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를 구해주셨던 언니 고맙습니다. "
얼마 전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영화 '건국 전쟁' 이야기가 나왔다. 어떻게 수많은 자국민을 학살하고 부정부패를 일삼고 정적제거에 골몰했던 사람에게 국부라니... 집에 돌아온 후에도 마음이 어지러웠다. 친구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겪었을까? 시골에서 중학교를 다니느라 그 시기 광주로 모든 통행이 금지당하고 언론이 통제되고 전화마저 두절되어 외로이 광주만 도륙되고 있었던 시기에 그냥 그 친구는 티브이에 나오는 뉴스로만 광주의 거지와 양아치가 일으킨 폭동이라는 가짜뉴스만을 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3학년이었다. 오전 수업이 끝나지 않은 3교시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담임선생님이 황급히 교실로 들어오셨다.
지금 바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디 들르지도 말고 구경도 하지 말고 곧바로 집으로 가라.
공수부대원과 마주치거든 도망가거나 소리 질러서는 절대 안 된다.
공수부대원이 뭔가를 묻거든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말고 벽을 등지고 서서 이야기해라
학교에서 연락이 갈 때까지 학교에 나오지 마라. 이것으로 종례 끝이다 지금 당장 나가야 한다.
뭔가 심상치 않게 시국이 돌아가나 보다. 불안한 마음에 책가방을 들고 광주 공용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도대체 좀 전에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새하얀 카라에 까만 교복을 입은 단발머리 여중생이 본 광주공용버스 터미널은 공포스러웠다. 평상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앉아있던 긴 의자들은 여기저기 나뒹굴고 매표소 부스와 매점의 유리창은 전부 깨져 바닥에 유리 파편이 떨어져 있었다. 바닥에는 하얀 최루탄 가루가 밀가루처럼 쌓여 사람들의 발자국에 어지럽게 밀려있고 모든 문이 다 열려있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로 급히 움직이는데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터미널 안쪽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최루탄 가스에 숨을 쉴 수도 눈을 뜰 수 도 없을 지경이었다.
교복소매로라도 눈물을 닦고 코를 막아보려 고개를 숙인 나를 누군가 내 손을 잡으며 물었다.
"너 어디로 가냐"
" 화순 능주요!"
"마지막 버스 방금 출발했는데"
복장으로 보아 개표구에서 표를 검사하는 언니였다.
"이리 와!" 그 언니는 나의 손을 잡고 냅다 뛰었다.
"나 표 아직 못 끊었어요" "지금 표 끊을 때가 아니야~"
언니랑 개표구에 와보니 버스가 없다. 그 언니는 대기 중이던 버스와 출발하려는 버스의 어지러운 틈새를 나의 손을 잡고 또 뛰었다. 한참을 뛰어 코너를 돌아 터미널을 빠져나가려 하는 버스를 그 언니는 거칠게 두드려 버스를 세웠다.
"아저씨~! 이 학생 데려가야 해요, 능주 간대요" 그렇게 나는 능주로 향하는 마지막 버스에 올랐다.
재채기와 눈물을 훔치며 돌아보자 그 언니는 잠시 버스 쪽을 바라보다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만약 그 순간 그 천사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광주에 피신할 일가친척도 없고 통신이나 통행이 차단되어 부모님께 연락할 방법도 없고 수중에 돈도 없고 화순 쪽으로 걸어간다 한들 검문검색에 통제당했을 것이고 자칫 시위현장에 서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공수부대 육각방망이와 총검에 처참이 스러져가는 일이 하루면 수십 수백 건이던 시절이었다.
그 언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언니 고마워요 언니 덕분에 내가 건실하게 살아있어요. 언니가 그날 우리 가족 모두를 살리신 거예요"라고 인사라도 드리고 싶다 했더니 친구가 "네가 찾지 않아도 너를 구해 주셨으니 그 언니 하늘 복 다 받으셨을 거야"라고 위로한다.
집에 돌아와 보니 광주에 친구 만나러 간다며 전날 광주에 갔던 작은 오빠가 집에 도착하지 않았단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른 집 아들들은 화순너릿재를 공수부대가 지키고 있어 근처 야산을 넘어왔다며 돌아오고 있는데... 새끼를 잃은 어미의 애간장을 끊어내는 울부짖음이 밤마다 한 달여 계속되었다.
한 달 여가 지나고 광주로 통행이 가능해지자 부모님은 광주 상무관에 안치된 시신들 속에 아들이 있을까 찾기 시작했다. 작은 오빠 비슷한 시신을 찾았다는 소식에 엄마는 실신하고, 이미 시신이 부패되고 총알이 입을 관통해서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지만 체구나 연령이 비슷해 보이고 왼손에 화상자국이 있는 시신을 장례 치르기로 한 날, 작은 오빠가 살아있다는 전화를 받고 엄마는 혈압이 240까지 치솟으며 또 실신을 했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가 상영되던 날, 영화관을 찾은 우리 부부는 한쪽 구석에서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나는 유가족도 아니고 다친 가족도 없지만 40년이 지난 지금도 남의 일 일수 없다. 국가적 폭력이 국민들의 가슴에 대를 물려 이리 피멍자국을 남기는데 '독재를 한 면도 있지만' 단순한 문장으로 일축하지 않아야 한다. "적당히 해라 그런다고 죽은 새끼가 돌아오냐!" 그런 패륜적 발언은 닫아야 한다.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청산되지 않은 역사가 반복되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