도 했다.  현재라면 유괴나 미아, 교통사고 위험으로 상상할 수도 없을뿐더러 학부모가 아동학대로 신고부터 했을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교무실에 잠깐 다녀온 사이 교실이 떠들썩하여 달려가보니 동규가 여자 친구 두 명을 깔고 앉아 북 치듯 내리치고 있다. 반사적으로 날아가 동규를 떼어내 진정시키기 위해 의자에 앉히려 하자 녀석은 차마 내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온갖 쌍욕을 퍼붓으며 맨발로 창문을 넘어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렸다.


   머릿속이 진공상태가 된 듯했다. 잠시 후 교실을 정리한 나는 한 아이에게 신발을 건네주며 동규 집에 가서 데려오라 했더니  이십여분이나 지났을까 녀석은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헤죽헤죽 웃으며 돌아왔다.  그날 저녁 "선생님 고생하신다고 엄마가 갖다 주래요" 하며 사과가 몇 개  담긴 종이봉투를 불쑥 내게 건넨다 "너 혼자서 여기까지 올라온 거야? 어두워지는데 혼자 갈 수 있겠어? 선생님이  데려다줄게!" 하자 "에이~ 이 정도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아요" 하며 한달음에 언덕을 달려 내려가버린다.


    2학기가 되자 집에 가기 귀찮아진 동규는 스스로 씻고 옷을 단정히 입고 등원하게 되었다. 내친김에  "오늘 엄마, 할머니께 인사하고 왔어? 안 했으면 다시 가서 하고 와야지!" 돌려보내기를 반복하자 교실 문에서 나와 마주치면 "아! 인사~" 하며 싱긋 웃고는 다시 가서 인사를 하고 왔다.  그럼에도 동규의 욕지거리와 친구를 때리는 행동은 종종 튀어나왔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물걸레를  쥐어주며 신발장 위나 테이블 위를 닦도록 했다. 일 년이 지나자  동규는 놀라운 행동 변화를 보여줬다. 의젓한 모습으로 앞에 나와 유치원 졸업장을 받는 동규를 본 이모님은 동규가 저렇게 변할 수도 있느냐며 어머니께서 준비하셨다며 만류하자 한벌로는 안된다며 졸업식 도중 나가셔서  삼중 보온 메리 분홍색 내의를 한벌 더 사 오셨다. 섬 거주 생존템이었던 내의 중 삼중 보온메리는 약간 두꺼운 내겐 잊을 수없는 이름의 선물이 되었다.       


   이야기를 읽고 어린아이를 방치 학대 한 거 아니냐 동규의 어머님을 비난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차마 여기에 다 싣지 못한 이야기도 있다. 내겐 그분의 이야기를 여기에  풀어놓을 권리가 없다. 그래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스물두 살 어린 선생이어서 아무 말 없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지만 지금 그 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어머니 장하세요. 어머니 덕분에 동규가 엇나가지 않고 올곧게 자랄 거예요 대단하세요 저도 최선을 다해 볼게요" 말씀드렸을 것이다.  두 손 꼭 잡아드리고 안아도 드렸을 것이다.  


   지금은 동규도 사십 대 어른이 되었겠다. 어떻게 변했을까  동규도 어엿한 아빠 되어 행복한 삶을 살고 있겠지?.  종종 그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날이 있다. 지구별을 떠나 자기의 별로 돌아간 어린 왕자는 지구별에서 목을 축였던 맑은 우물을 떠올리며 밤하늘 육천 개의 우물 중 어딘가에 있을 생떽쥐베리를 그리워하고, 생떽쥐베리는 밤하늘 육천 개의 반짝이는 별을 보며 자기 별로 돌아간 어린 왕자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나도 지구별 어딘가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그 녀석이 그립다. 먼 기억 속 일지라도 그의 앞날에 평안과 건강을 바라는 한줄기 기도를 떠올리며 그가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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